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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을에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이 자명한 사실. 아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이 완강한 사실. 평화는 아이들이 앓지 않는 것이다. '강정 평화마음 동화'는 구럼비라는 우주 놀이터를 아이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사실을 바탕으로 쓴 손바닥 동화이다. 그 마을에 아이들이 자라고 있음을 자주 잊은 일을 용서받기 바라는 글쓰기이다. - 기자 말

ⓒ 이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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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힘이 세다. 냇길이소로 흰 밧줄을 내려주고 있는 나무도 힘이 세다. 굵기가 아빠 종아리만 한 어리고 단단한 참나무다. 냇길이소는 벼랑이 빙 두르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이 나무에 묶인 밧줄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몸무게가 90킬로그램이 넘는 진섭이 아빠도 마찬가지다.

나무는 힘이 들 텐데 사람이 매달릴 때마다 아주 조금만 흔들리려고 애쓴다. 밧줄을 잡고 버티는 순간 나무와 눈이 마주치면, 한눈에 나무 마음을 읽게 된다. 아이들이 내려갈 때나 어른이 내려갈 때나 흔들림에 별로 차이가 안 난다. 자기에게 기대는 모든 사람을 잘 보살피는 게 나무가 할 일이기 때문이다.

밧줄에는 매듭이 열 개쯤 되는데 주르르 미끄러지지 말라고 군데군데 지워놓았다. 손을 탁, 탁, 잡아주는 매듭이다. 마지막으로 밧줄을 놓고 인사하면 나무도 싱긋 웃는 게 분명하다. 

'나무야, 고맙다.'

소에 가득 찬 물 쪽으로 내가 돌아설 때, 등 뒤에서 밧줄을 살짝 당기는 게 나무의 웃음이다. 그 웃음은 가지런한 그늘이나 햇빛으로 보일 때도 있다.  

소 가까이 걸어가 자갈밭에 앉았다. 가물어도 여기는 물이 많다. 원앙새 두 마리와 오리 네 마리가 벼랑 그늘에 떠 있다. 낮은 곳에 앉아서 소를 바라보면 물이 슬그머니 일어나 나에게 오는 느낌이 든다. 나보다 키가 클 게 분명한 물은 종일 무슨 생각을 하며 저기 앉아 있을까. 양 갈래 길로 물을 흘려보내며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냇길이소.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고 달려왔는데, 이상하다. 화가 어디로 가버렸다. 자갈밭에 누웠다. 하늘도! 하늘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탑도 맹글멍 이야기도 들으멍
 
"조심해, 조심!"

혜선 쌤 목소리가 들렸다. 유정이가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사실 조심해야 할 사람은 유정이가 아니라 혜선 쌤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많이 타봐서 무척 익숙하다.

"쌤이나 조심하셈!"

벌떡 일어나 밧줄 아래로 갔다. 유정이는 이미 내려와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역시 쌤은 엉거주춤 내려오셨다. 착지하자마자 돌아서서 우리를 양팔에 끌어안고 우는 소리를 하셨다.

"아우~ 넘 무서웠어~."

쳇, 두 사람을 버려두고 혼자 달려온 내가 멋쩍을까봐 과장하시는 게 틀림없다. 물론 쌤은 아직 나무와 눈 맞추는 실력도 없다. 나무가 붙들어주는데 뭐 무섭다고…. 쌤은 또 냇길이소 쪽으로 달려가며 배우처럼 말했다.

"아, 오늘도 역시 냇길이 대왕님이시다!"
"쌤, 냇길이소가 대왕님이라마씸?"
"상규 너,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 모르지? 40일 넘게 비가 안 왔는데 냇길이소는 안 마르고 강정천은 계속 흘렀잖아.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 진정한 강물의 대왕이주!"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마씸? 쌤은 어디서 그렇게 멋진 말 알아수꽈?"
"어느 어른이 하신 말씀이다. 쌤이 좋아하는 말씀이야."
"쌤, 우리 마을도 바다를 포기 안 햄수다."

쌤이 내 손을 꼭 잡았다. 유정이는 자갈을 주워 탑을 한 개 완성 중이었다. 쌤은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앉더니 갑자기 자갈을 어깨 뒤로 던지기 시작했다. 하나, 두울, 세엣 세면서. 

"쌤, 무사 경햄수광?(왜 그러세요)?"
"상규야, 유정아, 쌤이 옛날이야기 해줄게. 옛날에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죽이는 데 골몰하던 시대가 있었대. 보다 못한 신들이 인간세상 조사에 나섰어. 나그네로 변신하고 왕궁을 찾아갔지. 그런데 식사 때가 되자 왕은 어린아이를 죽여 음식을 만들어준 거야. 신들은 사랑을 잃어버린 인간을 다 없애버리기로 했지. 그날부터 몇 달간 폭풍우와 넘치는 바다가 땅을 휩쓸었어. 딱 두 사람, 착한 부부인 데우칼리온과 피라만을 살려줬지."
"경행마씨?(그래서요?)"
"이 부부는 살아남은 게 감사했지만, 둘만 살아가기엔 무섭잖아. 그래서 신전을 찾아갔어."
"경행 어떵되수꽈?(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기도를 했더니 신이 나타나서 '네 어머니 뼈를 어깨 뒤로 던져라' 그런단 말이지."
"어머니 뼈가 어디 있었는데요?"
"두 사람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한동안 머리를 싸맸지. 그러다가 인간의 어머니는 땅이고 그 뼈가 돌인 걸 깨달았어."

쌤은 이야기를 멈추고 어깨 뒤로 돌을 한 번, 두 번, 던지고 우리는 궁금해서 고개를 쑥 빼고 바라봤다.

