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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의 총선 후유증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10월 의회 선거가 끝난 직후 결과를 놓고 국민들 상당수가 정신적 충격에 빠져 있는 상황. 한국에서 총선 이후 유행했던 '멘붕(멘탈붕괴)'이 리투아니아의 현 상황을 잘 표현하는 단어일 것 같다.

리투아니아어로 '세이마스'라 불리는 의회는 총 141명의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나라의 총선 절차는 조금 복잡하다. 리투아니아는 유권자가 마음에 드는 정당을 지명함과 동시에 각 선거구당 개인 후보자를 동시에 뽑는 1차 선거를 치른 후, 2주 후에 개인 후보자 투표 결과에서 1,2위의 자리에 오른 후보자들만을 대상으로 별도로 치르는 2차 선거를 진행한다.

1차 투표 결과에 따른 정당 순위로 비례대표 70명 의원을 선출하고, 나머지 71명은 2차례에 걸쳐서 시행되는 선거구별 투표에서 표를 많이 얻는 이들로 구성된다.

올해는 1차 투표가 10월 14일, 2차 투표가 10월 28일 실시됐다. 1차 투표 결과, 러시아계 사업가인 빅토르 우스파스키흐가 이끄는 노동당이 19.8%로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2차 선거 이후 나온 결과를 종합해 사회민주당이 141석 중 38석을 차지해 원내 1당 자리에 올랐다. 그밖에 2003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국가기밀누설, 부정부패 등에 연루되어 대통령직에서 탄핵되었던 롤란다스 팍사스가 당 대표로 있는 질서정의당이 11석을 차지해 원내 4당이 됐다.

사회민주당은 독립 이후 최초의 대통령이자 이후 국무총리직을 성공적으로 역임했던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 등 리투아니아 현대사의 여러 굵직한 정치인들을 배출한 정당이다. 이번 선거 결과에 따라 다음 정부는 원내1당인 사회민주당과 노동당, 그리고 '조국연맹-리투아니아 기독민주당'(조국연맹)의 연정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조국연맹 정당은 2008년부터 국정을 비교적 순탄하게 운영해오고 있는 현 국무총리의 출신당이기도 하다.

부정부패의 온상인 노동당이 승리? 말도 안 돼!

실업률과 고령인구분포가 높은 북서부에서 노동당의 표가 압도적이다. 파란색 - 노동당, 붉은색 - 사회민주당 ,초록색 - 조국연맹-리투아니아 기독민주당,노란색 - 질서정의당  (지도 제작 UAB 'HNIT-BALTIC', Esri ArcGIS Online technologija의 허락하에 사용된 지도임)
▲ 1차 정당선거 투표 결과 실업률과 고령인구분포가 높은 북서부에서 노동당의 표가 압도적이다. 파란색 - 노동당, 붉은색 - 사회민주당 ,초록색 - 조국연맹-리투아니아 기독민주당,노란색 - 질서정의당 (지도 제작 UAB 'HNIT-BALTIC', Esri ArcGIS Online technologija의 허락하에 사용된 지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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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사람들을 '정치적 멘붕' 상태에 빠뜨린 것은 바로 1차 선거 개표결과였다. 국민들은 노동당이 정당투표 결과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듣고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다.

리투아니아의 노동당은 러시아에서 태어나 1991년 귀화한 빅토르 우스파스키흐(Viktoras Uspaskich)가 2003년에 설립한 정당이다. 우스파스키흐는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 수입을 비롯하여 식품가공업, 가축사료사업 등으로 큰 성공을 거둬 어마어마한 부를 모은 사업가다.

발트3국은 과거 소련과의 관계 때문에 러시아에서 이주해온 후손들이 많다. 따라서 러시아인이라는 개인적 배경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우스파스키흐가 리투아니아로 귀화한 상태해서 리투아니아식 이름인 '빅토라스 우스파스키하스(Viktoras Uspaskichas)' 대신 러시아식 이름인 우스파스키흐를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데 있다. 말하자면 한국으로 귀화한 일본인이 여전히 일본이름을 지니고 정치활동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또 있다. 우스파스키흐의 노동당은 정당 발족 직후인 2004년 총선에서 39석을 얻어 원내 1당으로 급부상했다. 선거 결과에 따라 노동당을 중심으로 정부가 구성되었으며, 우스파스키흐 자신은 경제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채 일년도 지나지 않아 그는 경제부 장관직에서 물러났고 정부 구성도 와해됐다.

