메뉴 건너뛰기

close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금속활자본이나 목판이 제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그 자체가 불법은 아닙니다.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금속활자본이나 목판이 제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그 자체가 불법은 아닙니다.
ⓒ 임윤수

관련사진보기


책상 위에 놓여있는 컴퓨터 자판을 보고 '글씨'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종이에 '사랑'이라는 글씨가 프린트되어있다고 해서 '사랑'이라는 글자 자체가 '사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컴퓨터로 치건 손으로 쓰던 '사랑'이라는 글자는 인간들이 교감하거나 주고받는 사랑, 사랑하는 마음과 느낌을 나타내는 기호이며 표시입니다.

청주에는 '고인쇄박물관'이 있습니다. 이 박물관을 흔히들 '직지박물관'이라고도 부르는 건 현존하는 금속 활자본 중 세계 최고인 직지본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쇄문화유산적인 가치로만 봐도 참 자랑스러운 게 <직지>입니다. 하지만 <직지> 본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금속활자나 인쇄술은 직지에 담긴 의미(뜻)를 인쇄하기 위한 도구나 수단입니다. 사랑이라는 글씨를 타이핑할 수 있는 펜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쇄물 자체가 <직지>가 되는 것도 아닐 겁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교한다면 인쇄물 자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직지>에 담긴 뜻이야 말로 백운 화상이 <직지>라는 손가락을 통해서 가리키는 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려 말엽 백운 화상(1299~1375)이 펴낸 <직지(直指>의 원명은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 佛祖直指心體要節)>인데 이를 줄여서 <직지심경(直指心經)>이라고들 합니다. 이 <직지>에는 과거 칠불과 인도의 28조사 그리고 중국의 110선사들이 남겨 놓은 귀중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직지>에 담긴 뜻이 달처럼 밝고 제아무리 좋다고 해도 오늘을 사는 우리, <직지>를 읽는 독자들이 직지에 새겨져 있는 글을 읽는 정도에 그친다는 건 그냥 한 권의 인쇄물,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만을 바라보는 헛된 시간에 불과할 것입니다. 읽으며 새기려고는 하나 이런 이유와 저런 사정으로 제대로 새길 수 없다면 이 또한 달을 보려고는 하나 달은 보지 못하고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허공만을 뒤적거리는 답답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직지에 대한 단상 <직지, 길을 가리키다>

<직지, 길을 가리키다>┃지은이 이시우┃펴낸곳 민족사┃2013.08.26┃2만 9500원
 <직지, 길을 가리키다>┃지은이 이시우┃펴낸곳 민족사┃2013.08.26┃2만 9500원
ⓒ 임윤수

관련사진보기

<직지, 길을 가리키다>는 백운 화상이 <직지>에 담아 가리키고 있는 달, 역대 조사들께서 깨우침으로 남긴 선어에 담긴 뜻을 달빛을 쐬듯이 새길 수 있도록 밝게 밝혀 놓는 내용입니다. 과거 칠불과 인도의 25조사, 중국의 130선사들과 <직지>를 엮은 백운 화상의 발원문 등을 청명한 가을하늘처럼 해석하고 휘영청 밝은 달빛처럼 풀이해 놓았습니다.

'할머니는 원래 여자다.'

"무슨 얘기야?"하고 반문할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할머니가 원래 여자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당연한 이야기니 의심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어느 선사께서 크게 깨달았다는 걸 확인하는 말로 한 말이라고 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이 말에 '무슨 깊은 뜻이 들어있을까'를 생각하며 의미를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지통 선사가 귀종 선사의 문하에 있다 어느 날 밤에 홀연히 문득 법당을 돌다가 부르짖는다.
"나는 이미 크게 깨달았다"라고 하여 대중이 놀란다.
다음날 귀종 선사가 법상에 올라서 대중을 모아 놓고 묻는다.
"어제 크게 깨달았다는 승려는 나오시오."
지통 선사가 나가서 말한다.
"지통입니다."
귀종 선사가 말한다.
"그대는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크게 깨달았다고 했는가? 본 것을 설명해 보라."
지통 선사가 대답한다.
"할머니는 원래 여자다."

