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의도 KDB산업은행 앞. 바람이나 막아줄까 싶은 비닐천막 4동이 나란히 세워져있습니다. 순식간에 일자리를 잃은 씨그네틱스, 풍산, 공무원노조, 현대차비정규직, 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 노동자들입니다.

1일 오후 7시 45분, 씨그네틱스 농성장이 갑자기 시끌벅쩍합니다. 길거리 농성으로 지친 노동자들의 체온을 재고 청진기로 심장소리를 듣고, '문진'을 하는, 이색적인 풍경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실의힘에서 왔습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어느날 갑자기 잡혀가서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당했고, '간첩'으로 내몰렸지요. 수십 년 동안 감옥에서 억울함을 삼킬 때 우리에겐 아무도 없었어요. 그때 알았습니다. 고통에 귀 기울여주며 함께 하는 손길이야말로 고난 받는 삶에 얼마나 큰 선물이 되는 것인지를요. 그래서 우리는 그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냥 주사가 아닙니다.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폭력과 싸우는 분들에게 따뜻한 응원의 마음을 담은 주사입니다…."

20, 30년 전 잔혹한 고문 끝에 '간첩'이 되어 오랜 감옥살이를 하고 그것을 견디며 살아온 고문생존자 그리고 그 상처에서 돋아난 새 살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고 싶은 '상처입은 치유자', 진실의힘 선생님들 말씀입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그저 고맙습니다.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인사말을 전해들은 노동자들의 눈빛이 숙연해 집니다.

"몸이 튼튼해야 오래 버틸 수 있지요? 오늘 제 말대로 잘 따라하셔야 해요~."

거리의 의사, 강용주 선생이 익숙한 솜씨로 주의사항을 설명하고 함께 한 의료 자원활동가 김승연 김정옥 김미정 박연화 선생이 주사놓을 준비를 합니다. 그 곁에서 진실의힘 선생님들과 자원활동가들은 뽀로로를 붙여주고, 체온을 재고,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물려주며 분주합니다.

지난해 진실의힘이 예방접종을 해드렸던, 그리고 1년 만에 다시 만난 씨그네틱스 노동자들. 오늘은 꼬마 친구들이 많이 왔습니다. 씨그네틱스 노동자들은 주로 엄마들입니다. 아직은 엄마 손길이 필요한 어린 아이들을 키우는 분들이 많습니다. 잘 싸우시는 분들이 아주 작은 주사바늘을 보고 "선생님, 이거 아파요?" 묻는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씨그네틱스해고자 윤선애씨와 자녀들(2차 2012.11.1(목),여의도공원 천막농성장)
 씨그네틱스해고자 윤선애씨와 자녀들(2차 2012.11.1(목),여의도공원 천막농성장)
ⓒ 박성희

관련사진보기


주사 앞에서는 어른도 아이와 같습니다. 씨그네틱스 꼴찌로 윤선애씨 삼남매가 소아과 의사 김승연 선생님 앞에 나란히 앉습니다. 온갖 사탕발림의 인사와 함께 주사를 놨지만 막내는 여지없이 '앙앙' 울어버립니다. 아이의 울음이 농성장에 환한 웃음꽃을 피웁니다.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노동자도 팔을 걷었습니다. 비정규직의 아픔을 삭이기에는 아직 앳되어 보이는 해고노동자들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그 용기와 자긍심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풍산해고자와 공무원노조는 왁자지껄하게 접종을 마쳤습니다. 마지막 학교비정규직 농성장은 9일째 단식농성 중인 박금자·황영미 위원장의 건강검진으로 대신했습니다.

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 단식농성자 황영미 위원장(9일째) 건강검진(2차 2012.11.1(목) 여의도공원 천막농성장)
 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 단식농성자 황영미 위원장(9일째) 건강검진(2차 2012.11.1(목) 여의도공원 천막농성장)
ⓒ 박성희

관련사진보기


해마다 이맘때면 진실의힘은 '거리의 의사' 강용주 선생(가정의학과전문의, 진실의힘 이사)을 앞세우고 거리로 나섭니다. 추운 겨울 모진 감옥살이를 해본 경험 때문에 찬바람이 불면 '거리에 선 사람들'이 눈에 밟히기 때문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제안한 강용주 선생도 열네 번의 겨울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진실의힘을 만든 고문생존자들은 억울한 옥살이 중에 가족들을 생각할 때면 눈앞이 캄캄해지곤 했습니다. 살림살이는 어찌하는지, 겨울 양식은, 아이들은, 아내는…. 갑자기 가장이 사라진 집안에서 영문도 모른 채 쩔쩔매고 있을 가족들 모습에 벽을 붙잡고 눈물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속수무책이던 그때, 아이들을 걱정해주는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다가오는 손길 하나만이라도 있었더라면, 조금은 덜 아프고 덜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 아픔은 방금 막 찔린 상처처럼 지금도 생생하기만 합니다.

