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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님, 바쁘시더라도 애타는 제 목소리를 봐서 꼭 참석해주십시오. 정족수가 모자라 개회 자체가 안 될 것 같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학생부장으로서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를 열 때마다 휴대전화 문자와 전화로 각 학폭위원들에게 이런 통사정을 해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학폭위의 당연직 간사로서 아무런 결정권을 행사할 수는 없지만, 학폭위 소집부터 관련 서류 작성 및 제출, 처분 결과 발송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게 학생부장 몫이다.

학폭위원들에게 등기우편을 통해 소집 요청을 보냈고, 마치 스팸처럼 하루에도 수차례 휴대전화 문자를 띄웠지만 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았다. 재적 위원이 총 10명이니, 개회를 위해서는 6명이 필요한데, 30분 넘게 기다렸는데도 4명만 휑한 회의장에 데면데면하게 앉아있다. 불참한 위원들 중 그나마 두 명은 위임장이라도 보냈지만, 나머지는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이미 가해, 피해학생과 보호자들이 진술을 위해 일찌감치 학교에 와서 대기하고 있는 상황인데, 정족수가 모자라니 간사로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다급한 대로 교육청으로 문의를 했다. 과연 위임장이 개회를 위한 정족수로 볼 수 있는지 여부를 묻기 위해서다. 그런데, 교육청의 답변이 가관이다.

"학폭위의 경우, 본격 시행된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위임장이 정족수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련 규정도 없고, 판례도 없네요. 대개 위임장은 결정된 권한에 대한 것이라서, 법적 갈등이 생겼을 경우 다툼의 소지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위임장에 개회 관련 내용까지 적시되어 있다면 학교장 재량에 의해 가능하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만…"

꽈배기처럼 말을 빙빙 돌리고 있지만, 요약하자면 개회 가능 여부를 학교가 알아서 판단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학교장이 책임지라는 뜻이다. 교육청의 이런 두루뭉술한 답변을 듣고 다짜고짜 밀어붙일 간 큰 학교장이 과연 있을까. 결국 가해, 피해학생과 보호자들, 그리고 어렵사리 참석한 4명의 위원들에게 거듭 양해를 구하고 학폭위를 이틀 뒤로 미뤘다.

준비부터 진행까지 아슬아슬 '학폭위'... 열흘간 교과서 한 번 못 봐

교문앞 체벌 (자료사진)
 교문앞 체벌 (자료사진)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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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이 지났고, 회의 시간도 퇴근 시간 이후인 오후 7시로 미뤘지만 하등 다를 바 없었다. 개회 시간이 가까워오자 문자로, 전화로 애걸복걸 떼쓰듯 참석해달라고 부탁했다. 교사인지, 영업사원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만약 이번마저 열리지 못한다면, 참석 위원들은 그만두고라도 가해, 피해학생과 보호자들이 학교의 무성의를 탓하게 될 게 뻔했다.

하늘도 감읍했는지, 7시 반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개회를 위한 정족수 6명이 채워졌다. 위원장의 개회를 알리는 의사봉 망치 소리가 그렇게 경쾌할 수가 없었다. 학폭위 간사로서 두툼한 회의 자료를 위원들에게 미리 배포하고, 사건 개요를 꼼꼼히 설명했다. 담임교사와 상담교사가 가해, 피해학생을 개별 면담한 내용도 위원들과 공유했다.

여기까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피해학생 측과 가해학생 측의 진술이 지루할 만큼 길었다. 위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끝나자마자 부연 설명할 시간을 달라며 미리 준비한 자료를 읽어내려 갔다. 위원장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세 시간 동안 날선 얘기들을 쏟아냈다. 위원들도 학부모 처지라 그들의 하소연을 쉽게 물리치지 못했다.

자정이 넘어서야 가해, 피해학생 측 진술이 마무리됐다. 위원들도, 회의록을 작성하는 서기도, 회의를 진행하는 간사도 지쳐버렸다.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켜고, 연거푸 물을 들이키는 등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장 중요한 징계 양정을 앞두고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위원들 각자의 입장과 견해를 나누기는커녕 서로 쳐다보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다. 급기야 몇몇 위원들이 내일 아침 출근이 걱정된다면서 위원장에게 정회를 요구했다. 다음 날 다시 모여 결정하자는 얘기였다. 간사로서 강하게 반대했지만, 끝내 정회가 선포됐다.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정족수를 채웠는데, 과연 다시 그 수를 채울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이튿날 오후 다행히 6명의 위원들이 다시 모였다. 징계 양정만 하면 되는 자리였지만, 회의가 쉽게 진척되지 않았다. 피해학생 측의 중징계 요구에 수긍하면서도 선처해달라는 가해학생 측의 애타는 목소리가 위원들에게는 적잖은 부담이기 때문이다. 죄질에 따른 조견표(한눈에 알아보기 쉽도록 만든 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위원들 대부분이 학부모인 까닭에 전문성이 부족해 서로 눈치만 보기 일쑤다.