만법의 진리는 본래부터 간명한 것으로 쉽고 보편적인 것이다. 흔히 진리는 어렵고 신비로운 불가사의한 이법으로 보지만, 그런 것은 아직 진리라고 할 수 없고 사변적인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깨달음도 지극히 간명한 진리의 체득이다. 기상천외한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불가사의한 경지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할머니는 원래 여자다"라는 것은 인간이 그렇게 정의한 것이다. 이것이 실상을 바르게 본 것으로 깨달음에 해당한다. 할머니를 위대하고 숭고한 특별한 존재로 경상해서 본다면 할머니라는 존재의 실상이 평범한 여자를 떠나 신격화되면서 불법의 진리를 벗어나게 된다.

선지식이라는 것도 '선지식은 사람이다'라는 것이 진리이지 선지식을 깨달음이 성취된 특별한 존재로 본다면 이것은 이미 만유의 평등성과 보편성의 불법을 벗어난 것으로 진리가 될 수 없다. -<직지, 길을 가리키다> 382쪽

참 쉽습니다. 의심할 것도 없고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깨우침이며,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이 깨우침이라는 것을 몇 줄의 설명을 통해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역대 조사들의 깨우침 표현이 이렇게 담백하듯 <직지>를 설명하고 있는 <직지, 길을 가리키다>의 내용 또한 이와 다르지 않게 사실적이고, 쉽고, 명료하고 담백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가 훤하게 보여

어떤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무엇이 조사(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조주 선사가 답하기를 "뜰 앞의 잣나무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참 뜬금없는 대답입니다. 말장난처럼 보입니다. 동문서답도 이런 동문서답이 없습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선'을 도통하지 않으면 어림조차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한 뜻이 담긴 말처럼 들립니다. 대개의 선문답들이 이래서 어렵고 헷갈립니다.

조주 선사가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뜰 앞의 잣나무가 보였다. 그래서 조주 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다"라고 하면서 잣나무에도 부처의 불법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결국 조주 선사와 잣나무 사이의 연기적 관계에서 평범한 불법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직지, 길을 가리키다> 235쪽

지금껏 보아왔던 여느 손가락질과는 달리 달을 가리키고 있는 높이가 눈높이라서 이 책을 보다 보면 어느새 직지에 담긴 가르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껏 보아왔던 여느 손가락질과는 달리 달을 가리키고 있는 높이가 눈높이라서 이 책을 보다 보면 어느새 직지에 담긴 가르침을 보게 될 것입니다.
ⓒ 임윤수

관련사진보기


'뜰 앞의 잣나무'라는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던 절벽감이 와장창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달빛을 가렸던 구름이 걷히며 휘영청 밝아지고, 뜰 앞에 잣나무가 훤하게 보이는 느낌입니다. 지레 짐작으로 어렵다고만 생각했던 선문답, 읽고 있으면서도 무슨 뜻인지를 새기지 못했던 역대 조사들의 선어가 생활 속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천문학자 이시우 서울대 명예교수의 직지에 대한 단상, <직지, 길을 가리키다> 또한 역대 조사들이 남긴 가르침에 깃들어 있는 불법과 깨우침을 보라는 손가락질 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보았던 여느 손가락질과는 달리 달을 가리키고 있는 높이가 눈높이라서 손가락질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달빛도 보게 될 것입니다.

뜬금없이 들려 헷갈리고, 무슨 말인지를 몰라 어렵게만 생각되던 선문답. <직지>에 담긴 깨우침의 글들을 단박에 새기며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길을 가리키고 있는 직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 <직지, 길을 가리키다>┃지은이 이시우┃펴낸곳 민족사┃2013.08.26┃2만 9500원



직지, 길을 가리키다 - 천문학자 이시우 서울대 명예교수의 직지에 대한 단상

이시우 지음, 민족사(2013)


태그:#직지, 길을 가리키다, #이시우, #민족사, #직지심경, #조주 선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