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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 군락지를 한 바퀴 돌며 성찰의 시간을 가져

범어사 등나무 군락지
 범어사 등나무 군락지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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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오전 6시에 아침공양을 한다. 국을 제외하고는 저녁공양과 별 차이가 없다. 산사의 아침공기가 참 좋다. 원래 우리의 계획은 오전 7시부터 10시까지 금정산성을 답사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무리라고 생각한 묘중스님이 계획의 변경을 권한다. 금정산 정상의 해발이 800m나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 안의 문화유산을 자세히 살펴보고 가까운 곳의 암자를 순례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한다.

먼저 스님과 함께 일주문을 지나 등나무 군락지 관찰로를 한 바퀴 돈다. 등나무 군락지는 범어사 앞 계곡에 있다. 계곡의 큰 바위 틈에서 자란 약 6500 그루의 등나무가 소나무, 팽나무 등의 큰 나무를 감고 올라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마침 등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해 보랏빛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등나무가 무리지어 사는 이 계곡을 사람들은 등운곡(藤雲谷)이라 부른다. 등나무 군락은 금정산의 절경일 뿐 아니라 생물학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등나무 군락지 관찰로
 등나무 군락지 관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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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 군락지 관찰로에는 네 개의 쉼터가 있다. 몸과 마음이 쉬는 터(休), 아름다움을 느끼는 터(美), 자아성찰의 터(心), 진정한 깨달음의 터(禪). 이 길은 825m로, 한 바퀴 도는데 30분 정도 걸린다. 우리는 휴미심선의 차례로 돌기로 한다. 초입에 두 기의 석종형 부도가 나타난다. 그러자 조준형 고문이 묘중스님에게 부도가 더 없느냐고 물어본다. 묘중스님은 길을 잠시 벗어나 우리를 부도전으로 안내한다.

범어사 출신 스님 중 의미 있는 분들의 부도가 이곳에 모여 있다고 한다. 부도전에 가보니 약 20기 정도의 부도가 있다. 모두 석종형 부도다. 대부분 조선시대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부도탑과 탑비가 함께 서 있는 것이 있어 살펴보니 남파당 채우 서상비(南坡堂 彩祐 瑞相碑)다. 그런데 채우 스님이 어떤 분인지 아무리 자료를 찾아도 나오지 않는다. 무언가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는 못한 분 같다.

편백나무숲 포행
 편백나무숲 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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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등나무 외에 삼나무와 편백나무도 자라고 있다. 이들 큰키나무는 대개 일본에서 잘 자라는 수종인데 최근 우리나라 남쪽지방에서 가로수와 자연휴양림을 조성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우리는 편백나무 숲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그늘이 좋고 피톤치드가 많이 나오는 데다 의자까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등나무 군락지를 한 바퀴 돈 우리는 이제 금정산과 범어사를 조망하기 위해 동쪽에 있는 계명암(鷄鳴菴)으로 향한다.

계명암과 청련암에서 느끼는 범어사의 다른 맛 

계명암은 이름 그대로 닭이 우는 암자다. 금정산의 동쪽 계명봉 자락에 있는 절로 해 뜨는 것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다. 그곳까지는 거리가 700~800m쯤 되고 가파른 계단을 계속해서 올라가야 한다. 중간에 나이 든 회원들이 포기를 한다. 나는 신록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뗀다. 15분쯤 올라가니 계명암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샘이 있다. 그곳에서 시원한 약수를 한 잔 마시고 주변을 살펴본다.

계명암에서 바라 본 부산
 계명암에서 바라 본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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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금정구와 회동저수지가 보이고, 가운데로 마안산 너머 수영만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아침나절의 부산은 차분하고 고즈넉하다. 오른쪽으로는 금정산 자락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산자락의 오른쪽 끝에 금정산 정상인 고당봉(801m)이 있다. 고당봉은 멀리서 보아도 암봉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금정산 자락 3부 능선쯤에는 범어사가 자리 잡고 있다. 범어사 왼쪽 아래로 등나무 군락이 분명하게 보인다.
  
