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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잃고 재산을 강탈당하고 최소한의 자유마저 빼앗겼던 피해자들이 여전히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때에도 독재자가 남긴 가족과 자식들은 아버지가 범죄로 거둔 거대한 유산을 이어받아 호의호식하고 있다. 심지어 스스로 아버지 영혼의 대리자임을 자처하며 정계에 진출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겠노라 나서기도 했다. 정치적 과는 비판해도 '독재자의 (경제적)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견 순수하고 합리적인 듯하지만, 대부분 독재의 부활과 죽은 권력의 복권, 부정으로 쌓은 부의 영구적 소유 의도와 결부돼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넘어 공포스럽다.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의란 무엇인가' 말이다. - <독재자의 자식들>에서

<독재자의 자식들>(북오션 펴냄)은 부모의 잘못된 삶 때문에, 그것도 만방(세계)에 독재자란 악명을 떨친 아버지 때문에 평생 '누구의 아들'  혹은 '누구의 딸'이란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만 했던 자식들과, 그런 부모가 키웠기 때문에 일그러진 삶을 살아야만 했던 어떤 자식들의 드라마틱한 삶을 추적한 책이다.

어떤 이유 때문에 의도적으로 버려졌거나, 태어난 줄 모르고 버려진 '씨'가 아니라면 독재자들의 자식들은 대개 당대의 최고 혜택들을 누리며 성장하게 된다. 20세기를 통틀어 세계 최고 악당 자리를 놓고 아돌프 히틀러(1889. 4. 20~1945. 4.30)와 다퉜던 조제프 스탈린(1878.12.18~1953. 3. 5)의 딸 스베틀라나도 그중 하나.

<독재자의 자식들> 겉표지
 <독재자의 자식들> 겉표지
ⓒ 북오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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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부인 나제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를 스탈린은 '작은 참새' 혹은 '귀여운 참새'라고 부르면 엄청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증언에 의하면 스탈린은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소로 보내고 처형 허가서에 서명하는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의 작은 보스는 어디에 있나?'라 외치며 스베틀라나부터 찾을 정도로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당시 소련의 평범한 아이들은 노동과 배고픔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모르는 세계였다. 게다가 인기도 매우 높았다. '스베틀라나'라는 이름까지 딴 향수까지 만들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잘나서가 아니었다. 권력의 중심에 있는 스탈린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는 스탈린의 성격을 닮아 고집도 세고 매우 독선적이었다고 한다.

여하간 세상물정이라곤 모르는 철부지 소녀 스베틀라나가 아버지를 최고의 존재로 알고 자랐음은 당연했다. 이런 그녀가 아버지의 도덕성을 의심하고, 스탈린의 딸이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한 것은 16세 때. 6살 때(1932년) 단순 복막염으로 죽은 것으로 알고 있던 어머니가 실은 권총 자살을 했다는 런던 발 방송을 우연히 보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때부터 스탈린의 외동딸 스베틀라나의 삶은 심하게 흔들리고 비틀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강제 수용과 처형이 일상인 독재자 아버지에게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의 권력에 정치적으로 맞선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할 수 있는 것이란 자신의 삶을 내던져버림으로써 자신을 분신처럼 여기는 아버지를 괴롭게 하는 것뿐이었다.

아직 어린 그녀는 결혼한 지 22년이나 되는 나이 많은 유대인 감독과 사랑에 빠진다. 스탈린이 노발대발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스탈린이 그 남자를 투옥해버리는 것으로 깨지고 만다. 그러자 스베틀라나는 다시 유대인 남성을 결혼 상대자로 선택함으로써 아버지에게 저항한다. 결국 이 결혼도 금방 깨지고 말지만.

이후 그녀는 아버지가 점찍어주는 스탈린 측근의 촉망받는 아들과 결혼한다. 그리하여 아이를 둘이나 낳는다. 그러나 얼마 못가 파경에 이르는데, 훗날 서방세계로 망명할 때 원하지 않은 이 결혼으로 낳은 아이들까지 버리고 만다. 비록 자식일지라도 아버지와 연결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끊는 것으로 스탈린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당신은 당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나의 어머니가 목수와 결혼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스베틀라나)

평생 이처럼 한탄하곤 했다는 스베틀라나는 몇 번 더 진정한 사랑과 안정된 가정을 꿈꾼다. 그러나 스탈린의 딸이라는 사실은 진실한 사랑이 스며들 조금의 틈조차 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결국 그녀는 이 종교 저 종교를 떠돌다가, 결국에는 감정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해 10여 년간 요양소를 전전하다가 85세로 불행한 삶을 마친다. 2011년 11월 미국에서.