그는 정치자금을 개인명목으로 빼돌리기 위해 이중장부를 사용한 것이 드러나 경제부 장관을 사임한 직후 친척의 장례식에 참석한다는 핑계로 러시아로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를 체포하기 위해서 인터폴 등 국제경찰조직이 동원되었으나 그는 정작 러시아로의 망명을 신청하고 러시아에서 "리투아니아 내 정치인들의 인권이 침해되고 있다"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정치적 염문을 뿌리고 다니기도 했다.

2007년 리투아니아로 돌아온 후 체포된 그는 가택구금 상태에 놓였지만, 그 해 다시 정치로의 귀환을 시도했고, 마침내 다시 노동당의 당수로 임명되었다. 현재까지 그의 공금횡령과 이중장부 의혹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진행 중이다. 아직 정확한 판결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사법적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당 대표가 이끄는 정당이 다시 여당이 된 데에 대해 대다수의 리투아니아인들이 충격에 빠진 것이다.

도덕성보다는 경제가 우선... 최저임금 2배 인상 공약 적중

선거운동 내내 사용되었던 노동당의 공약광고와 우스파스키흐 대표
▲ "최저임금 1509 리타스(약 60만원), 유럽 최저 실업률, 우리는 방법을 압니다" 선거운동 내내 사용되었던 노동당의 공약광고와 우스파스키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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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정당이 다시 여당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리투아니아의 경제 상황과 현실적인 임금인상을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 주요했다는 분석이다. 특히 시민들의 이목을 끈 것은 법적최저임금을 현재 수준보다 대략 두 배 정도 올리겠다는 약속이었다. 정치학자들은 이 공약에 대해서, 그의 공약대로 실행될 경우 물가가 더욱 오르고 실업률이 증가할 것이라는 평가를 내놓았으나 실질임금이 다른 유럽연합국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낮은 리투아니아 국민들에게 그 약속은 정치학자들의 분석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 것이다.

실제로 리투아니아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차 선거 개표결과 도시와 시골에서 상반된 투표 결과가 나온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수준이 높은 빌뉴스, 카우나스 등 리투아니아의 대도시에서는 중도정당인 조국연맹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고, 발전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동부의 경우 사회민주당에 대한 지지도가 월등히 높았다. 반면 고령인구가 많고 산업화가 덜 이루어져 실업률이 비교적 높은 서부에는 전반적으로 노동당에 대한 지지도가 높았다.

"난 노동당을 찍지 않았다"

따라서 리투아니아 젊은 인구층이 많고 정치적 의견교환이 활발한 대도시 주민들이 1차 선거 투표 결과를 보고 엄청난 충격에 빠진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이 선거 결과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에서는 "나는 노동당을 찍지 않았다"는 배너를 공유하며 선거결과에 대한 반대의견을 공공연히 표현하기도 했다.

1차 선거 결과에 반대하는 이들이 사용한 페이스북 배너. 맨 왼편부터 우스파스키흐, 팍사스, 부트케비츄스
▲ "나는 이들을 찍지 않았다" 1차 선거 결과에 반대하는 이들이 사용한 페이스북 배너. 맨 왼편부터 우스파스키흐, 팍사스, 부트케비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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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의 승리는 경제사정이 열악한 지방 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경제발전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유권자들 사이에 당대표 우스파스키흐를 비롯한 노동당 출신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개인별 후보를 선출한 2차 선거에서는 대다수의 지역에서 사회민주당 후보들이 선전을 거두었고, 심지어 1차 선거에서 노동당을 찍었던 서부에서도 반 이상의 지역에서 사회민주당 후보들이 승리를 거두는 결과가 나타났다.

1,2차 선거를 종합한 결과, 사회민주당이 총 38석을 차지해 최대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되었고, 33석을 차지한 조국연맹이 뒤를 이었고 노동당은 총 29석을 차지했다. 이에 따라 사회민주당 출신 후보 중에서 총리가 지명되고 (현재로서는 사회민주당의 당대표인 알기르다스 부트케비츄스가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 세 정당의 연정 구성이 유력시 되고 있다.

하지만 그리바우스카이테 대통령은 현재 사법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당 대표가 이끄는 노동당이 연정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표시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대통령과의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동당이 아닌 제4의 정당의 참여를 고민하고 있지만, 부트케비츄스 사회민주당 대표는 여러 매체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노동당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고 있어 연정 구성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다. 우스파스키흐 역시 대통령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며 연정에 참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다.

또한 유권자들을 돈으로 매수한 당선자가 모두 노동자 출신으로 확인돼 우스파스키흐가 해결해야할 문제는 더 늘어나게 되었다. 부정선거 결과가 전반적인 투표결과에 변화를 줄 만한 규모는 아니지만, 선거 이후 벌어진 혼란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노동당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태그:#리투아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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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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