고문의 상처와 억울한 옥살이를 견뎌내고 오늘에 이른 지금, 그때의 간절함을 따라 지금 폭력에 맞서고 있는 이들을 찾아 손잡고 귀 기울이려 합니다. 우리들, 진실의힘 고문생존자들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면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상처입은 치유자'입니다.

고문으로 간첩이 된 후 국가의 핍박과 사회의 증오와 이웃의 냉대 속에서도 기나긴 세월 동안 진실을 되찾기 위해 싸웠고 국가의 책임을 추궁했습니다. 그저 우리가 해야 할 일, 하고 싶었던 일,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오는 동안 우리 스스로 우리의 소망이 되어 살아 왔습니다. 너무도 커다란 상처였기에 아무 데도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작년 예방접종 때 어떤 노동자가 그랬습니다. "진실의힘 선생님들의 삶에 견줘보면 우리들의 어려움은 작은 모래알 같아요"라구요. 내 상처가 제일 깊고 내 어깨에 짊어진 짐이 가장 무겁다고 생각했는데 더 큰 상처의 이야기, 그것을 견뎌낸 모습을 본 순간 거짓말처럼 사소하고 가벼워진다고요. 그래서 견딜만 하다고 깨닫고 결코 포기하지 않고 싸울 거라고 말했습니다.

참 고마운 만남이었습니다. 우리 삶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듯, 우리 삶이 또 다른 곳으로 번져가는 듯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마음이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대우차판매해고노동자(3차 2012.11.2(금), 인천갈산역 대우차판매농성장)
 대우차판매해고노동자(3차 2012.11.2(금), 인천갈산역 대우차판매농성장)
ⓒ 박성희

관련사진보기


이날 80여명의 어깨에 독감예방주사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2일엔 부평으로 가서 대우자판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3일엔 서울광장으로 오는 강정 주민들과 활동가들 그리고 용산 유가족들을 응원하러 갑니다.

내년엔 다들 일터로, 집으로 돌아가서 진실의힘 겨울독감 예방접종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거리에서 만날 일 없어야 할 텐데…" 하는 우리의 인사말은 참 특이합니다. 농성장이 아닌, 회사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뵙자고 인사드리며 여의도 찬바람 가득한 비닐천막을 나섭니다.

가슴 깊이 아픔이 있지만, "삶은 폭력보다 강하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믿음이 차가운 비닐천막에 용기와 온기를 전해주기를 바랍니다.

(재)진실의힘은?
 진실의힘 로고
ⓒ 박성희

관련사진보기


"고통을 알기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을 도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동굴 같은 어둠속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기에,
어둠속에 있는 이들을 햇빛 아래로 손잡고 나올 수 있다는 자부심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진실의힘을 만들었습니다." (창립식 축문, 2010.6.)

'진실의힘'은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안기부), 보안사, 경찰 대공분실 등에 끌려가 잔인한 고문을 당한 끝에 허위자백을 하고 불공정한 재판을 받아 '간첩'으로 만들어진 피해자들 가운데 재심재판을 통해 진실을 밝히고 국가의 책임을 추궁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 만든 재단법인입니다. 조작간첩 피해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보탠 변호사, 의료인, 인권운동가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재)진실의힘은 '6.26 UN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 기념식, 진실의힘 인권상, 국가폭력 피해에 대한 집단상담과 마이데이-맘풀이를 비롯한 치유 프로그램, 국가폭력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 등의 활동을 하면서 국가폭력의 생존자들에게는 격려와 존경을, 피해자들에게는 용기와 위로를 보내고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들에게는 공감과 연대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합니다. 무죄판결과 손해배상으로 잃어버린 삶을 되돌려 받을 수는 없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뜻있는 분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태그:#HTTP://WWW.TRUTHFOUNDAT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