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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축구를 싫어한다. 보는 것, 직접 하는 것 모두 싫다. 그 무엇보다 선수나 관객들이 축구 경기를 둘러싸고 표출해내는 폭발적인 격렬함이 싫다. 범죄적인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유럽 훌리건들의 예를 들어도 될까. 꼭 그런 게 아니라도 선수들의 몸과 몸이 강하게 맞부딪치면서 발생하는 부상이나 상처, 골절 등은 정말 아니올시다이다.

내 생각이지만, 그 어떤 운동 경기에서보다 심하게 투영되는 경쟁주의도 싫다. 경쟁은, 어린이집에서 코흘리개 꼬맹이들이 하는 축구 '놀이'건 학생들의 반별 대항 축구 '경기'건 예외가 없다. 그 정점은 경쟁 관계에 있는 국가끼리의 국가대표 경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건 거의 숫제 두 나라 군대가 벌이는 '전쟁'처럼 다뤄진다. '공격', '방어(수비)', '전략'이나 '한일전', '태극 전사' 등은 마치 전쟁을 묘사하는 군사 용어처럼 다뤄진다.

지난 주말 동아시안컵 축구대회 한·일전에서 벌어진 사달도 이와 관련된다. 한국 응원단은 거대한 펼침막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문구를 써 스탠드에 내걸었다. 언론에서는 일본 응원단이 과거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먼저 내걸었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다. 어쨌든 두 나라 사이의 과도한 경쟁 심리가, 얽히고 꼬인 과거사 문제에 투영되면서 극도의 감정 싸움으로 번진 것이 아닐까.

문제는 이런 싸움이 그저 한바탕 감정 대립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두 나라가 맺고 있는 외교나 경제 관계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각료가 한국의 민도(民度, 국민성?)가 의심스럽다는 말을 내뱉고, 우리 외교부가 "무례하다"고 받아치는 게 과연 정상인가.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개탄스러운 태도를 통해 보면, 그 문구에 담긴 취지나 본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반일'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좋다는 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나. 과도한 일반화 오류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말해 본다면, 왜 많은 사람이 축구장에만 가면 '느닷없이'(?!) 국가주의자나 애국주의자, 또는 격렬한 민족주의자가 되는가. 캐나다의 정치학자 마거릿 콘은 <래디컬 스페이스>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민중적 공론장을 구성한 터전들은 성찰과 판단을 위한 여지를 확보해 나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스포츠 경기장이나 대규모 광장과 같은 원형적인 파시스트 공간들은 개인이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여지를 최소화하고 지도자 및 국가와의 일체감을 고양시키는 방식으로 대중 의례를 거행하는 무대를 제공했다. - 마거릿 콘(2013), <래디컬 스페이스>, 삼천리, 258쪽.

이런 파시스트 공간은 주체적인 개인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령 축구나 야구 경기가 주로 펼쳐지는 대형 운동장을 생각해 보자. 프랑스의 철학자인 앙르 르페브르(1901~1991) 식 개념으로 분류하면 운동장은 '지배받는 공간'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자신이 아니라) 남들이 원하는 것을 원하고, 남들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표준화한 시민이 된다. 독창적인 이념이나 독자적인 전통, 혹은 역사를 완전히 결여한 사람이 되어도 누가 뭐라 말하지 않는다.(위의 책 150, 151쪽 참조)

어제 날짜로 민주당이 서울 광장으로 나섰다. 노회찬 전 국회의원은 이를 나선 게 아니라 (새누리당 때문에-기자) 내몰린 것이라고 비꼬았다. 하지만 나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몸부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걱정이 없지 않다. 그들이 나선 공간이 하필 '광장'이기 때문이다.

광장은 콘이나 르페브르적인 의미에서 볼 때 '파시스트 공간'이나 '지배받는 공간'이다. 적어도 그러는 한, 광장에서는 '독재자'나 '지배자'의 논리가 일방통행식으로 횡행할 수밖에 없다. 자유롭게 사고하는 주체들의 각자 판단이 들어설 여지가 많지 않다. 이 '독재자'나 '지배자' 자리에 '민주당'도 넣어보자. 그건 너무 지나쳤다고 비난할까.

내게는 민주당이 서울 광장은 시민 사회에 맡겨두는 대신 서울역이나 강남 고속터미널의 한 귀퉁이로 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바로 어제부터 곧장 그런 곳에 가서 오가는 시민들에게 땀을 뻘뻘 흘리며 전단지를 나눠주고, '촛불'을 권하기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서울시민뿐만 아니라 지역 곳곳을 오가는 전국민을 상대할 수도 있으니 더 좋지 않았을까. 서울 광장으로 나서는 모양새가 '쇼' 같은 느낌을 강하게 풍겨서 하는 소리다.

이름 없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와 촛불을 켜든 채 앉아 있는 '서울 광장'과, 스스로는 새누리당보다 훨씬 약하다고 '징징'대지만, 그래도 어엿한 제1야당인 민주당이 천막을 세운 '서울 광장'은 전혀 다르다. 그곳이 민주당만의 '좁은' 공간이 되어 촛불의 의미가 반감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서울 광장의 서편 한쪽에 세운 천막은 서울시가 규정한 최소 허용 규모보다 작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나는 민주당이 천막 규모를 줄일 수 있다면 더 줄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좁은 곳에서 입술을 꾹 닫은 채 단식 농성을 하는 데에는 당 대표 한 사람, 또는 당 부대표까지를 포함한 두 사람이면 충분하다.

나머지 의원들? 광장의 동남북 편과 서울 시내 곳곳, 전국 팔도에 뿔뿔이 흩어져서 민주주의의 죽음을 알리는 전단 홍보지를 쓰러질 때까지 돌려야 하지 뭣하겠나. 그것이 이번에 민주당이 서울 광장에 세운 천막을 단순한 쇼 무대가 아니라 국민과 함께 하는 무대임을 알리는 유일한 길이 되지 않을까. 이번에 대충 하고 넘어가면 무엇보다 국민들이 용서하지 않음을 민주당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민주당은 사즉생의 각오로 이번 장외 투쟁에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민주당, #장외 투쟁, #사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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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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