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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끝난 뒤 텅 비어버린 고교 3학년 교실. (자료사진)
 수능이 끝난 뒤 텅 비어버린 고교 3학년 교실. (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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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방식을 바꾸려다 혼쭐이 났다. 기존의 강의식 수업에서 탈피해 아예 토론식으로 강의를 진행해볼 참이었는데, 채 한 달도 못 가서 몇몇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반발에 밀려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들의 주장은 솔직히 예상하지 못한 것이어서,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취지나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계획 단계에서 치밀하지 못했던 탓이다.

이미 완결된 연간 교육계획서의 교과 내용 부분을 결국 수정했고,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가정통신문을 보내야만 했다. 그런데, '일리 있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려니 토론식 수업은 아이들의 수업 참여를 끌어내겠다는 취지와는 상관없이 껍데기만 남을 수밖에 없어 존폐의 기로에 섰다.

'기타 과목' 교사의 도전

굳이 고등학교에서 토론식 수업이라는 낯선 '모험'을 감행한 건, 지난 몇년 동안 켜켜이 쌓인 수업 스트레스 때문이다. 해가 갈수록 수업하기 힘들다는 건, 교사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특히 요 몇해 동안은 수업시간에 아이들 만나는 것 자체가 꺼려질 정도였다. 수능 과목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부를 아예 접은 아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교과서는 표지가 찢긴 채 교실 바닥을 뒹굴고 심지어 폐지함에 버려지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나마 내신을 신경써야 하지 않겠느냐며 채근해보지만, 수능 준비에다 학습 부담 운운하며 국영수 공부하기도 버겁다고 하소연하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요구를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많은 학교에서 문과는 문과대로, 이과는 이과대로 수능 과목 위주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건 그래서다. 좋게 말해서 입시 준비를 위한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인데, 이른바 '기타 과목' 교사로서 자괴감이 든다.

수능에 교육과정이 철저히 종속된 터라 '동기 부여'가 안 되니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 리 만무하다. 좋다는 교육 기자재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활용해보고 시답잖은 유머까지 총동원해 봐도 대놓고 엎드려 자는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기란 쉽지 않았다. 고백하건대, 그 큰 교실에서 맨 앞자리 그나마 과목에 관심을 보이는 몇 명만을 앉혀두고 수업을 이끌어갈 수밖에 없었다. 목이 터져라 '자장가'를 부르며 지난 몇해를 그렇게 보냈다.

그렇다고 교사로서 제도와 아이들만 탓한 채 허송세월할 수는 없지 않나. 지난 겨울방학 여기저기 연수를 다녔고, 모 방송사의 수업 개선 프로그램도 몰아서 인터넷으로 다 봤다. 그런가 하면 수업 준비에 도움이 됐다고 추천하는 책은 게걸스럽게 읽었다. 그렇게 해서 준비되고 시도된 것이 바로 모둠별 토론 수업 방식이었다.

겨울방학 동안 인접 교과 교사들의 자문을 받아, 교과와 관련지어 찬반이 명확히 갈리는 쟁점 주제를 선정했다. 한편, 개강 전에 학급별로 지난해 개인별 성적을 감안하여 지그재그식으로 4인 1조로 모둠을 편성했다. 수업 1주일 전, 지정된 주제를 공지하고 대결할 모둠과 찬반을 추첨을 통해 정하도록 했다.

적어도 인문계 고등학교 재학생 수준이라면 큰 어려움 없이 운영의 묘를 살려 진행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어쨌든 모둠별 토론에 참여시키면, 수업시간 대놓고 엎드려 자는 아이들만큼은 시나브로 사라지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미동도 없이 눈만 멀뚱멀뚱 뜬 채 강의만 듣는 '모범생'에게는 활력을 주고, 나아가 잘만 되면 협동 학습이 가능하게 돼 삭막한 교실 분위기 쇄신에도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언감생심, 기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16년 차 교사라는 경력이 무색하게도 '순진한' 바람일 뿐이었다. 우선, 학급마다 예외 없이 모둠별 토론이 아닌, '일대일' 토론이 되고 말았다. 준비 단계에서부터 수업시간 토론이 진행될 때까지 모둠별 협동은 생각한 만큼 잘 이뤄지지 않았다. 모둠 안에서 아예 토론에 관심조차 없다는 듯 자기 순서가 와도 연신 고개만 숙이고 있는 아이들이 많아 흐름이 끊어지기 일쑤였다.

어느 학급, 어느 모둠이든, 치열하게 침 튀겨가며 상대측과 논쟁을 벌이는 아이와, 의자에 나란히 앉아 멍한 표정으로 빨리 수업이 끝나기만 바라는 아이가 '공존'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한 모둠이라는 이유로 동일한 점수를 받을 수 있었고, 급기야 이러한 평가 기준 때문에 사달이 났다. 일과 중엔 아이들로부터, 퇴근 후엔 그들의 부모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아이들과 부모의 '항의'... 나는 '무임승차'를 방조했나?

"지난 일주일 동안 꼼꼼하게 자료를 챙겼고 최선을 다해 토론에 임했는데 아깝게 져서 솔직히 많이 아쉬워요. 그러나 상대측이 더 잘했다는 다른 아이들과 선생님의 판단엔 기꺼이 승복할 수 있어요. 그런데,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토론에서 이긴 모둠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점수를 받아가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제 아이가 집에 돌아와 내내 속상하다며 울먹이더군요.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꼭 부모여서가 아니라,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토론에 기여한 만큼 점수를 받아야지, 그저 한 모둠이라는 이유로 동일한 점수를 주는 건 재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무임승차'를 방조하는 셈이니까요."

