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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미얀마 붐'이 일고 있다. 군부독재를 청산하겠다고 밝힌 미얀마 신정부 출범 이후 미국과 EU·일본·인도 등 경제선진국에게 미얀마는 글로벌 경제의 '그린 블루오션'으로 주목받고 있다. 우리 기업들도 세계 글로벌 기업들과 함께 개척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 이에 미얀마가 우리에게 '신 블루칩'으로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지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명과 암을 가늠해본다. 이번 취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성준 이사장)의 기획취재 지원을 받아 지난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됐으며, 미얀마 경제수도인 양곤과 인접국 라오스의 일부 도시를 둘러봤다. [편집자말]
김창규 미얀마포스코 법인장은 지난 6월 21일 오후 인터뷰에서 미얀마의 경제상황과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 등에 대해 설명했다.
 김창규 미얀마포스코 법인장은 지난 6월 21일 오후 인터뷰에서 미얀마의 경제상황과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 등에 대해 설명했다.
ⓒ 유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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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지붕(아연도금강판)을 택한 것은 미얀마인들이 소득 수준이 낮아서다. 돈 없는 사람들은 풀 지붕에서 살았다. 문제는 비가 많이 오기에 (풀로 된 지붕은) 방수가 되지 않는 것이다. 풀보다 나은 게 함석이었다. 지붕의 재료로 함석은 긴 수명치고 가장 싼 것이었다. 단점은 쉽게 뜨거워지고, 우기가 긴 나라에서 비가 내릴 때마다 시끄러운 것이다. 하지만 가난하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소음은 참으면 된다. 미얀마인들에게 함석지붕은 쌀 다음으로 중요하다."

16년 전인 1997년 7월 미얀마 양곤에 첫발을 내디딘 김창규 미얀마포스코(Myanmar-POSCO) 법인장에게 미얀마는 생소한 미지의 땅이자 시간이 멈춘 곳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는 그 누구보다 일찍 '황금의 나라'에 왔으나 노다지를 캐기에는 현실은 열악했다.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땅으로' 되기까지 김 법인장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제3대 미얀마포스코 법인장인 그를 지난 6월 21일 미얀마 양곤 현지 공장에서 만나 성공 스토리를 듣기 전에 미얀마 경제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들었다.

"아! 울려고 내가 왔던가~" 위기의 연속, 그리고 극복의 힘

미얀마포스코 공장 정문 모습.
 미얀마포스코 공장 정문 모습.
ⓒ 유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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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는 1988년 9월 시장경제로 전환하면서 외국인 투자를 허용했고, 1990년대 초반부터 이른바 '미얀마 붐'이 일었다. 김 법인장은 이때를 1차 미얀마 붐이라고 명명했다.

"제1차 미얀마 붐이 있기 전에 이미 김우중 회장이 이끄는 대우가 미얀마에 진출했고, 두 번째로 박태준 회장이 1994년 7월 과장급 주재원 1명을 파견해 미얀마사무소를 차렸다. 그리고 1997년 11월 한국-미얀마 합작회사로 미얀마포스코를 건립했다. 포스코와 미얀마 군인복지법인(UMEHL)이 각각 7 대 3의 비율로 320만 달러를 출자했다. 이미 미쓰이, 스미토모 등 일본 업체들(4곳)이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던 함석지붕 시장에 뛰어들면서 일단 '미얀마를 배우자'란 생각을 갖고 시작했다.

다른(일본) 업체의 제품과 우리 제품의 품질 차이는 별로 없었다. 일본은 유통시장이 좋을 때 들어왔을 뿐이었다. '포스코는 철강 전문회사'이고, 그런 데서 만든 제품이기에 밀릴 수 없었는데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포스코를 미얀마 사람들이 몰랐던 것이다. 2년 연속 적자였다."

