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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아가씨란 노래 있지 않습니까. 거기 마지막구절이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꽃잎이 빨갛게 물이 들은 것이 아니라 멍이 들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통은 물이 들었다고 표현하지요 그게 일상입니다. 나의 눈으로 보고 내 머리로 생각하며 내 가슴으로 느끼고 내 발로 걷는 일종의 습관. 따로 연습하거나 반성할 필요도 없이 너무도 익숙해서 눈 감고도 해댈 수 있는 단조로운 실천.

일탈(日脫)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꿈 꿔보고 싶은 말, 그러나 막상 일탈의 문에 발 디딜라 치면 불안하고 불결하고 금기사항이 많은 10대의 치기로 돌아가는 듯 한 단어. 하지만 단지 일상으로 부터의 벗어남일 뿐입니다. 안 보던 영화를 보거나 못 듣던 얘기를 듣거나 켜켜이 쌓아두었던 책중에 한권을 뽑거나 아니면 여행을 가거나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것들이 일탈이지요.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사고로 생각하고 또는 타인의 가슴을 내 가슴에 이식하고 타인의 발걸음을 내 발로 옮겨 보는 일. 그래서 모든 일탈은 성찰에 가깝습니다. 동백꽃이 빠알갛게 "물"이 들지 않고 "멍"이 들었다는 글자 하나를 바꾼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동백 아가씨는 훌륭한 일탈이 되지요.

뜬금없이 시를 하나 읽겠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가을 엽서인데요.

"한잎 두잎 나뭇잎이 자꾸 낮은 곳으로 내려 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한때 낙엽 지거든
물어 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시인은 사랑을 낮은 곳에 있다고 얘기합니다. 은행잎은 애초에 노랗지 않았습니다. 봄볕이 무르익을 때쯤 아주 여린 연두색 이파리로 태어납니다. 한여름의 뙤약볕. 심지어는 아파트 창문까지 날리는 태풍까지 다 받아냅니다. 그리고 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까지, 그러니까 일생을 나무에게 필요한 엽록소를 공급하기 위해 제 할일을 다합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기온의 변화가 심해지고 날이 추워지면 나무는 이제 겨울날 걱정을 합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나뭇잎에 빼앗기는 양분들도 아끼려고 하지요. 그래서 나뭇잎이 나무 본체로 들어오는 통로인 떨켜를 콱 막아 버립니다. 나무 본체의 입장은 단호합니다.

"이 추운겨울 내가 살아야겠으니 너는 이만 내 인생에서 사라져" 마치 아침드라마에서 나오는 아주 못된 배우자의 대사 같은 것이지요. 매정한 이별통보 혹은 절교 선언입니다. 그 신호를 받은 나뭇잎은 그제서야 이별을 준비합니다. 더이상 나무 본체를 위해서 광합성을 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사랑의 대상을 잃은 나뭇잎은 서서히 말라갑니다. 제 몸속에 남겨두었던 엽록소 파란색이 점점 옅어지고 노란색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참 놀랄 만한 것은 은행잎은 애초에 노란색이 맞다는 겁니다. 봄날 태어날 때부터 카르티노이드라고 하는 노란색 색소를 가지고 있다는 거지요. 단 한 번도 나무의 일원이 되어서 나무를 사랑하고 나무를 위해서 노동했던 그 순간에는 자기 색깔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나무와 이별하고 난 뒤의 단 며칠 혹은 2주? 3주 그제서야 자기 색깔을 드러냅니다. 그게 당신들의 책갈피에 곱게 모셔둔 노란 은행잎입니다.

안도현 시인이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낙엽에게 물어보라고 했는데 "자기의 색깔을 드러내지 않고 온힘을 다해 희생하는 것" 그게 사랑이란 걸 부끄럽게도 올가을에야 알았습니다. 시를 통해서 얻은 저의 자그마한 일탈의 성과입니다. 머리를 잘 쓰는 걸 사리판단이 빠르다 하고 가슴이 뜨거우면 정이 많다고들 합니다. 손이 여러 군데 걸쳐져 있는 걸 나눔이라 한다면 은행잎의 희생, 온힘을 다해 자신을 내 던지는 일은 발이 합니다. 하여 희생의 유일한 도구는 부지런히 발걸음 하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잎이 떨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지구가 가지고 있는 중력이란 것 때문이지요. 지구의 가장 깊은 곳의 중심에서 모든 사물들을 낮아지라고 잡아끄는 힘입니다. 그 중력 때문에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사람들은 땅위를 걷습니다. 우리가 일상을 사는 모든 행위들은 모두 이 중력의 힘에 의존합니다. 너무도 당연해서 일상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힘이 바로 중력입니다. 당연히 낙엽의 고단한 희생은 중력에 의해 낮은 곳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다시 내일을 기약합니다.

누구나 다 아는 너무 뻔한 얘기를 한다고 핀잔주실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과문한 탓인지 "민중과 함께 민중을 위해" 사는 능력자들은 많이 만나봤습니다. 그러나 "和光同塵"-빛을 감추고 티끌이 되어 섞인다- 스스로 민중이 되어 티끌 같은 삶을 사는 지식인을 많이 만나진 못했습니다. 나무로 굳게 서고자 하는 사람은 좀 있으되 나뭇잎이 되어 바닥을 뒹구는 사람은 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태껏 빨간색 볼펜으로 자기이름 석자도 크게 쓰지 못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이지상 씨는 인권연대 운영위원으로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이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안도현, #은행잎,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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