"두 사람은 이렇게 돌을 던졌겠지? 그랬더니 남편이 던진 돌은 남자가, 아내가 던진 돌은 여자가 됐고, 사랑으로부터 태어난 인간이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대."
"와- 어디서 들은 이야기꽈? 쌤은 이야기 보따리주게."

"그런데 쌤은 무사 돌을 대꼄수꽈?(왜 돌을 던졌어요?)"
"응. 이 마을에서 너희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기 바라니까. 내가 어깨 뒤로 돌을 던질 때마다 씩씩한 남자, 힘차고 지혜로운 여자들이 강정으로 왔으면 좋겠어."
"쌤은 진짜 착하고예, 천사마씸."
"고맙다 유정아. 이녁밖에 없주게이.(너밖에 없다)"

"와서 우리와 손잡아 주세요"

쌤과 우리는 아래쪽으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물들은 걸음이 바쁘다. 물과 나란히 걸으면 물은 조금씩 엄마처럼 앞서가며 손을 흔든다. 우리는 자갈 때문에 비척거리고 바위를 돌아가느라고 더 느려진다.

빠르게 가는 물들은 과랑과랑(반짝반짝) 정수리가 빛난다. 비탈의 나무 그늘이 어둡게 내려와 잠긴 곳에서도 물은 쉬지 않는다. 고여서 머뭇거리는 물은 없다. 혜선 쌤 말처럼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 물들인가 보다.

"이것 좀 봐, 장수풍뎅이다!"

기우뚱하게 자란 참나무 둥치 쪽에서 유정이가 불렀다. 유정이는 쌤과 함께 식물채집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오는 중이었다. 달려가 보니 참나무 둥치에 장수풍뎅이 한 마리가 느리게 기어 다니고 있다. 신기하다. 상당히 컸다. 주둥이 부근에서 뻗어 나온 뿔을 빳빳하게 치켜세운 근사한 놈이었다. 유정이가 물었다.

"쌤, 수컷인지 암컷인지 구분할 수 있어요?"
"어? 수컷과 암컷이 다르게 생겼니?"
"얘는 수컷이주게. 암컷은 뿔이 없다마씸. 덩치는 암컷이 더 커요."
"쌤, 사슴벌레하고 장수풍뎅이는 구분할 수 있수꽈?"
"음…. 모르는데요. 흐흐." 
"곶자왈에 참나무 많은 데 가면 있는데, 사슴벌레는 몸이 더 길쭉해요. 이마가 평평하고  이 뿔도 없어요."

곤충박사 유정이는 물땡땡이도 한 마리 발견했다. 녹나무 잎사귀를 따서 손에 부벼 냄새를 맡기도 하며 우리는 취수장 가까운 곳까지 걸었다. 이 취수장이 서귀포 시민 70%가 받아먹는 수돗물이 된다고 한다. 백록담을 내려와 영실을 지나 지하로 현무암 암반을 흘러 정수된 물이 냇길이소에 솟아오르고 여기 고인다.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걸음을 재촉하던 물들이 여기 와서 사람들과 만나기를 기다린다. 진짜 깨끗한 물이다. 
 
"육지 사람들은 마트에서 생수 사먹지만이, 우리는 수도꼭지만 틀면 생수가 나온다마씸."

아빠가 가르쳐준 말들을 나는 그대로 쌤과 유정이에게 해주었다.

"우리 마을 암반은 단단해서 물을 보관하는 커다란 물통 닮안. 용암으로만 된 암반과 다르댄. 그 물통 마개가 구럼비라. 그러니 구럼비 폭파하면 물이 고이지 못 하고 쏟아져서 큰 근심이라마씸."
"기(그래)?"
"강정은 왜 이렇게 멋지다니? 지하에 거대한 암반 물통을 거느린 마을이라니!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 쌤이 그림이 좀 되거든?"

이 물들은 한라산이 보내준 물이다. 제주도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왜 우리 마을이 괴롭힘 당하는 걸 다른 곳에서 잘 모를까. 설문대할망은 언제쯤 우리 마을을 도와주실까. 나는 갸름하고 흰빛 나는 돌 두 개를 주머니에 넣었다. 혜선 쌤은 두 손을 가슴에 얹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취수장에서 거슬러 올라오는 길에 아까 보았던 참나무로 달려가 보았는데 풍뎅이는 달아나버렸는지 없었다. 우리는 베락마진소로 갈 예정이기 때문에, 밧줄을 타고 올라가 다시 산길을 내려가야 한다. 베락마진소는 취수장 아래쪽 강정천이다. 취수장이 가로막고 있어서 물길로는 걸어 내려갈 수가 없다.

냇길이소에게 인사하고 쌤부터 차례로 밧줄을 타고 올라갔다. 나는 남자니까 맨 나중에 올라왔다. 밧줄을 잡기 전에, 자갈 두 개를 꺼내 얼른 어깨 너머로 던졌다. 나무가 내 마음을 봤다.


태그:#강정, #냇길이소, #취수장, #자갈, #데우칼리온과 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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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국작가회의. 2000 한국일보로 등단. 시집 <이발소그림처럼> 공동저서 <그대, 강정>.장편동화 <너랑 나랑 평화랑>. 2011 거창평화인권문학상

** 월간 작은책에 이동슈의 삼삼한 삶 연재중. 정신장애인 당사자 인터넷신문 '마인드포스트'에 만평 연재중. 레알로망캐리커처(찐멋인물풍자화),현장크로키. 캐릭터,만화만평,만화교육 중. *문화노동경제에 관심. 또한 현장속 살아있는 창작활동을 위해 '부르면 달려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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