계명암에 가니 보덕굴이 있다. 깎아지른 절벽에 법당을 짓고 관세음보살을 안치했다. 그리고 법당 기둥에 관음보살에게 바치는 기원을 적어놓았다. '서른모습응신보살 열네가지무외보살 네갈래의부사이덕 팔만사천삭가라수 팔만사천모다라비 팔만사천청정보목'. 상당히 낯선 문구다. 이것은 바닷가 외딴섬 보타낙가산의 도량교주인 해수관음에게 드리는 진언이다. 이를 좀 더 쉬운 말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계명암 보덕굴의 불단과 주련
 계명암 보덕굴의 불단과 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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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두 가지 몸으로 나투시고, 두려움 없애는 열네 가지 힘을 지니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네 가지 덕을 가지고 있으시네. 8만 4천의 금강머리, 8만 4천의 손과 팔, 8만 4천의 청정하고 보배로운 눈을 가지고 계시네."  

마지막으로 공양주는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에게 이 도량에 자비가 강림하기를 기원한다. 이런 큰 뜻을 알고 나니 계명암에 온 보람이 있다. 계명암에서 북쪽으로 다시 15분쯤 올라가면 계명봉에 오를 수 있고, 동쪽으로 15분을 가면 봉화대에 이를 수 있다. 계명암을 보고 내려가면서 나는 금정산과 범어사를 다시 한 번 조망해 본다. 내려가는 데는 10여분이면 족하다.

청련암 금동관음보살
 청련암 금동관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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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청련암으로 향한다. 지장도량이라고 하는데, 전각보다는 불상과 조각이 눈에 띈다. 초입에 금강역사가 양쪽에서 도량을 지키고 서 있다. 왼쪽에 있는 역사는 나라연금강, 오른쪽에 있는 역사는 밀적금강이다. 이들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방망이를 든 도깨비 둘이 양쪽을 지키고 있다. 그 위로는 해태 모양의 사자상과 용사자석등이 있다.  다시 그 위로 극락왕생을 축원하는 연등이 걸려 있고, 연등 아래에는 천녀들이 춤을 통해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이들 연등 위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보관을 쓴 금동관음보살이 한 가운데 좌정하고 있다. 관음보살 앞에는 지장보살이 명부로 간 중생들을 구제하고 있다. 그리고 관음보살 뒤로는 백의관음과 미륵보살이 반가의 자세로 앉아 있다. 이들 불상은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예술성이 뛰어난 편이다. 범어사 청련암에서는 현재 스님들이 선무도를 수련하고 있다.

대웅전과 삼층석탑의 문화유산적 가치

범어사 대웅전
 범어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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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련암을 나온 나는 범어사 중심법당인 대웅전으로 향한다. 현재의 대웅전은 1614년 묘전화상이 건립하고, 1713년(숙종 39) 흥보화상이 중수했다. 그리고 1824년(순조 24) 해민대사가 목조불상에 금을 입혔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평면은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특이한 가구식 기단으로 면석에 동백잎이 조각되어 있다. 기단의 동쪽 끝 면석에 강희 19년(1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기단의 축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대웅전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왼쪽에 미륵보살(미래불) 오른쪽에 갈라보살(과거불)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목조삼존불은 1661년(현종 2년) 희장(熙莊)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다. 원만구족한 상호와 적당한 비례와 균형이 불상에 예술성을 더했다. 희장의 작품은 하동 쌍계사, 구례 천은사, 청도 대운암 등에도 있다. 범어사 대웅전의 삼존불은 그의 완숙기 작품으로 예술성이 더 뛰어난 편이다.

대웅전 계단 소맷돌의 연꽃조각
 대웅전 계단 소맷돌의 연꽃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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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웅전의 불단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편이다. 불단 위의 닫집은 용과 봉황을 화려하게 조각해 천상세계를 표현했다. 천정도 보상화문과 연화문을 조각해 화려하게 만들었다. 후불벽화는 비천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조화를 이루었다. 대웅전에 오르는 계단 양옆 소맷돌에는 연꽃조각이 화려하다. 범어사 대웅전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이처럼 섬세하고 아담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범어사 3층석탑은 9세기 전반 통일신라 작품으로 추정된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있고, 그 위에 노반과 보주가 있다. 기단에 새겨진 안상 조각이 특이하며, 상층 기단 면석이 하층기단에 비해 상당히 크고 높다. 탑신부 1층 몸돌에 비해 2,3층 몸돌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안정감은 있으나 비례감은 떨어진다. 대웅전 아래 마당 오른쪽에 위치한다. 그리고 석등은 마당 왼쪽 심검당 앞에 있다. 석탑과 석등이 좌우로 나란히 배치된 것을 보면 원래의 위치에서 옮겨진 것 같다.

