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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국면이었던 지난해 12월 13일, 한 가지 특이한 경험을 했다. 한국소설가협회(아래 한소협)에서 주관하는 소설 강좌에 강사로 참여하여 수강자들과 함께 내 단편소설 한 편을 읽고 대담을 나눈 일이다. 한국소설가협회가 들어 있는 남산문학관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소협으로부터 발표 작품 가운데서 단편 하나를 선정하여 메일로 보내달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꽤 고심을 했다. 등단 이후 30년 동안 발표한 100여 편의 단편들 가운데서 한 편을 선택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처음엔 2004년 <한국소설> 4월호에 발표했던 <꿈의 성장> 쪽으로 마음이 갔다. 민족분단 현실과 통일지향 의지를 담은 소설로 우리 시대의 문학이 적극적으로 추구해 나가야 할 주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97년 <내일을 여는 작가> 11·12월 호와 <소설충청> 5호에 발표했던 <한 번도 지지 않은 사람>을 선택했다. 이미 내 컴퓨터 안에 저장되어 있기에 쉽게 전송할 수 있었다. 단편 <한 번도 지지 않은 사람>은 1990년대 중반의 정치지형과 선거로 집약 표출되는 사회현상을 다룬 소설이다. 그 작품을 발표한 때로부터 15년이 흐르고 있지만, 많은 것들이 변하지 않아 오늘에도 현실감을 줄 수 있는 데다가, 제18대 대통령 선거 국면이어서 시기적으로 잘 어울릴 수 있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수강자는 30명가량이었고, 남녀노소가 균형을 이룬 것 같았다. 한소협에서 소설을 미리 프린트하여 모두에게 배부를 했고, 10여 명이 한 쪽씩 이어서 읽었다. 충청도 서산태안 지방 사투리를 읽는 일이 조금은 어려운 듯했으나 모두 재미있어했다. 그렇게 1시간가량 소설을 읽은 다음 10분 휴식 후 소설 내용과 관련하여 1시간 30분가량 수강자들과 대담을 나누었다. 예정 시간 1시간이 금세 지나가서 30분 정도 더 얘기를 나누어야 했다.
            
'한 번도 지지 않은 사람' 이야기   

'자민련 바람'이 충청도를 휩쓸던 1990년대 중반, 나는 서산 태안 홍성 청양 등지의 지역신문들과 서산의 지역잡지에 신지역감정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설파하는 글을 많이 썼다. 집단 최면과 집단 몰이성에 맞서 용감히 싸웠던 것을 명예롭게 생각한다.
▲ 지역신문 칼럼 '자민련 바람'이 충청도를 휩쓸던 1990년대 중반, 나는 서산 태안 홍성 청양 등지의 지역신문들과 서산의 지역잡지에 신지역감정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설파하는 글을 많이 썼다. 집단 최면과 집단 몰이성에 맞서 용감히 싸웠던 것을 명예롭게 생각한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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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한 번도 지지 않은 사람>은 주인공이며 화자인 '나'가 어느 노인에게서 이상한 전화를 받는 것으로부터 얘기가 시작된다. 나로서는 전혀 모르는 노인이었다. 몸이 불편한 것 같은 노인은 지역신문에 실리는 내 칼럼들을 매번 유심히 읽는다고 했고, 내 글을 읽은 것 때문에 뭔가 의논을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전화를 했노라고 했다. 안면도 창기리에서 살고 있다며 꼭 한 번 찾아와 달라는 부탁이었다.

불원간 한 번 찾아가 뵙기로 약속을 한 나는 최근 수년 동안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서 받은 전화폭력들을 떠올린다. 서산과 태안의 지역신문들에 쓰는 글들 때문에 나는 여러 차례 전화폭력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 자민련이라는 정치집단이 석권하고 있는 충청지방의 '신지역감정바람'과 관련하는 일이었다. 1961년 5·16쿠데타와 함께 등장했던 부여 출신 김종필이 1990년의 3당 야합으로 출현한 민자당 안에서 퇴진 압력을 받게 되자 이에 반발하여 1995년 3월 충청지방을 기반으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 후 충청지방은 완전히 자민련 세상이었다.