미얀마 양곤 시내를 벗어나 미얀마포스코 공장을 찾아가는 길에 본 양곤도의 한 마을 풍경.
 미얀마 양곤 시내를 벗어나 미얀마포스코 공장을 찾아가는 길에 본 양곤도의 한 마을 풍경.
ⓒ 유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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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이상 유지되는 함석지붕은 미얀마인들에게 안락한 주거생활을 위해 필수품이자 부의 상징이었다. 포스코가 함석지붕 시장에 진출한 것도 이런 수요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장을 설립한 첫해(1997년)부터 난관이었다. 한국에 IMF 금융위기가 찾아왔고, 이 여파가 미얀마에도 전해져 진출해 있던 우리 기업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 법인장은 "어렵게 합작회사로 시작했는데, 남들이 떠난다고 해서 같이 떠날 게 아니라 '다 떠날 때 (미얀마에) 남아서 의리를 지키고 미래를 내다보자'고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이후 일본기업이 독점하다시피 한 함석지붕 시장에서 5번째 후발업체로 참여해 지금의 시장 점유율 1위에 올라서기까지 험난한 행보는 계속 이어졌다.

"공장을 준공하고 1999년 초 지붕을 만드는 데 쓰이는 함석을 드디어 생산하기 시작했다. 회사 건립 후 3년째 되던 해인 2000년 7월이었을 것이다. 양곤 시내에서만 우리 미얀마포스코 물건을 볼 수 있었다. 반면 지방에는 여전히 우리 물건은 없었다. 속이 탔다. 시장을 돌며 이런 사실을 보고는, 답답한 내 마음이 마침 긴 우기를 맞아, 비가 내릴 때마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란 노래가 생각났다. (우기 때면) 참 비도 많이 왔다. 또 전기도 잘 안 들어와 선풍기도 돌릴 수 없어 땀을 흘리면서 마음속에선 '한국에서 도망 나온 내가 이러다가 오히려 한국으로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걱정도 많았다. 그러다 드디어 2001년 첫 흑자가 나기 시작했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 마치 죽었던 심장이 다시 뛰는 소리 같았다"

김창규 미얀마포스코 법인장은 지난 6월 21일 오후 인터뷰에서 미얀마의 경제상황과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 등에 대해 설명했다.
 김창규 미얀마포스코 법인장은 지난 6월 21일 오후 인터뷰에서 미얀마의 경제상황과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 등에 대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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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쁨은 잠시. 난관은 물밀 듯이 찾아왔다. 일본 업체들의 벽은 여전히 높았고, 2004년 이후 저가 밀수품이 이웃 나라인 태국에서 대량 유입됐다. 여기에 2005년 미얀마 정부는 갑작스럽게 알 수 없는 제품 두께 규제 강화조치를 내린다. 두께 0.25㎜ 이하의 강판은 생산할 수 없다는 규제였다. 겉으로는 '두께가 너무 얇으면 녹이 많이 슨다'는 것이었지만, 이는 미얀마 현장 관료도 이해할 수 없었던 최고 권력층의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결국 2005년 6월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휴업에 들어갔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또다시 (귀국하는) 짐을 싸야 할 판이었다. 일본 경쟁 업체인 미쓰이도 떠났다. 본사에서는 '법인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현금 100만 불을 확보하고 공장을 연말까지 팔고 들어오라고 했다. 미얀마 정부는 '가고 싶으면 몸만 가라'고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공장 문을 닫았다. 직원들 115명(전체 직원의 90%)을 내보냈는데, 해고를 당하면서도 '그동안 감사했다'고 눈물을 흘렸다. 난 '나중에 공장 문을 열면 다시 채용하겠다'고 약속했다.

미얀마 정부 관계자를 만나 '태국산 밀수품이 실업자를 만든다' '난 떠나면 되지만 일하지 못하는 니네 국민들은 뭐냐, 공장을 다시 돌리고 싶다'고 센서티브하게 설득했다. 결국 공장을 멈춘 지 1년 만에 규제는 해제됐다. 하지만 한국 공장에서는 '귀찮다, 더 이상 미얀마는 비전 없다, 돌아오라'고 했다. 내가 어떻게 그들을 설득해서 규제를 풀었는데...

본사에서 현지 상황도 모른 채 '2800만 불에 공장을 팔고 와라'고 했다. 이에 난 '지금은 엄동설한이다, 지금 (미얀마를) 떠나면 나중에 못 들어온다, 2년 안에 반드시 정상화시키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회장(당시 이구택 회장)에게 직접 보냈다. 그 전에 이런 내용의 편지를 상무와 전무에게도 보냈다. 편지를 쓰고 또 썼다.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진정성을 표현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김 법인장은 본사의 철수 명령도 철회시키고 잔류 승인을 받아냈다. 부장급 직원이 '감히' 그룹 회장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건의해 설득한 드문 일이었다. 결국 이런 노력 끝에 공장을 멈춘 지 1년 만인 2006년 6월 미얀마 정부가 불합리한 규제를 풀게 된다. 하지만 본사에서 철강 원재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 직접 인도나 필리핀 등지로 원재료를 구하려 다녔다. 그런 뒤 2년 뒤인 2007년 3월 공장을 재가동했고, 이때 내보냈던 직원들을 다시 채용하는 약속을 지켰다.