동산스님의 사리탑비를 보며

동산스님의 모습
 동산스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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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의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산스님을 알아야 한다. 동산스님은 범어사로 출가해서 범어사에서 입적한 진정한 범어사 스님이다. 동산스님은 1890년 충북 단양에서 출생했으며 이름은 하동규(河東奎)였다. 어릴 때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5세가 되어 보통학교에 들어가 신식교육을 받았다. 이때 만난 스승이 주시경 선생이다. 그리고 주시경 선생의 권유로 19세(1908년)에 서울의 중동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중동중학교를 졸업하고는 경성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하동규는 고모부인 위창 오세창 선생을 통해 용성선사를 만나게 된다. 용성스님은 의학을 공부하는 하동규에게, "인간의 병은 의술로 어느 정도 치료한다지만 마음의 병은 무엇으로 다스리겠소?"하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말문이 막힌 하동규 청년은 불교와 용성스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하동규는 용성스님으로부터 "불교는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종교이며, 마음이 만법의 근원이며 우주의 근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대산 상원사
 오대산 상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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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23세의 청년 하동규는 범어사로 출가해 동산(東山)이라는 법호와 혜일(慧日)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당시 동산스님의 은사는 용성선사였고 계사는 성월(惺月)화상이었다. 이후 동산스님은 용성선사와 한암선사를 통해 사교(四敎)와 선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오대산 상원사, 금강산 마하연, 속리산 복천암, 태백산 각화사, 함양 백운암, 황악산 직지사 등에서 용맹정진했다. 동산스님은 38세 되던 1927년 여름 범어사로 돌아와 금어선원(金魚禪院)에서 하안거를 시작했다. 스님은 7월 5일 대나무잎 소리를 듣고 갑자기 깨달음을 느껴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지었다.

그리고 그린 것이 그 몇 해던가                畵來畵去幾多年 
붓끝이 닿는 곳에 살아 있는 고양이로다.   筆頭落處活猫兒 
하루 종일 창 앞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   盡日窓前滿面睡
밤이 되면 예전처럼 늙은 쥐를 잡는다.      夜來依舊捉老鼠

용성스님은 동산스님의 깨달음을 인정했고, 1929년 범어사 조실이 되었다. 1937년에는 해인사 조실이 되었고, 홍류동 계곡에서 또 다시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1940년에는 은사스님인 용선대선사가 입적했고, 동산스님은 해인사와 범어사를 오가다 1945년 범어사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스님은 종단개혁에 앞장섰고, 6․25사변 때는 피난 온 승려들을 먹여 살리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 정화불사가 시작되어 비구승과 대처승간 큰 싸움이 벌어졌다. 1954년에는 전국 비구승 대표자대회가 열리고, 중앙종회가 열려 동산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했다. 1955년 8월 불교정화운동이 비구승의 승리로 끝나자 동산스님은 종정에서 물러나 범어사로 내려온다. 그 후 스님은 범어사 조실과 주지를 겸하고, 선원중심으로 사찰을 운영하고 납자 제접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동산대종사 사리탑비
 동산대종사 사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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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8월 동산스님은 다시 종정에 추대되었고, 1962년 4얼 비구와 대처 통합종단이 구성되자 종정을 사임하고 다시 범어사로 내려왔다. 1964년에는 일주문, 금강문, 보제루(普濟樓)를 중수하고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참배로를 정비하였다. 1965년 3월 스님은 금어선원에서 정진하다가 점심공양 후 제자들 앞에서 '방일(放逸)하지 말고 부디 정진(精進)에 힘쓰도록 하라'는 당부를 하고는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지었다. 그리고 저녁 6시 무렵 입적하였다. 동산스님의 탑과 탑비는 선원 동쪽 대나무숲에 세워졌다. 현재 일주문 옆 성보박물관 마당 끝에는 또한 동산대종사의 사리탑비가 있다.

원래 바꾼 적이 없는데           元來未曾轉 
어찌 두 번째 몸이 있겠는가.   豈有第二身 
삼만 육천 일을                     三萬六千朝
반복하는 건 오직 이놈뿐일세. 反覆只這漢 


태그:#범어사, #등나무 군락지, #계명암 , #대웅전과 삼층석탑, #동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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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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