나는 지역신문들에 글을 쓰면서 자민련 바람과 맹렬히 싸웠다. 소위 '녹색바람'으로도 불리는 자민련 바람, 충청도 신지역감정의 부당함을 나는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설파하곤 했다. 그러며 나는 자민련의 정치 수명을 10년으로 예상했다. 내 예상은 훗날 정확하게 들어맞았지만, 내 예언들이 지역신문들에 공표되자 정체불명의 여러 남녀가 내게 전화를 걸어 갖가지 폭언을 퍼붓곤 했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이었다. 폭력전화들은 내가 일하는 지역잡지사와 우리 집으로 집중되었고, 시도 때도 없었다. 잦은 전화폭력에 내 노모는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였고, 노인뿐만 아니라 나와 아내도 전화기 신호음이 울릴 때마다 지레 공포감을 안아야 했다.

내게 전화폭력을 가한 사람들 중에는 안면도 백사장 항에서 산다는 청년도 있었다. 그는 1995년의 지방선거에서 자민련이 충청권을 싹쓸이하여 충청도의 자존심을 한껏 세웠다는 생각으로 승리감에 젖어 축배를 들던 중 내 글을 읽었다고 했다. 너무도 분통이 터져 전화를 걸었다며 50고개를 바라보는 내게 무지막지한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인내하면서 내 글을 잘 보관해 두었다가 1년 후에 다시 한 번 읽어보고 그때도 오늘과 똑같은 생각이 들면 다시 전화하라는 시덥지 않은 말만 했을 뿐이었다.

나는 하루 시간을 내어 버스를 타고 안면도 창기리의 그 노인을 찾아가면서 다시금 그 청년을 떠올린다. 누군지 모를 그 청년의 전화를 받은 때가 이태 전인데, 그 후 그 청년에게서는 전화가 없었다. 나는 움트기 시작하는 '박정희 향수'에 대한 생각, 앞으로 10년쯤에는 우리 사회에 '박정희 향수'가 창궐하게 되리라는 글을 써서 전화폭력에 시달렸다는 어느 대학교수의 얘기도 떠올리면서 버스에서 내린다.

그리고 걸어서 그 노인 집을 찾아간다. 병색이 완연한 그 노인과 만나 막걸리를 대접받으며 얘기를 나눈다. 그 노인이 나를 만나고자 한 연유를 듣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은 평생 동안 견지해온 자신의 선거투표 행태를 고백하면서 "마지막 투표일지도 모를 1997년의 제15대 대선만큼은 제대로 투표를 하기 위해 조언을 듣고자" 내게 전화를 했노라고 했다.

노인은 청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선거들에 빠짐없이 투표를 해왔는데, 한 번도 사표(死票)를 내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의 투표는 모조리 승표(勝票)가 되어서 매번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왔다고 했다. 처음부터 누가 이길 것인가 나름대로 가늠을 해보고 이길 것 같은 후보에게 표를 주다 보니 재미가 들려서 매번 그렇게 투표를 하게 됐더라는 얘기였다. 그는 그 사실을 어깨 으쓱거리며 자랑도 많이 했노라고 했다.

그런 그가 마지막일지 모를 투표만큼은 깊이 생각을 해보고 제대로 투표를 하기 위해 내 조언을 듣고자 전화를 한 까닭은 얼마 전에 세상을 뜬 아들의 유언 때문이라고 했다. 아들이 오토바이 사고로 전신이 마비되어 이태 동안 집에서 누워서 살다가 두어 달 전에 세상을 떴는데, 죽으면서 아버지께 나를 만나 보라는 유언을 했다는 것이었다.

노인의 아들은 이태 전에 내게 무지막지한 폭력전화를 했던 그 청년이었다. 술 취한 상태로 내게 폭력전화를 하고 나서 더욱 흥분상태가 되어 오토바이를 끌고 나갔다가 그만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한 달 전에 예견했던 김지하의 '빨갱이 타령'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지난 12월 13일 오후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토지문화관에서 김지하 시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지난 12월 13일 오후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토지문화관에서 김지하 시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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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명이 한 페이지씩 소설을 낭독하고 나서 10분 휴식 후 가진 대담 시간은 무척 재미있었다. 수강자들은 소설 내용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나는 그 질문들에 적절히 답변을 하고 보충 설명을 하면 되었다.