김 법인장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함석을 찍어내는 기계가 다시 돌아갈 때 다들 눈물을 흘렸다"면서 "1년 반 만에 고요한 침묵 속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는 마치 죽었던 심장이 다시 뛰는 소리 같았다, 지금도 기계 소리는 내 심장이 뛰는 소리와 같다"고 말했다.

패러다임을 바꾸다... 단순한 함석지붕을 파는 기업이 아니다

지난 6월 21일 오후 비가 조금씩 내리는 미얀마 양곤에서 가장 큰 인야 호수의 풍경.
 지난 6월 21일 오후 비가 조금씩 내리는 미얀마 양곤에서 가장 큰 인야 호수의 풍경.
ⓒ 유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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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양곤 시내에 있는 한 러펫예 찻집. 이곳 역시 함석지붕으로 돼 있으며, 마침 내리는 빗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
 미얀마 양곤 시내에 있는 한 러펫예 찻집. 이곳 역시 함석지붕으로 돼 있으며, 마침 내리는 빗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
ⓒ 유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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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동안의 조업 중단과 휴업이란 난관을 이겨낼 수 있었던 데에는 김 법인장의 물러서지 않는 강인한 집념과 진심이 통했기 때문이다. 난관을 다 극복했나 했더니, 미얀마 정부가 2007년 9월 유류가격을 올리는 조치를 취했다.

"2000년 초부터 유지된 유류가격(1리터당 50원)을 갑자기 5~6배나 올렸다. 현실화한 것은 맞으나 월급이 싼 노동자들에게는 당장 교통비 부담으로 돌아왔다. 결국 시가지에서 데모가 일어났다. 1천여 명의 시민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그 이후 미얀마 경제는 더 어려워졌다. 나에게는 공장을 돌린 지 6개월 만에 또 어려움이 닥쳤다. '하늘이 날 돕지 않은 모양'이라고 한탄했다. 아내 왈 '당신은 1년마다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냐'고 했다.

결국, 그동안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배운 것은 어려울 때 대비하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광고하기로 했다. 우리 함석지붕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하자고 했다. 또 다르게 만들어보자고 했고, 은백색 합금(아연)을 집어넣어 회색이 아닌 은백색 함석지붕을 만들었다. 그리고 '슈퍼스타'란 브랜드를 붙였다. 미얀마포스코 TV 광고를 했다. 미얀마에서 가장 유명한 슈퍼스타를 써서!"

일본기업이 장악했던 함석지붕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6년간 자본금의 5배에 달하는 순이익을 창출하게 된 미얀마포스코의 성공신화에는 TV 광고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김 법인장은 2007년 11월 첫 공중파방송에 내보냈을 때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미얀마 양곤 시내에 있는 함석지붕을 올린 주택의 모습.
 미얀마 양곤 시내에 있는 함석지붕을 올린 주택의 모습.
ⓒ 유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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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의 콘셉트는 고급화 전략 및 '효(孝)'심 전략이었다. '슈퍼스타를 쓰면 이웃이 부러워하고 주택의 격이 높아진다'는 고급 이미지와 우리나라와 정서적으로 비슷한 미얀마 국민의 정서를 자극한 것. 미얀마 최고 인기스타를 써서 '며느리가 시골에 있는 시부모님을 위해 몰래 모은 돈으로 마련한 슈퍼스타를 수레에 싣고 간다'는 내용이며, 국내 보일러 업체의 광고를 패러디한 "여보, 아버님댁에 포스코 슈퍼스타 함석지붕 놔드려야겠어요"란 카피를 담은 CF를 만들었다. 전략이 적중했고, 광고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광고에 힘입어 공장 재가동 후 2011년까지 5년 연속 실적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2011년에는 매출액 2773만4000달러(약 310억 원)에 순이익 531만1000달러(약 59억 원)라는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게 된다.

