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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동구 주남마을에 있는 위령비. 1980년 5월 23일 11공수부대는 부상당한 청년 두 명을 주남마을 야산 중턱으로 끌고가 사살하고 암매장했다.
 광주광역시 동구 주남마을에 있는 위령비. 1980년 5월 23일 11공수부대는 부상당한 청년 두 명을 주남마을 야산 중턱으로 끌고가 사살하고 암매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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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마을 찾아가던 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높고 파란 겨울 하늘은 더욱 시리게 느껴졌다. 파란색이 원래 갖고 있는 외로움의 세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주남마을이 품고 있는 처절한 상처 때문이었을까.

주남마을은 '광주천 따라 걷기' 1구간에 속한다. 1구간은 동구 용연동 용연정수장에서 주남마을까지 이르는 길이다.

주남마을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용연마을부터 소개하자. 용연(龍淵)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용연동의 옛 이름은 용솟골이다. 용이 사는 연못이 있었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용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은 전라도는 물론 경상도, 충청도 등지에도 많다. 물이 좋아 폭포가 있거나 계곡이 좋아 용연이란 이름이 붙여진 경우다.

신령스런 설화의 마을답게 용연마을에선 지난 2003년 5월에는 '한국만가 무속 제전'이 치러졌다. 이때 용연마을 주민들은 '용연마을 상여소리'를 들고 참가했다. 또 1970년대 무렵까지는 해마다 음력 정월 나흗날 오후 10시부터 오전 3시까지 당산제를 지냈다. 수령 470년의 귀목나무가 '할아버지 당산' 구실을 했다. 당산제를 지내는 마을이 대개 그렇듯 용연동에도 '농악단'이 있었다.

하지만 '광역도시화'는 이 모든 것을 지난 일로 만들어버렸다. 용이 사는 연못 대신 정수장이 들어섰고, 대를 이어 불러왔던 상여소리 대신 갖가지 공사 소음이 마을을 시끌벅적 채우고 있다.

용연마을을 나와 광주 방향으로 한 시간 남짓 걷다 보면 주남마을이 있다. 주민 100여 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 하지만 세간의 시선은 어느 해 한 번이라도 이 마을을 피해 간 적 없다.

1980년 5월 23일, 11공수부대가 진을 친 주남마을

1980년 5월 당시 11공수부대가 주둔했던 주남마을.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수북이 쌓여 있다.
 1980년 5월 당시 11공수부대가 주둔했던 주남마을.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수북이 쌓여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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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당한 어두운 과거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며 주민들은 마을에 예쁜 벽화를 그리고 있다.
 학살 당한 어두운 과거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며 주민들은 마을에 예쁜 벽화를 그리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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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금남로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은 시민군을 향해 집단 발포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4시께, 11공수부대는 전남도청에서 나와 주남마을 뒷산에 진지를 쳤다. 광주와 외부를 오가는 차량 통행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모내기철이 막 지난 터라 못자리에 물을 대야 했지만 주민들은 논에 갈 수가 없었다. 뒷산이며 마을 안 도로, 마을 밖 광주-화순 간 도로는 군인들로 차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공수부대는 오후 8시 이후 집 밖으로 나온 주민들을 향해서도 무조건 총을 갈겨댔다.

공수부대가 주남마을에 진을 친지 사흘째 되던 23일, 11공수부대는 지나가던 버스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 발포로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 15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했다. 사망자 중엔 10대 여성 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경악스러운 것은 당시 11공수 보안 부대는 15명을 총으로 사살했다고 보고했지만 사망한 10대 여성 두 명(손OO, 박OO)의 시신에선 대검에 의한 자창(찔려서 생긴 상처)이 발견되었다. 이 중 손아무개는 왼쪽 가슴에서 대검에 의한 자창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11공수부대 62대대 소속 병사 몇 명이 부상자 3명 중 남자 2명을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총살했다. 국방부 과거사위는 관련자들의 면담을 토대로 이날의 진상을 기록했다.

당시 공수부대 본부의 모 소령은 부상자를 데려온 부하들을 강하게 꾸짖었다. 이에 11공수여단 62대대 모 중사 등 3명이 손수레에 부상자를 싣고 주남마을 인근 야산 중턱으로 가 사살했다.

'국민대통합' 운운하는 시대... 용서는 누가 해야 하는 것일까

한파에 얼음은 져도 냇물은 흐르기를 멈추지 않는다. 주남천이 광주천과 합류하기 위해 얼음장 밑을 흐르고 있다.
 한파에 얼음은 져도 냇물은 흐르기를 멈추지 않는다. 주남천이 광주천과 합류하기 위해 얼음장 밑을 흐르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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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도 부상당한 적군은 치료해준다. 하물며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제나라 군대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부상당한 국민을 총으로 쏴 죽여 버리는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는데도 누구 하나 학살의 책임을 따지지 않는다. 학살의 책임을 따지면 '지역감정'이란다. 그러고도 제일 요란한 구호는 '선진국 진입'이다. 

대명천지에 벌어지는 무고한 살육에 마을주민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리고 서로 침묵했다. 5·18진상규명조사단이 마을을 찾아왔지만 "우리 마을은 아무 피해가 없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언제 다시 세상이 나빠져 누가 또 죽이러 올지 모르기 때문"이 그 이유였다. 학살의 트라우마란 그런 것이다.

공수부대가 주둔했던 자리를 지나 산으로 약 5분을 걷다 보면 위령비를 만날 수 있다. 1980년 5월 23일 부상당한 몸으로 공수부대에 의해 끌려왔다가 다시 처참하게 사살당한 두 청년의 원혼을 기리는 위령비다. 2010년 마을 주민들과 광주YMCA 그리고 5·18기념재단이 서로 힘을 모아 그들이 학살당한 바로 뒤 볕 잘 드는 언덕에 위령비를 세웠다. 사건이 발생한 지 30년 만이었다. 

주남마을 골목길 담벼락엔 예쁜 벽화가 그려지고 있다. 한 주민은 "죽임당하는 것이 무서워서 그리고 말하고 나서 보복 당할까 봐 무서워 말 못하고 살아온 어두운 시절에서 벗어나 우리 마을을 긍정적으로 꾸며 보자"고 하는 일이라 했다. 광주광역시가 추진하는 '창조마을 사업'을 신청했는데 마을벽화 그리기도 사업의 한 부분이란다.

유난히 주남마을 겨울 하늘이 파랬다. 지금도 내딛는 땅마다 학살의 기억이 선명하다. 그러나 이 어디에서도 학살자가 제대로 심판받았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 학살의 진상만이라도 정확하게 기록하자는 호소에 '지역감정'이라고 낙인을 찍어댄다. 그리고 '이제는 용서와 화해로 국민대통합을 해야 하는 시대'라고 생뚱맞은 타령을 늘어놓는다. 용서는 누가 해야 하는 것일까?

주남마을 주민들이 만든 마을지도. 원래는 마을 초입 노인회관 앞에 세워져 있었지만 지난 태풍에 넘어졌다. 마을 주민들 8할이 노인들이어서 마을지도판 하나 세우는 것도 큰 일이다.
 주남마을 주민들이 만든 마을지도. 원래는 마을 초입 노인회관 앞에 세워져 있었지만 지난 태풍에 넘어졌다. 마을 주민들 8할이 노인들이어서 마을지도판 하나 세우는 것도 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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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광주천 따라 걷기'는 사단법인 문화진흥협회와 오마이뉴스광주전라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캠페인입니다. 광주천 따라 걷기 1구간은 동구 용연정수장-주남마을까지입니다.



태그:#광주천 따라걷기, #주남마을, #5.18, #공수부대,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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