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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술을 마신 해가 1974년. 고교 졸업식을 마치고 친구 몇 명과 몰려간 학교 앞 중국집에서 짜장면 곱빼기를 안주 삼아 들이켠 배갈 몇 병이 내 음주의 시작이었다. 소주나 막걸리가 아니라 시쳇말로 아주 센 놈으로 시작한 첫 음주의 결과는 매우 처참했으나, 험한 세상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통과의례쯤으로 여겨주신 외할머니의 꿀물로 쓰린 속을 달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올해로 음주 역사 40년. 참 오래 마셔왔구나 싶기도 하다. 사람 나이 마흔이면 불혹의 연륜을 쌓는다던가. 하지만 나는 술과 맛있는 음식과, 그 자리를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한 유혹을 여전히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

젊은 날 직장 생활과 작은 사업 등을 하며 겪은 굴곡지고 부침이 심한 삶의 이력 속에서 술은 도피처이자 휴식의 도구로만 유용했다. 그러나 이후 어쩌다 시작하게 된 여행업 탓이었을까, 내 전화기에 저장되는 음식점과 술집의 전화번호가 하나둘씩 쌓여가며 사업에도 없어선 안 될 필수 정보가 됐다.

게다가 문단 말석에 이름을 내건 이후, 제주를 찾는 동료 선후배 작가들의 맛집 문의 전화가 심심치 않게 걸려오다 보니 단순히 '어느 식당 음식이 맛있다'라는 차원을 벗어나 발품을 팔아서라도 구체적인 내용으로 업데이트가 필요한 지경에 이르렀다.

소문만 믿고 소개해줬다가 낭패를 본 경험이 있고 나선 한 번이라도 직접 들러보지 않은 식당이나 맛보지 않은 음식은 가급적 리스트에서 삭제한다는 원칙을 세웠고, 덕분에 주변의 지인들에게서 가끔 '꽤 까다로운 미식가'라는 얘기를 듣는다.

각설하고, 이런저런 까닭에 단골집을 딱 하나 골라내기가 쉽지 않다. 아시다시피 제주도는 육해공의 신선한 음식 재료를 이용한 독특하고 풍미 넘치는 음식들이 섬의 곳곳에 산재한 맛의 고장. 이를테면 웬만한 식당에 가도 기본은 하기 때문이다. 내가 즐겨 찾는 맛집, 술집들은 음식의 질도 질이려니와 성의를 다해 손님을 맞는지의 여부, 특히 주인장의 친절도 수준에 따라 선택된 곳이 많다.

술 한잔의 풍미를 더해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신제주에 위치한 주점 '달아 놀자'입니다.
 신제주에 위치한 주점 '달아 놀자'입니다.
ⓒ 이종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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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과 가까운 신제주 한라오피스텔 뒤편에 자리한 작은 술집 '달아 놀자'는 그런 의미에서 내 단골집 목록의 첫 줄에 올라 있는 곳이다. 낡은 탁자가 놓인 작은 방 하나에 테이블 여섯이 놓인 이 공간은 술과 소박한 안주보다 거기 모여드는 사람의 맛과 느낌이 훨씬 더 좋은 장소다. 게다가 술꾼들의 감성을 충분히 자극하고도 남는 '달아 놀자'라는 이름 못지않게 명랑 쾌활한 기분파 주인장인 정자누이의 변함없는 환대는 술 한잔의 풍미를 더해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달아 놀자'를 다녀갔거나, 출근부에 도장 찍듯 제 집처럼 드나드는 인물군들의 면모는 다채롭고 화려하기까지 하다. 고은, 현기영, 황석영 선생 등 문단의 대표적 어른들도 굵은 발자국을 하나씩 찍었고 시인 안도현, 소설가 한창훈 등 명성이 자자한 애주가들 역시 이곳을 그냥 지나치진 못했다.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 영화, 음악 등 여러 예술 장르에 이름 석 자를 내건 꾼들도 무시로 드나드는데, 여기에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변호사, 교수들까지 포함되고 나면 함성호 시인의 말을 빌려 '제주의 학림 같은 공간'이 되는 동시에, 시시때때로 단순히 막걸리 잔을 나누는 술집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적 현안에 대한 의견이 교환되는 토론장으로 분위기가 바뀌기도 한다.

강정마을 활동가와 부장검사가 한자리에

신제주 주점 '달아 놀자'의 내부 풍경입니다.
 신제주 주점 '달아 놀자'의 내부 풍경입니다.
ⓒ 이종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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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권선희 시인이 보내준 1등급 과메기를 핑계 삼아 동료 작가들에게 늦은 아홉 시 번개 소집을 알리는 단체 문자를 날린 날 밤 풍경. 네 그룹이 이미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던 바, 그중 한 그룹은 강정마을 평화활동가들이었고 또 다른 한 그룹은 강정마을 주민들의 변론을 도맡으며 힘을 보태고 있는 강 변호사 일행들이었는데, 그와 대학 동기라는 제주지검의 부장검사도 불그레한 얼굴로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묘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강 변호사의 요청에 의해 그 자리에 합석했다가 부장검사와 나눈 인사 겸 대화 몇 마디.

"제주작가회의에서 시를 쓰는 이 아무개라고 합니다."
"작가회의요? 아 그 골치 아픈 단체?"
"골치 아프다니요. 글쟁이들이 무슨 힘이 있어서 부장검사님의 골치를 아프게 할까요?"
"아, 요번에 4.3 북 콘서트도 하시고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4.3 북 콘서트가 왜 골치 아픈 행사입니까? 4.3의 역사와 진실을 알리기 위해 꾸준히 해오고 있는 행사일 뿐인데요."
"아 그 얘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한 잔 받으시지요."
"부장검사님께서 겨우 그 정도 사안으로 골치가 아프면 되겠습니까. 암튼 제 술도 한 잔 받으시지요."

그렇게 상황은 종료됐고, 나는 우리 일행의 자리로 돌아가 조금씩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달아 놀자'는 단순히 술을 마시기 위해서만 찾는 곳은 아닌 듯싶다. 술보다,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웃음과 체취가 더 매력적인 공간. 일상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기꺼이 무장해제를 당해도 좋은 공간. 알 수 없는 그 해방감이 좋아 즐겨 찾는 내 단골집, '달과 술 마시며 노는 주점'이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이종형 님은 제주 출생의 시인으로, 제주문학의집 사무국장으로 계십니다.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며 2004년 <제주작가>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 이 기사는 <삶이 보이는 창>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삶이 보이는 창, #삶창, #오매불망 나의 단골집, #신제주 달아 놀자, #이종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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