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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종기와 사투를 벌이다> 겉표지
 <조선,종기와 사투를 벌이다> 겉표지
ⓒ 시대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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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말 왼쪽 광대뼈와 코 사이에 뭔가 나면서 붓기 시작하더니 이튿날에는 눈까지 부어올랐다. 벌레에 물렸나 싶어 곧 가라앉으려니 생각했는데 다음 날이 되니 더욱 부어올라 더 이상 두고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피부과를 갔더니 의학용어로 '표피낭종', 심각하지 않은 일종의 종양이라고 한다. 더 쉽게 말하면 종기인 셈이다.

심각하지 않다고는 했지만 병원치료를 하고 거의 한 달이 된 지금까지도 얼굴 가운데 붉은 멍울이 맺혀 있는 것을 보면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다. 생긴 부위가 얼굴인지라 특히나 신경이 쓰이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 종기. 그 종기에 관한 책이 나왔다. 한의사 방성혜가 쓴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이다.

종기가 별것 아니라는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종기와 사투를 벌인다는 책 제목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조선의 27명 왕들 중 12명이 종기로 고생했고, 그중에는 종기 때문에 죽은 왕들도 있었다니 비장할 수밖에. 그런데 종기로 죽을 수도 있다니, 이건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다. 흉터가 좀 남더라도 곪으면 짜고 약 바르면 낫는 것이 종기 아닌가. 더구나 온갖 좋은 약재는 다 쓸 수 있는 왕이 종기로 죽다니 이건 좀 충격적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과거 우리 민족을 가장 괴롭혔던 질병이 바로 종기였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 집집마다 고약은 상비약이기도 했다. 종기는 피부에만 나는 것도 아니었다. 피부에 생길 수도 있고, 오장육부의 내장에도 생길 수 있다. 림프선이 곪으면 림프절염이 되고, 관절에 고름이 차면 관절염이 되며, 뼈가 썩으면 골수염이 된다.

그리고 장부(臟腑, 오장육부)가 썩으면 암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하고도 대단한 병들을 단지 종기라고 불렀던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종기에 걸렸다'는 것은 마치 오늘날 '암에 걸렸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조선 의료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종기와 맞선 처절한 싸움의 역사였다고 말한다.

나라에서는 종기를 잘 치료하는 의사를 육성하고자 노력했고, 그의 의술이 사장되지 않도록 후학을 양성하고 문헌을 저술하는 데 힘을 쏟았으며, 때로는 종기를 전문으로 치료하는 관청을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종기 치료에 대한 국가적 노력이 실로 지극했던 것이다.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종기를 앓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2부는 종기를 치료한 이야기, 3부는 종기를 치료하고자 치열하게 살다 간 의사들에 관한 이야기, 4부는 종기 치료에 쓰인 도구와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은 한의학 전공자가 아니라도 이해하기 쉽고 재미나면서도 종기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유익하고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다.

화내지 마세요, 그러다 '종기' 생겨요

중종, 광해군, 숙종, 경종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화병으로 인한 종기를 앓았다는 점이다. 화병은 글자 그대로 심장에 화(火)가 쌓인 것이 풀리지 못해서 생기는데, 이렇게 화 때문에 생기는 병의 특징은 인체 상부에 생긴다고 한다. 물이 항상 아래로 흐르고 불은 항상 위로 타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화(火)가 종기를 일으키는 원리를 <동의보감>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화열(火熱)이 침범하면 끓어올라 빨리 돌다가 병의 기운을 만나게 되면 한곳에 몰려 체액이 끈적해져서 담(痰)과 음(飮)이 되는데, 이것이 혈맥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혈맥이 탁해져서 종기가 된다."(본문 77쪽)

중종이 앓았던 협옹(脅癰)은 옆구리 부위에 생긴 종기를 말한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협옹은 간(肝)과 심(心)에 화(火)가 성(盛)하여 생긴다고 한다. 죄 없는 조강지처를 쫓아내야 했던 슬픔, 반정공신들에 대한 분노, 끊임없이 세력다툼을 벌이는 훈구세력에 대한 울분, 사림세력에 대한 염증 등이 쌓여 중종에게 협옹이 생겼을 것이라고 저자는 추측한다.

숙종은 간농양을 앓았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간농양이란 간에 고름이 생긴 것을 말한다. 담석으로 담관이 막히면 담즙(쓸개즙)이 흐르지 못하게 되고 여기서 세균이 증식해 곪으면 간농양으로 이어지는데 한의학에서는 간옹(肝癰)이라고 하며, 용어 그대로 간(肝)에 생긴 화농성 종기(癰)라는 뜻이다.