"미얀마에서 포스코는 철강기업보다 건축자재 업체에 가깝다, 그래서 단순한 제품 홍보만 한 게 아니었다. 효도, 명품마케팅, 사회공헌성 공익광고까지. 미얀마인들의 정서를 공략했다. 광고로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었다. 효과는 대박이었다. 광고를 시작한 지 두세 달 만에 시장점유율이 30~60% 상승했다. 3개월 만에 전세가 역전됐다. 일본 제품보다 5~20% 높은 가격에도 물량이 부족해서 못 파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지방에서 도매업자들이 물건을 먼저 받기 위해 양곤 공장으로 달려와 공장 앞에 진을 치고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6년 동안 광고를 46편 만들었다. 공익광고 개념이 없는 미얀마에 최초로 TV 공익광고를 한 것이 우리였다. 이제 미얀마에서 포스코를 모르는 일반 서민은 없을 거다."

이 같은 성공은 2008년 하반기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경제위기 상황에도 미얀마포스코가 흔들림 없이 꾸준히 성장하는 원동력이 됐다. 한국 본사가 처한 어려움을 돕기까지 했다.

김 법인장은 광고만 히트 친 게 아니었다. 미얀마에 학교와 도서관, 경로당을 세웠다. 태풍 피해를 입었을 때 수재성금을 쾌척하기도 했다. 특히 미얀마포스코는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과 20%에 달하는 순이익을 기록했고, 미얀마 기업 중 납세순위 17위의 성적표를 받았다. 외국인 투자 제조업 중 납세순위 1위였다. 때문에 세금을 가장 잘 내는 우수 모범기업 사례이자 외국인 투자 모범사례로 꼽히기도 했다. 이제는 미얀마인들에게 '현지기업'처럼 대우받고 있다.

멈추지 않는 도전, 포기하지 않는 정신, 그리고 진정성

김창규 미얀마포스코 법인장.
 김창규 미얀마포스코 법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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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발주자였던 미얀마포스코가 지금은 시장점유율과 가격 모두 함석시장 1위를 달리고 있다. 이는 미얀마포스코의 한국 파견 직원 3명과 현지인 고용 직원 140여 명이 한 몸이 되어 이룩한 성과다. 물론, 그 중심에는 김창규 법인장이 서 있다.

"현재 직원들 월급은 평균 270불을 준다. 일선 미얀마 공기업의 2배를 더 주는 거다. 내 원칙이 일을 시키려거든 배를 든든히 채워야 한다는 거다. 많이 번만큼 많이 줘야 한다."

포스코 해외법인 및 법인장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한 김 법인장의 성공에는 포기하지 않는 정신과 신뢰를 주는 진심(眞心) 마케팅 전략이 주효했다. 오랜 기간 김 법인장이 구축한 네트워크와 신뢰는 최근 제2차 미얀마 붐을 맞아 큰 자산이 됐다. 넓게는 한국과 다른 한국 기업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 형성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고 있다.

최근 미얀마포스코가 지난 2011년 기록적인 매출과 이익(매출액 2773만4000달러, 순이익 531만1000달러)을 실현한 이후 지난해 순이익이 228만 달러로 급감한 것과 수입 사유화로 함석지붕 가격의 격차가 줄어들면서 시장 1위 자리에서 위협을 받고 있다. 이에 김 법인장은 '컬러강판' 생산라인을 준비 중이다. 미얀마포스코는 현재 미얀마 정부의 승인 절차가 진행 중이며, 내년에 컬러강판 생산라인이 완공되면 함석지붕 시장에서 점유율을 더욱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편, 앞서 고성민 코트라(KOTRA) 양곤무역관 차장이 '미얀마 공략법'으로 "정공법을 택하라"고 조언했는데, 김 법인장이 들려준 미얀마에서 보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미얀마 진출을 준비하는 기업인들에게 좋은 벤치마킹 성공사례로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끝으로 김 법인장이 남긴 한 마디를 전한다.

"경제에서 독주는 없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도전해야 한다!"

6월 22일 아침 하늘에서 본 미얀마 양곤의 모습.
 6월 22일 아침 하늘에서 본 미얀마 양곤의 모습.
ⓒ 유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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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미얀마, #블루오션 미얀마, #김창규, #미얀마포스코,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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