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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생이 형수에게 전한 감사패
 시동생이 형수에게 전한 감사패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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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패는 어느 기관에서 감사의 표시로 개인 또는 단체에 주는 것 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지난 11월 3일 비수구미 산골식당에서 발견한 것은 어느 시동생이란 사람이 그의 형수님에게 준 감사패다. 뭔가 사연이 있는 듯 했다.

결혼 10일 만에 남편을 군대에 보냈다

강원도 춘천이 고향인 김영순 할머니(65)는 열일곱 살 나이에 스물넷 먹은 아랫집 총각(장윤일)에게 시집을 갔다.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었다. 성실하다는 부모님의 말만 듣고 그냥 시집을 갔다. 그런데 그 남편이란 사람은 결혼한 지 열흘 만에 군대에 가 버렸다. 미리 말을 했으면 신부의 맘이 변할지 몰라 말을 하지 않았던 거다. 야속했지만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출가외인. 친정에 갈 수도 없는 일. 갈 곳이 없었다. 남편도 없는 호랑이 소굴 같은 시댁에 들어가야 했다.

시어머님의 괄시는 예상보다 심했다. 새벽에 혼자 일어나 시댁 식구들의 아침밥을 짓고, 여자의 몸으로 땔나무를 하러 매일 산속에 들어가고, 한겨울에 맨손으로 빨래를 하는 일은 예사였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시누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시어머니보다 더 심했다. 보란 듯이 잘 살아서 복수해 주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남편이 제대를 할 때까지 그렇게 3년간 시집살이를 했다.

남편 제대 후, 딱 3년만 화전을 해서 돈 벌자고 화천 산골짜기 마을인 비수구미로 왔다. 그런데 산속마을에 들어온 지 1년 만에 화전이 전면 금지됐다. 여러 해 화전을 해 온 사람들은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모두 떠났다. 당연히 화전을 하겠다고 온 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사람은 제외되었다.

이 산골마을을 떠나고 싶어도 이사비용이 없었다. '뭘 해먹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하늘을 원망하길 수차례.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도 없었다. 낮에는 집 앞 텃밭을 가꾸고 새벽에는 파로호 낚시꾼을 대상으로 밥장사를 시작했다.

막내는 힘들다고 잠 못 자며 울고, 엄마는 그게 가슴 아파 울었다

만동이네 옛 흙집 부엌, 지금은 관광객들이 최고로 선호하는 팬션이다.
 만동이네 옛 흙집 부엌, 지금은 관광객들이 최고로 선호하는 팬션이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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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용품을 사려면 1박2일 산길을 걸어 읍내로 나가든지, (노 젓는)배를 얻어 타고 몇 시간을 걸려 나가야 했다. 배 삯은 현금 대신 콩이나 팥으로 냈다. 그것도 없을 때는 산길을 택했다. 새벽에 주먹밥을 보자기에 싸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걸어 읍내에 도착하면 늦은 오후다. 서둘러 고무신이나 옷가지 등 필요한 물건을 사서 산길에 접어들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둠이 덮였다. 바위 밑에서 아침에 싸온 주먹밥으로 허기를 때우고 날이 밝을 때까지 잠을 청했다. 무섭다는 생각은 사치였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보석 같은 사남매를 얻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아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배를 저어 낚시꾼들의 심부름을 하는 일. 못 먹어 일곱 살 나이에 비해 몸집이 작았던 막내는 하도 작아 배를 저으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낚시꾼들은 빈 배가 다닌다고, 그것이 재미있다며 막내에게만 심부름을 시켰다. 그나마 인심 좋은 사람은 먹을 것이나 아주 적은 용돈을 주었다. 그것도 생활에 보탬이 된다는 생각에 말리지 못했다. 밤이 되면 막내는 힘들다고 울고, 엄마는 가슴 아파 울었다.

화전민들이 나가면서 산골마을 분교도 없어졌다. 아이들을 읍내로 유학을 시켰다. 사는데 바쁜 나머지 1년에 한번 정도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빨래도 못해 꾀죄죄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또 일 년에 봄과 가을소풍 그 흔한 김밥 한번 싸 주지 못한 게 가슴 아파서 울었다.

그렇게 20년 동안 낚시꾼들에게 밥도 해 주고 민박을 하며 살았더니 돈이 좀 모였다. 매일 그런 행복이 이어지길 기도했다. 너무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명은 너무 가혹했다. 1994년, 고생은 몹쓸 병을 안겼다. 어렵게 벌어온 돈이 아까워 병원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식들 다 죽일 생각이냐"는 남편의 눈물어린 사정에 병원에 입원했다. 결국  그동안 벌어놓은 돈은 병원비로 다 썼다.

호랑이가 우리를 살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평화의 댐 공사를 하면서 강물이 말라 버리자 낚시꾼들도 사라졌다. 내 운명은 불행이었구나! 죽을 생각도 했다.

평화의 댐 공사를 위해, 해산 정상부에 신작로가 생겼다. 길도 없는 곳을 헤집고 4시간을 올라야 그 길을 만난다. 봄이면 산나물 뜯고, 여름이면 뱀도 잡고, 가을이면 버섯을 채취해 읍내에 내다 팔았다. 그나마 신작로가 만들어져 이른 새벽에 산나물을 이고 뱀을 들고 읍내에 내다 팔면 어스름한 저녁 때쯤 집에 올 수 있었다.