우리는 스탈린의 '아이들'에게, 그리고 아버지를 부정하려 했던 절대 권력자의 자식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 아버지에 의해 짓눌리고 파괴된 영혼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했던 그들의 발버둥 때문이다.

우리는 독재자와 학살자의 아들과 딸이 아버지를 옹호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혹은, 너무도 뻔뻔스럽게 절대 권력자였던 아버지를 변호하고 미화하며, 심지어는 권력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인권탄압과 학살에 앞장섰던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야코프(기자 주:스탈린의 장남으로 포로수용소에서 철책선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것으로 아버지에게 저항)와 스베틀라나를 동정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 <독재자의 자식들>에서

모정까지 던져버린 그녀가 독재자 아버지에 대한, 스탈린의 딸임을 거부하는 모습은 끈질기고 한편으론 눈물겹다. 스탈린의 사망(1953년)을 기다렸다는 듯, 스탈린이 죽자마자 아버지의 성을 버린 그녀는, 서방으로 망명해 두 권의 자서전(<한 친구에게 보내는 20통의 편지>, <바로 그 해>)을 써서 아버지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세계만방에 부정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스탈린의 딸로 불행한 삶을 이어간다. 그리하여 오늘날 대부분의 기록물들은 '스베틀라나 스탈린'으로 기록하고, 사람들은 스탈린의 딸로 기억한다. 70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모정까지 포기하면서, 스탈린의 성까지 버리면서 스탈린의 딸임을 부정하고자 했음에도 결국은 스탈린의 딸로 남고 만 것이다.

전처와 둘째 부인의 권총 자살, 평생을 아버지의 망령과 싸웠음에도 벗어나지 못한 스베틀라나, 포로수용소에서 철책선에 몸을 던져 자살한 장남 야코프, 아버지에게 맞서진 않았으나 결코 순탄치 못한 차남 바실리의 죽음 등, 책을 통해 만나는 스탈린 일가의 불행은 그릇된 권력의 어두운 그늘을 여실히 보여 준다.

'도대체 권력이란 무엇인가' 내가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뒤트는가? <부러진 화살>에서 개인을 농락한 것은 사법 권력이었고, <남영동 1985>에서 고귀한 영혼과 육체를 짐승처럼 유린한 것은 독재 권력과 그 하수인들이었다.

이 책은 비틀린 개인과 폭압적인 세계의 독재 권력,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개인들의 삶을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인간의 가장 극적이고 근원적인 관계를 통해 들여다보고 있다. 집권자에 따라 민주주의의 진전과 후퇴를 반복하는 허약한 우리 사회가 비극을 돌이키지 않기 위해 반드시 반추해야 할 역사의 순간들이 담겨 있다. 현실은 때로 영화보다 더 영화적이며, 역사는 종종 순진한 믿음과 때 이른 망각에 엄혹한 대가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 추천사 정지영(영화감독)

<독재자의 자식들>은 스탈린의 자식들 외에 무솔리니·카스트로·사담 후세인·차우셰스쿠·하르토·프랑코·피노체트·마르코스·카다피 등 세계 각국의, 현대사의 악명 높은 독재자와 그 자식들의 드라마틱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추적한다.

저자는 진보 성향의 저널리스트와 사회학자 6명. 독재자의 삶과 세계사에 남긴 악명이나 정치적 영향 등을 먼저 들려준 후, 아버지의 독재가 자식들의 삶에 어떤 식으로 관여하고 어떤 방법으로 자식들의 운명을 비트는지, 독재자의 DNA가 어떤 양상으로 대물림 되며 주변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지 등을 들려줌으로써 '독재자 아버지, 영웅인가 망령인가'를 묻게 한다.

이유는 역사를 망각해 독재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불행을 더 이상 갖지 말자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독재자와 그 자식들의 비극적이어서 더욱 흥미진진한 삶은 물론 이탈리아 파시즘의 등장, 스탈린에 의한 공산주의의 전체주의화, 중동지역의 종교 및 석유 이권다툼, 남미의 아시아의 정치적 변화 등 현대사를 이해하는데 결코 간과해선 안 되는 중요 이슈들까지 접할 수 있어서, 그것도 매우 이해하기 쉽게 써서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덧붙이는 글 | <독재자의 자식들>ㅣ저자:강상구·이형석·서영표·김성경·정규식·김재민| 북오션 | 2012-12-27ㅣ값:15,000원



독재자의 자식들 - 독재자 아버지, 영웅인가 망령인가

이형석 외 지음, 북오션(2012)


태그:#독재자, #스베틀라나, #에다 치아노, #스탈린, #무솔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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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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