숙종은 다혈질이고 급한 성정을 지녔는데 이러한 다혈질 성격은 간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간은 분노의 장부(臟腑)로, 다혈질인 사람은 분노가 잘 쌓이고, 분노가 쌓일수록 간이 병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불같은 숙종의 성정이 간을 병들게 만든 한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난치성 종기 '정창' 치료법, 어미돼지 똥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주인 빌 게이츠 재단이 가난한 국가에 적합한 화장실을 만들기 위해 '화장실 재발명 박람회'를 개최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중 눈길이 가는 화장실이 극초단파에너지를 사용해 배설물을 전기로 바꾸는 화장실이었다. 한마디로 똥이 전기로 탈바꿈하는 순간 아닌가.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똥이 전기가 아니라 약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인간에게 유익한 미생물을 먹을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하는 프로바이오틱스의 일종인데, 건강한 사람이나 갓난아이의 대변 혹은 건강한 가축의 분변을 받아 물에 희석하여 찌꺼기는 걸러내고 맑은 액만 받아 치료에 이용했다는 것이다.

변을 약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은 여러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중에는 세종 때 편찬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도 있다. <향약집성방>에는 피부 표면으로 보이는 면적은 좁은데 그 뿌리가 깊숙이 박혀 있어 치료하기가 무척 어려운 정창이라는 난치성 종기에 대해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정창의 뿌리가 복부까지 퍼지려고 할 때에는 어미돼지의 분변을 물과 섞어 즙을 짜낸 후 1-2홉을 복용하면 낫는다."(본문 329쪽)

즉 정창의 독기가 장부에 위치한 복부까지 퍼지는 위급한 상황에는 돼지 변을 물과 섞어 즙을 내어 복용하라는 것이다. 변을 이용한 이 치료법에 대한 기록이 조선 초기부터 중기, 말기의 한의학 문헌에 고루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변 여과액이 위급한 상황의 응급 소염 항생제로서 실제로 효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골든타임>의 최인혁이 조선시대에도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의학드라마 <골든타임>에 많은 사람들이 씁쓸한 공감을 표현하고 있다.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를 서로 자기 과가 아니라며 미루던 의사들이 높으신 분의 전화 한통에 180도 돌변하고, 의식 불명의 환자를 뒤로 하고 나오면서 "얼굴 도장 찍었으니 포커나 한 판 하자"며 농지거리를 한다.

의사라는 직업에서 사람의 목숨을 살린다는 사명감은 볼 수 없고, 돈벌이와 출세의 도구로 삼는 장사꾼의 모습만이 보이는 오늘날 의학계에서 인간적이면서 참다운 의료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최인혁은 별종이다. 그런데 이런 최인혁과 같은 인물이 조선시대에도 있었으니, 조광일이다.

'침술의 숨은 달인'이라는 의미의 '침은(鍼隱)'이라는 호에서 알 수 있듯이 조광일은 종기를 침으로 치료하는 기술이 뛰어났는데 조광일 역시 최인혁처럼 보통 의사들과는 정반대 행보를 보였다. 지위가 높은 벼슬아치의 집에는 아예 발을 디디지 않았고, 고관 현작(高官顯爵)들의 왕진 요청에는 응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돈 없고 힘없는 백성들의 병만 치료했다고 한다. 이유는 권세 있는 집에는 굳이 자신이 아니어도 가려는 의원들이 많을 것이므로, 자신은 오직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만 치료하겠다는 것이다. 요즘 현실에서 조광일이나 최인혁 같은 의사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이겠으나, 누구나 바라는 것이 또한 이런 의사들에게 진료받는 것 아니겠는가.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을 중심으로 각종 의학서와 문헌들을 통해 우리 역사 속에 자리한 종기를 살펴보고 있다. 종기가 생기면 오염된 세포를 파괴하고 그곳에 새로운 세포가 재생되도록 해야 하는 것, 이른바 파괴와 재건이 가장 기본적이면서 근본적인 치료법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치료법이 통하지 않아 때로 왕조의 역사가 흔들리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마찬가지 아닐까. 살다보면 여기저기서 종기처럼 사회를 어지럽히는 일들이 생겨난다. 조금 붓다가 곧 가라앉는 것이 있는가 하면 곪을 대로 곪아서 손쓰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일도 있다.

훌륭한 치종의(治腫醫)가 곪고 썩은 뼈와 살을 도려내어 종기를 치료하듯이, 곪고 썩은 세상의 종기를 치료할 능력 있고 훌륭한 우리나라의 치종의를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 방성혜 씀, 시대의창 펴냄, 2012년 7월, 1만5000원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 - 조선의 역사를 만든 병, 균, 약

방성혜 지음, 시대의창(2012)


태그:#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 #방성혜, #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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