심지어 학부모로서 가해학생이든 피해학생이든 모두 내 자식 같아 도저히 결정을 못하겠다는 위원이 나왔고, 결국 위원 중 한 명이었던 경찰관의 생각과 주장이 대폭 수용된 채 구체적인 징계 처분이 정해졌다. 징계 양정만 다루는 속개된 회의였지만, 오후 7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자정을 넘긴 전날 회의 시간을 합치면, 무려 7시간의 마라톤 회의였던 셈이다. 서기가 작성한 회의록만도 A4용지 20장이었다.

학폭위가 끝난 후 교육청에 보고할 서류를 작성하고, 구체적인 결정 내용을 적은 징계 처분장과 재심 청구 안내장을 작성해 가해, 피해학생에게 등기우편으로 발송하고, 사건 진술서 등 개인정보가 담긴 회의 자료를 모아 파쇄하고, 회의록을 정리하니 또 그렇게 자정이 가까워졌다. 학폭위를 준비하고, 열고, 마무리한 열흘 동안 교과서 한 번 들춰보지 못했다. 학생부장이기에 앞서, 교사로서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다.

징계 내용 10년간 삭제 불가... '학폭위' 권한 막강하지만 허점 많아

지난 4월 6일 교육시민단체 대표들이 '징계사항 학생부 기록 지침'에 대해 인권위에 진정서를 내고 있다.
 지난 4월 6일 교육시민단체 대표들이 '징계사항 학생부 기록 지침'에 대해 인권위에 진정서를 내고 있다.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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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법상 학폭위에서 결정 난 징계 내용은 학교생활기록부에 그대로 기재되고 10년 동안 삭제가 불가하다. 그만큼 학폭위의 역할이 중요하고 권한이 막강하다는 것인데, 과문한 탓인지, 정작 학폭위는 그걸 감당할 역량이 못 된다. 학교마다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위원 구성 면에서 현저하게 전문성이 떨어진다.

학폭위 규정에 의하면 위원 수는 5~10명으로, 변호사, 의사, 경찰 등 전문직 위원과 학부모로 구성된다. 초기에는 위원 중 전문직이 다수였으나, 반드시 학폭위를 열어야 하는 사건이 늘어나는데도 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아, 그나마 '쉽게 모실 수 있는' 학부모들로 과반을 구성하도록 했다. 말하자면, 꼼수다. 하긴 아무런 보수도 없이 학교에 꼬박꼬박 나올 변호사와 의사가 과연 몇이나 될까.

곧, 학부모 위주로 구성된 학폭위에 사법적 전문성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기대대로 정족수라도 쉽게 채울 수 있게 됐을까.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좋은 일도 아닌데 아무리 시간이 많다고 한들 참석하는 마음이 가벼울 리 없다. 학년 초 학부모를 학폭위원으로 위촉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는 교사라면 다 안다.

학폭위에 어렵사리 참석한 위원들에게 서명부를 내밀면 하나같이 간사의 손을 부여잡고 간곡한 청을 한다. 학폭위원직을 제발 사퇴하게 해달라는 부탁이다. 적이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모르진 않지만, 다른 학부모를 새로 위촉하는 건 그보다 열 배는 더 힘들다는 걸 알기에 부디 도와주십사 되레 통사정 하게 된다.

더욱이 학폭위의 결정이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된다는 사실이 발표되고 나서부터는 위원들이 부담을 넘어 고통을 호소하며 힘들어한다. 가해학생도 내 아이 같고, 피해학생도 하나같은 내 자식 같은데 졸지에 재판관이 되어 벌주는 심정이 위원이기에 앞서 학부모로서 너무 괴롭다고 말한다. 다른 곳도 아닌 학교에서 굳이 이렇게 해야만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그런가 하면, 가해학생 측과 피해학생 측 사이에 브로커가 개입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일단 피해학생 측이 학폭위 개최를 요구하면 학교는 반드시 열어야 하고 징계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되는 허점을 노리는 것이다. 한두 번의 실수로 자녀가 학교생활기록부에 가해자로 주홍글씨처럼 낙인찍히게 될 판인데 돈이 문젠가.

학폭위가 학교폭력을 줄이는 데에 얼마나 보탬이 됐는지는 모르지만, 그 효과를 운운하기에 앞서 제도의 허점이 너무 많다. 당장 학폭위 개최 여부를 판단할 권한이 학교에도 주어져야 한다. 적어도 피해학생 측과 개최 여부를 사전 협의할 수 있는 권한이라도 있어야 남용의 폐해를 막을 수 있다. 그러자면, 학교가 학교폭력을 은폐하려든다는 뿌리 깊은 불신을 해소해야 함은 물론이다.

또, 학폭위원직을 유급화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학교마다 차이는 있지만, 교사들의 출장비(2~3만 원 정도)에 준하는 수당을 책정한 학교가 있는 반면, 교통비조차 지급하지 않은 학교도 더러 있다. 어차피 학교마다 설치되는 법적 기구라면, 책무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유급화는 필요하다고 본다.

어떻든 이러한 제도적 허점을 보완하자면, 실무를 맡고 있는 학생부장을 비롯한 일선 학교 교사들의 의견에 우선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교과부는 각 시도 교육청은 물론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조차 들으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있으니 걱정이 앞선다. 사달이 나봐야 그 심각성을 깨닫게 되려나.


태그:#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학생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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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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