'박정희 향수'에 대한 얘기도 나왔고, 1990년대 중반 충청권을 휩쓸었던 자민련 바람을 비롯하여 망국적인 지역감정·지역패권주의의 폐해에 관한 얘기도 많이 했다. 소설 속의 그 노인처럼 깊은 생각 없이 자신의 표를 '승표'로 만들기 위해 누가 이길 것인가 대세를 가늠해서 표를 주는 행태에 대한 얘기도 했다.

지금도 그런 식으로 투표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말도 나왔다. "그 노인처럼 꼭 그런 식으로 투표를 하지는 않더라도 어떤 '바람'에 편승해서 감정적으로 투표를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말도 내 입에서 나왔고 모두들 동감을 표했다. 지역감정 바람은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 어떤 성격의 바람이든 이상한 바람이 생겨나면 대중은 여지없이 농락되고 말 거라는 말도 했다. 나는 그때 이미 이상한 바람, 1992년의 '초원복국' 사건이 만들어낸 역풍과도 같은 2012년의 TV 1차 토론에 의한 기이한 바람을 예견하고 있었지 싶다.

"단순하고 무지한 대중의 속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일시적인 감정에 따라 투표를 한다면 그게 바로 소설 속의 그 노인과 같은 성격의 투표가 아니겠느냐"는 말도 한 수강자의 입에서 나왔다. 수강자들 모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는데, 수강자들 모두 그런 현상과 관련하는 어떤 예감에 사로잡힌 기색이기도 했다.

결국 내 소설 <한 번도 지지 않은 사람>에 담긴 1990년대 중반이나 15~20년 후인 오늘이나 정치 형태·국민들의 의식수준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수강자들의 중론이었다. 오히려 정치 수준과 민주주의는 20년 전으로 후퇴를 했다는 내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수강자는 아무도 없었다. 

소설 속의 그 청년이 내 권유대로 1년 후에 내 글을 다시 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그게 소설 속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청년이 병석에서 뭔가를 깨달았기에 아버지에게 '나'에 대한 얘기를 하며 나를 만나보시라는 유언을 하지 않았겠느냐는 말도 한 수강자의 입에서 나왔다. 대중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뭔가를 깨닫게 되는데, 소설 속의 그 노인은 아들 덕이기도 하겠지만 아들의 사고 이후 지역신문에 실리는 내 글들을 계속 유심히 읽었기에 어떤 자각을 얻게 되지 않았겠느냐는 말도 나왔다.

그러므로 읽는 일은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결론도 나오게 되었다. 그러자 한 수강자의 입에서 "조중동은 빼고"라는 말이 나와 모두들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한 수강자가 내게 민족분단과 통일의지를 그린 소설은 없느냐고 물어 2004년 <한국소설>에 발표했던 단편 <꿈의 성장>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다.

좌담이 거의 마무리되어 갈 때 한 수강자가 내게 "김지하 시인의 변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했다. 나는 한 마디로 "걸레 같다"는 답변을 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변절은 어떤 성격의 변절이건 간에 그 자체로 걸레의 성격의 지니기 마련입니다. 변절은 그것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변절을 합리화하기 위해 많은 강변과 무리수를 만들어냅니다. 어떤 명분이나 합리화도 때를 더 많이 묻히는 행위일 뿐입니다. 변절은 끝내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가 됩니다.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 김지하는 자신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길로 가고 말 겁니다."

내가 소설 수강자들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한 때로부터 한 달쯤 지난 시점에서 TV프로에 출연한 김지하의 입에서 '빨갱이 타령'을 들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빨갱이였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유신독재에 저항해서 감옥에 간 게 아니라 빨갱이 짓을 해서 감옥생활을 했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소리였다.

걸핏하면 빨갱이 타령을 하고, 무슨 일이건 간에 종북 주술부터 들이대고 보는 저 시정의 가납사니들과 똑같은 모습을 한때의 저항시인 김지하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참으로 경멸과 연민을 자아내는 살풍경이다.


태그:#제18대 대선, #자민련 바람, #신지역감정, #김지하, #한국소설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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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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