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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소방재난본부에 비치된 소화기. 1988년 9월 19일 충전된 이 소화기는 5년 후인 1993년 9월 18일까지 정밀검사를 받아야 하지만 정밀검사를 받았다는 내용이 없다.
 서울소방재난본부에 비치된 소화기. 1988년 9월 19일 충전된 이 소화기는 5년 후인 1993년 9월 18일까지 정밀검사를 받아야 하지만 정밀검사를 받았다는 내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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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났다. 침착한 당신은 허둥대지 않고 소화기 안전핀을 뽑았다. 불길을 향해 호스를 곧게 펴고 손잡이를 움켜쥔다. 그런데 소화기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어라, 보온병을 잘못 집어 들었나?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소화기가 분명하다. 불길은 크게 번져가는데 소화기는 당신의 애만 태운다.

이런 상황은 요즘 유행하는 '멘붕'(멘탈 붕괴)이란 정체 불명의 말로도 나타낼 수 없다. '억붕'(억장 붕괴)이란 표현을 써야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런 억장 무너질 일이 단순한 불운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지난 3일 <오마이뉴스> 취재팀이 하루 동안 직접 살펴본 소화기 점검 상태는 우려할만한 수준이었다.

대구 지하철 참사 잊었나?

3일 지하철 4호선 전동차 안에서 만난 소화기 상당수는 현재 생산이 중단된 가압식 소화기였다.
 3일 지하철 4호선 전동차 안에서 만난 소화기 상당수는 현재 생산이 중단된 가압식 소화기였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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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192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이후 지하철 소방 시설을 확충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달았다. 9년이 지난 지금 서울의 지하철은 어떨까? 지하철 역사는 각 역마다 편차가 컸지만 소화기 상태가 불량인 경우가 상당했다. ㅁ역의 경우 소화기 압력계가 모두 정상 범위 내였다. 하지만 ㅅ역의 경우 압력 정상범위를 한참이나 벗어난 소화기가 상당수 눈에 띄었다.

ㄱ역의 경우 3개 중 1개, ㄷ역의 경우 4개 중 1개 비율로 적정 압력을 초과하거나 미달한 소화기를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소화기들은 소화약제가 나오지 않거나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양이 쏟아져 제대로 된 역할을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소화기들도 매달 안전검사를 통과했다.

전동차 내부는 더 심각했다. 생산이 중단된 낡은 가압식 소화기가 하루 평균 680만여 명이 이용하는 지하철의 소방을 책임지고 있었다. 무작위로 탄 4호선 전동차 10량에 비치된 소화기 20개가 가압식 소화기였다. 도색만 덧씌운 낡은 소화기의 경우 하부는 녹이 슬어 있었다.

노후 소화기의 경우 부속품이 손상되거나 소화약제가 변질돼 정작 중요한 순간에 무용지물이 될 위험이 크다는 게 전문가의 분석이다. 실제로 2001년 울산에서 소방훈련 도중 낡은 가압식 소화기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면서 한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또 다른 1호선 전동차의 경우 20개의 소화기 중 17개가 가입식 소화기로 채워져 있었고 비치된 축압식 소화기에서도 압력 이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객차도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가압식 소화기가 많이 비치되어 있었다. 낡은 소화기를 살펴보고 있던 기자에게 한 노인은 "대구 지하철 사고를 벌써 잊었는가보다"며 먼저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이런 노후·점검 불량 소화기에 대해 서울메트로 안전방재처 관계자는 "이상이 있는 것은 바로바로 정비한다"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직접 확인을 요구하자 "점검하는 분들이 제대로 할 것이라 믿는다"며 홍보실로 전화를 돌렸다. 서울메트로 홍보실은 "전체 전동차의 60%에 축압식 소화기가 설치되어 있고 노후 전동차에 설치된 가압식 소화기도 문제가 생기면 바꿀 계획"이라고 밝혔다.

소방청·소방본부 건물 소화기도 나 몰라라

3일 소방방재청 사무실에 놓인 소화기는 열어놓은 문을 고정하는 고임목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압력계는 정상 압력을 한참이나 벗어났고 안전핀마저 뽑혀 있다.
 3일 소방방재청 사무실에 놓인 소화기는 열어놓은 문을 고정하는 고임목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압력계는 정상 압력을 한참이나 벗어났고 안전핀마저 뽑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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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소방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소방방재청(소방청) 또한 소화기 보관 상태는 일반 건물과 다를 바 없었다. 소방청이 입주한 서울 종로구의 한 빌딩. 소방청장 집무실 앞에 놓인 소화기는 소방청이 권장한 연한인 8년도 훨씬 넘은 2001년 3월에 생산된 제품이었다. 물론 권장연한 준수는 자율적이지만 소관부서마저 만일의 사고에 대해 안일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건 문제일 수있다.

소화기를 비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후하고 불량한 소화기는 제때 정비와 점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소방청 소방산업과 관계자는 "녹색범위(정상)를 벗어난 압력계는 점검받아야 하는데 그런 소화기가 비치되어 있으면 소방시설의 유지관리를 안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이 관계자의 말에 딱 들어맞는 불량 소화기는 소방청 사무실 문을 고정시키는 데 쓰이고 있었다.

소방법을 담당하는 소방제도과가 있는 층의 소화기도 압력계에 이상이 있었다. 소방제도과 관계자는 "건물 관리는 빌딩 운영 업체에서 하고 소방청은 입주만 해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직접 청사를 관리하고 있는 서울소방재난본부(소방본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복도에 설치된 21개의 소화기를 확인한 결과 4개의 소화기가 압력계에 이상이 있었다. 5개 중 1개꼴이다. 그나마 멀쩡한 것도 내구연한을 일찌감치 넘겼다. 서울올림픽이 있던 1988년에 생산된 소화기가 2012년 런던올림픽까지 소방본부를 지키고 있는 셈이었다. 소방본부 관계자는 4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경리팀이 청사관리를 하면서 청사관리는 용역을 준다"며 "문제가 된 소화기는 즉시 교체하겠다"고 약속했다.

"허울이 좋아 자율이지 사실상 방치"

이런 소화기 점검 실태에 전문가는 우려를 나타냈다. 이창우 교수(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는 "상태가 불량한 가압식 소화기의 경우 분사가 안 된다고 봐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실제로 2000년 방재시험연구원이 가압식 소화기를 대상으로 실시한 '방화제품 경년변화 성능시험 연구'에서 10년 이상된 소화기 중 50% 이상이 성능 불량으로 나타났다. 5년 이상 10년 미만 제품들도 불량률이 42%에 달했다.

이 교수는 "안전 담당자가 교체하고 싶어도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교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며 "소화기 내구연한을 법으로 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방청은 2010년 공청회 등을 거쳐 일괄적으로 기준을 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소화기 내구연한을 강제하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한순간의 화재가 대형 사고로 이어지는 시대에 "허울이 좋아 자율이지 사실상 방치한 것"이라는 한 전문가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태그:#소화기, #서울소방재난본부, #소방방재청, #지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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