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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저수지에서 바라본 한옥학교 전경.
 대동저수지에서 바라본 한옥학교 전경.
ⓒ 김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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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의 남산 중턱에 자리잡은 한옥학교. 공식 명칭은 한옥전통문화원. 입구엔 '韓屋學校' 편액을 단 일주문이 육중하게 서 있다. 지난번 사진에서 소개한 대로 이 학교의 초대교수였던 해운(海運) 김창희 대목장의 솜씨다. 일주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학교가 들어서기엔 꽤 가팔라 보이는 비탈에 여러 동의 한옥과 정자가 있고, 몇 개의 컨테이너도 여기저기 놓여 있다.

처음 짐을 부린 곳은 컨테이너 숙소. 8평 남짓한 넓이에 천장엔 세 개의 형광등과 빨랫줄이 걸렸고, 바닥엔 세로벽을 따라 길게 뻗은 허름한 나무 선반이 전부다. 다른 건 아무것도 없다. 1·2학년 기숙사인 왕척재(枉尺齋)가 아직 완공되지 않아 임시로 쓰는 숙소이다. 3학년은 붕도헌(鵬圖軒)이라는 ㅁ자 한옥 기숙사를 쓴다.

넓고 쾌적한 도시의 아파트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차갑고 휑한 컨테이너 박스에 몸을 눕히자니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이게 집인가? 이곳이 나의 거처란 말인가? 잠들기 전에 들른 세면장은 더 놀라웠다. 마치 잠수함을 연상케 하는 무거운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이건 실제 톤수가 제법 나가는 철선의 선실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낮은 천장엔 빠져나가지 못한 습기가 물방울이 되어 가득 맺힌 채 얼어붙었고, 검붉은 페인트로 두텁게 칠해진 벽이며 사선으로 처리된 선실 유리는 예전에 배에서 쓰던 그대로 사용 중이다. 오른쪽엔 세탁기와 탈수기가 두 대씩 놓였고, 왼쪽엔 샤워기와 수도꼭지가 줄줄이 달렸다.

바닥은 엉뚱하게도 콘크리트를 발라놓았는데, 시골 냇가에서 주워온 듯한 빨랫돌 다섯 개가 나란히 박혀 있다. 그나마 맨 안쪽의 빨랫돌은 윗부분이 다 깨져 나갔고 바로 그 옆돌은 절반이 뚝 잘려 나갔다.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을 닦아내며 물었다. 너는 정말 목수가 되어야 했나?

'잠수함'을 빼놓곤 한옥학교의 낭만 얘기하기 어렵다

양치질을 하다 말고 생각이 복잡해졌다. 산중턱에 걸린 빈 배 한 척. 푸른 바다에 떠 있어야 할 배가 엉뚱하게 이 산중턱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고 묶여 있단 말인가. 나 역시 잘못 든 길이 아닐까. 돛도 없고 닻도 없는 난파선을 탄 채 아득한 망망대해를 대책 없이 흘러가는 건 아닐까…. 선실 세면장의 우울한 메타포를 입에 물고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이것이 진정 내가 바라던 길이었는가?

사람이란 참 신기한 동물이다. 시간의 화장술 또한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사람은 새로운 환경을 재구성하면서 자기 몸과 정신을 거기에 맞춰 나간다. 여기에는 시간이 절대적인 도움을 준다. 아마도 컨테이너 숙소와 '잠수함'(여기서는 선실 세면장을 이렇게 부른다)을 빼고는 한옥학교의 추억과 낭만을 얘기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비 오는 날, 컨테이너에 벌러덩 드러누워 철제 천장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어보라. 처음에는 청승맞고 처연하게 들리다가 나중에는 맑고 경쾌한 천상의 화음으로 다가온다. 수천 명의 천사들이 두드리는 드럼 소리가 저럴까 싶은 것이다. 그 소리에 마음이 동해 텁텁한 막걸리에 묵은 김치라도 얹어보라. 취기가 오르면 맑은 빗소리는 천장을 뚫고 둥근 술잔 속으로 퐁당퐁당 뛰어내린다. 술잔이 넘친다.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빗소리를 마신다.

호마각 편액이 걸린 화목보일러와 오른쪽으로 철문이 열린 잠수함 세면장
 호마각 편액이 걸린 화목보일러와 오른쪽으로 철문이 열린 잠수함 세면장
ⓒ 김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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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연실색케 한 잠수함은 어떤가. 한옥학교에 철제 선실이라니, 이 기이한 부조화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헤겔의 말대로 보편자는 늘 예외자를 통해 자기를 드러내는 법이다. 예외자에게 없다면 그것은 보편이 아닐 테니까 말이다. 그런 면에서 잠수함은 내게 '바닥'의 은유로 읽혔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삶의 바닥. 이는 별칭과도 잘 어울렸다. 물론 이보다 궁상맞은 환경이 무수히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비쳤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나를 더 낮은 하심(下心)으로 데려갔다. 하심이란 나를 낮추는 것,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더 많은 우주만상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부러 그러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그리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이치는 대단히 놀라운 것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욕심을 줄이는 정도로 잘못 알고 있어서 안타깝다. 마음을 비우는 일과 욕심을 줄이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어쨌거나 잠수함의 '바닥'과 '하심'의 은유 체계는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세면장의 기능성과도 잘 어울려 보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 2시간 내내 불 장작불 지피기

잠수함을 얘기하면서 바로 옆에 붙은 화목(火木)보일러를 빼놓을 수 없다. 실습장에서 나온 자투리 나무를 때는 것인데, 잠수함의 온수는 여기서 나온다. 불당번이 있는 날이면 새벽 5시가 안 되어 일어나 2시간 정도 쉬지 않고 장작불을 지펴야 한다. 그래야 목표 온도 70도를 넘길 수 있다. 지금은 베테랑이 다 됐지만 처음엔 불을 못 피워 한겨울의 캄캄한 밤중에 뒷산에 가서 밑불로 쓸 마른 나무를 구해 오느라 고생도 하고, 온도를 못 올려서 일찍 일어난 선배들한테 군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렇지만 둘이서 하는 일이라 여럿이 있을 때 꺼내지 못했던 속마음도 터놓고, 후배들에게 불 피우는 법을 알려주며 당번을 물려줄 때는 이런저런 조언이나 팁을 곁들이기도 한다. 나중에는 불을 피우며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벌겋게 달아오른 장작불에 사정없이 집어던지는 재미까지 생겨났다. 쓸데없는 잡생각이 활활 타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겐 큰 공부가 되었다.

화목보일러의 불을 피운 사람이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사람들의 갖은 상념이 함께 타들어갔으니 잠수함의 온수가 그냥 따뜻한 물일 리가 없다. 그 물로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몸을 씻고 빨래를 하는 일이 그저 예사롭지만은 않은 것이다. 내 욕심 같아서는 새 기숙사가 다 지어지더라도 잠수함은 그대로 남겨두었으면 좋겠다. 이 학교를 거쳐갈 나중의 사람들에게도 좋은 공부가 될 터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낯선 곳에 몸이 적응해가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다. 당황스러움은 익숙함으로 바뀌고, 불편함은 새로운 가르침으로 나를 이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아찔한 낙차를 어찌 견뎌낼 것인가. 한옥학교에 입학한 뒤에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어떠냐고, 지낼 만하냐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시설은 두 배쯤 안 좋은데, 교육은 세 배쯤 좋더라. 왜 좀 더 빨리 오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새움출판사 블로그에 <시인이 쓰는 목수일기>로 연재했던 것을 새롭게 다듬어 게재하는 것입니다.



태그:#청도 한옥학교, #김점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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