'화천 동촌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

1998년 세상이 떠들썩했다. 결국 고양이과의 큰 동물로 결론이 났지만, 동촌리 비수구미는 한국 최고 오지마을로 알려지게 되었다. 오지탐험을 위한 여행객들이 한 명 두 명 비수구미를 찾았다.

'이들을 위해 밥장사를 해 보자.'

반찬이래야 봄에 산에서 채취한 산나물이 전부다. 그런데도 도시사람들은 그것이 맛있다며 찾았다. 한번 다녀간 사람이 또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생활이 조금씩 나아져갔다. 배를 샀다. 엔진이 달린 농선을 샀다. 막내가 어렸을 때 노 젓는게 힘들다고 울고 그것이 가슴 아파 울었던 설움이 컸던 기억 때문이었다. 덕분에 읍내엔 늦은 아침에 배를 타고 나가도 오후엔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김영순 할머니, 손님들이 나물 반찬이 맛있다고 하는 말에 얼마든지 가져다 먹으라고 말씀 하신다.
 김영순 할머니, 손님들이 나물 반찬이 맛있다고 하는 말에 얼마든지 가져다 먹으라고 말씀 하신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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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사 패 
김영순 여사님

십칠 세 되던 어느 날 어린 나이 부모님의 권유로 처음 뵙는 남편을 따라 몇 백리 부모님과 고향을 뒤로하고 시집을 가신 지 몇 개월 갑자기 남편은 군에 입대하셨고 모든 것이 통하지 않고 융통성도 없으신 시어머님 밑에서 모진 시집살이 아궁이 앞에서 뜬눈으로 밤새우기 일쑤였던 나날들 그래도 일편단심 남편을 기다리며 살았던 긴 세월 뒤로하고 이젠 좋은 가정을 이루시고 슬하에 사남매도 훌륭히 키워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날에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2009. 4. 29(음 4.5)
시동생 장윤옥 드림

회갑 날, 시동생이 감사패를 읽어주며 건네주었다. 참여한 친지, 가족들 모두 부둥켜안고 울었다.

만동이네 집

김영순 할머니가 운영하는 식당 이름은 '만동이네 집'.  이 집 가족들은 봄이면 인근 산으로 산나물을 뜯으러 나선다. 그것을 건조시켜 산채 비빔밥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 흔한 간판도 없다. 그냥 '만동이네 집'이다. 비수구미에 들어서 시멘트로 난간도 없는, 다리 건너편 산기슭 아래 파란 지붕을 얹은 집이 만동이네 집이다.

'이런 산속에 무슨 장사가 된다고 식당을 운영할까!'라고 생각했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주말과 휴일에 이 식당을 찾는 사람들은 무려 400여 명에 이른다. 예약 없이 중식시간인 12시에 이곳을 찾았다가는 보통 2시간여를 기다려야 한다.

만동이네 산나물 밥상, 주말이면 400여 명의 관광객들이 이 밥상을 찾는다.
 만동이네 산나물 밥상, 주말이면 400여 명의 관광객들이 이 밥상을 찾는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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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읍내에서 평화의 댐 방면으로 (차량을 이용)산길을 따라 20여 분 정도 가다보면 해산터널이 나온다. 이 터널이 끝나는 지점 우측으로 난 샛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1시간여 파로호 인근까지 내려가다 좌측 산기슭에 보이는 외딴 집이 '만동이네 집'이다. 뱃길도 있다.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 배터에서 카페리를 이용할 경우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또 있다. 평화의 댐 아래에 있는 선착장에서 만동이네 집으로 전화를 하면 가족들이 조그만 배를 가지고 데리러 온다.

그렇게 먼 거리 허기져 찾았는데, 맛없는 것이 어디 있을까!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어떤 관광지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산채 비빔밥과는 맛이 다르다. 장맛 때문일까? 아니면 나물 맛일까? 그런 의문에 아무도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일까. 겨울을 제외하고 봄, 여름, 가을 많은 사람이 '만동이네 집'을 찾는다.

우리의 영원한 막내 만동이
 우리의 영원한 막내 만동이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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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동이네 집' 하면 귀염둥이 꼬마네 집인 줄 안다. 만동이는 어렸을 때 하도 작아 낚시꾼들이 '빈 배가 움직인다' 고 재미있어 하며 심부름을 시켰던 아이 이름이다. 그러나 지금은 꼬맹이가 아닌 37세의 잘 생긴 청년이다.

"난 누가 결혼한다는 청첩장이 오면 정말 가고 싶지 않아."
"왜요?"
"난 결혼사진이 없다우. 너무 가난해서 예물도 없었고, 옷이 없어 남의 옷 빌려 입고 결혼을 했다는 게 자꾸 억울한 세월을 산 것 같아서..."

김영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는 길 왠지 모를 눈물이 흐른다.

김영순, 장윤일 부부. 고생하신 만큼 앞으로 행복만 이어지길 빌었다.
 김영순, 장윤일 부부. 고생하신 만큼 앞으로 행복만 이어지길 빌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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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장만동, #김영순, #비수구미, #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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