점수에 특히 민감한 아이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모둠별 점수 부여 방식에 대해서까지 문제 삼을 것이란 생각은 사실 못했다. 자기들끼리 역할을 나눠 자료 준비를 하고 사전 연습해보는 과정이 있을 테니, 토론에서 이기든 지든 모둠별로 동일한 점수를 받는 것에 대해서 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다.

몇몇 아이와 학부모들에게 있은 후,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각 학급을 대표하는 학생들 십여 명을 따로 불러 의견을 물었다. 수업 시간에 직접 항의를 하지 않았을 뿐, 그들의 입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아가 내신과 수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라는 현실에서 토론 수업은 시기상조라는 주장도 내놓았다.

"선생님, 어떻게 수업을 해도 공부 안 하는 애는 안 해요. 수업 중에도 잠자거나 딴청 피우는 아이들이 태반인데, 걔네들이 미리 자료를 준비하고 말하기 연습을 병행해야 하는 토론 수업에 참여하려 하겠어요? 우리에게 토론 수업은 아직 일러요."

"저는 강의식보다 토론식 수업이 좋아요. 논술 준비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열심히 해보려는 아이들끼리 모둠을 짜 진짜 토론 수업을 진행해보면 어떨까요? 어차피 공부 안 하는 얘들은 강의를 하든, 토론을 하든 관심 없기는 마찬가지니까요."

일주일 간 자주 만나 함께 토론 준비를 해나가다 보면 서로 친해지고, 수업 참여도 또한 높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애초 무망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었고, 한 교실 내에서도 친한 친구 한두 명을 빼곤 어느새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그런 존재인 것처럼 보였다.

강의식 수업이 그랬듯, 토론식 수업 역시 공부 잘 하는 몇몇 아이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들은 지필 시험도 잘 봤고, 수업 태도도 바랐으며, 토론 역시 능했다. 기실 그들은 늘 교실의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에 집중했던 '몇 명'이었다. 흥미 잃고 잠자는 아이들을 깨우려했던 '실험'은 그들에게 뭘 해도 잔다는 '면역력'만 키워준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자존감 낮아진 아이들... 어떻게 해야 할까

요즘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은 체육 시간 어떤 운동이든 곧잘 한다. 예전엔 공부 재능이 있는 아이는 하나같이 운동엔 젬병이었다. 영화에서도 공부 잘 하는 아이는 꼭 뿔테 안경 차림에 소심한 캐릭터로 그려졌다. 되레 운동 잘 하는 아이가 훤칠하고 의협심이 강한 주인공으로 그려진 것처럼. 공부와 나머지 온갖 능력은 언제부턴가 정확히 정비례하게 됐다.

'모든 재능을 다 갖춘' 그들에겐, 딱 한 가지, 다른 아이들과 협동하여 역할을 나누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능력이 부족했다. 애초 그럴 의지가 없었다. 같은 학교, 같은 학급에 배정되긴 했지만, 굳이 '무능한' 아이들과 어울릴 이유가 없지 않느냐며 그들은 철저히 '따로 놀았다.' 그들은 공부 못 하는 아이들과 함께 토론 수업 준비 하는 걸 '시간 낭비'라고 여겼다.

그들에게 무시당하는 아이들 역시 그걸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는 눈치다. "진 모둠의 '리더'보다 이긴 모둠의 '찌질이'가 높은 점수를 받는 건 부당하다"는, 듣기에 따라서는 자못 불쾌한 말을 듣고도 무표정한 반응을 보였다. 다들 어차피 학교는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니냐며 체념했다. 낮은 자존감은 그들을 철저히 위축시켜버렸다.

학교마다 이른바 '수준별 수업'이 한창이다. 말이 좋아 '수월성 교육'이지, 아이들을 성적에 따라 분반하고 개별적으로 무한 경쟁시켜 학업성취도를 높이는 방식이다. 애초 아이들끼리의 협력이 불가능한 시스템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모둠별 토론식 수업을 한답시고 설쳐댔으니 '돈키호테'라는 조롱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무한 경쟁에 내몰리다보니 학교에서 수준별 수업이 창안된 것인지, 수준별 수업이 도입되다보니 아이들이 무한 경쟁에 익숙해진 것인지 헛갈릴 지경이 됐다. 그 와중에 도태돼 자존감을 잃어버린 수많은 아이들은 학교의 '잉여'가 됐다. 학교도, 학부모도, 심지어 아이들 자신도 그것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부가 고등학교조차 쇠고기 등급 나누듯 서열화해버렸는데, 학교 내라고 별 수 있겠어. 그저 아이들 앞에서 대놓고 부추기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자네가 시도한 모둠별 토론 수업도 아이들 간 위화감이 적고, 최소한 친구의 공부를 도우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가능한 거야. 말도 섞지 않으려는 얘들이 교실 내에 부지기순데 지나친 욕심이지."

한 선배 교사의 이 말은, 의욕적으로 준비했던 토론식 수업을 접어야 하는 내게 그다지 위로가 되질 못했다.


태그:#토론식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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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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