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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초록의 꽃은 수수하다, 덩굴식물 송악의 꽃을 닮았다.
▲ 담쟁이덩굴의 꽃 작은 초록의 꽃은 수수하다, 덩굴식물 송악의 꽃을 닮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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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덩굴은 절망의 벽을 소리없이 기어올라 마침내 절망의 벽을 덮는다고 한다. 다분히 시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가뭄에 뜨거운 벽을 기어올라 벽에 붙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고난의 상징일런지도 모른다.

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다. 그 벽의 이름은 어떤 이름이라도 좋다. 그 벽을 보이지 않게 기어올라가 마침내는 초록의 잎으로 덮어버리고, 덩굴줄기로 감싼다.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 오랜 가뭄이 이어진 날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을 바라보다 꽃을 발견했다. 한 번 보이기 시작하니 여기저기 꽃이 보인다. 꽃을 보고 나니 가을에 포도송이처럼 익어가는 열매가 떠오른다.

담쟁이덩굴에도 열매가 있는데 꽃이 있다는 사실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 담쟁이덩굴의 꽃 담쟁이덩굴에도 열매가 있는데 꽃이 있다는 사실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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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그들은 흔한 꽃이 아니다. 많은 색깔의 꽃이 있지만 초록색 꽃은 그리 많지 않다. 아주 작은 꽃, 이미 열매인 듯한 작은 꽃봉오리가 열리면 꽃잎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딱딱한 꽃잎이 벌어지고, 그 속에 숨겨주었던 꽃술을 내어놓는다.

화사하지는 않다. 그러나 작고 화사하지 못해도 그들은 꽃이고, 꽃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것이다. 이미 넉넉하다. 그런 마음이었기에 척박한 벽을 마다하지 않고 기어올라 마침내 그 벽을 온전히 감싸 안을 수 있을 것이다.

작지만 갖출 것은 모두 갖추고 피어났다.
▲ 담쟁이덩굴의 꽃 작지만 갖출 것은 모두 갖추고 피어났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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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이파리가 제법 크기에 그 이파리에 가려진 꽃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보이지 않아도 묵묵하게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 우리네 삶도 그렇게 묵묵하게 피어내면 될 일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한다.

덩굴식물. 아무리 높게 올라가도 흙 속에 뿌리를 내린 뿌리와 소통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내가 근무하던 사무실엔 몇 년이 되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 담쟁이덩굴이 자라고 있었다. 여름이면 담쟁이덩굴이 무성해서 더위도 막아주고, 비도 막아주고, 강인한 덩굴은 건물의 균열도 막아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해, 누군가 담쟁이덩굴 밑둥을 잘라버렸다. 뿌리를 잃어버린 담쟁이덩굴은 보기 흉하게 벽에 붙어 누렇게 말라갔다.

담쟁이덩굴의 꽃은 옹기종기 모여 피어있다.
▲ 담쟁이덩굴 담쟁이덩굴의 꽃은 옹기종기 모여 피어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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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떼어내는 데 들은 비용은 뒤로하고라도, 그렇게 초록생명을 함부로 대한 사람에 대한 야속함이 오랫동안 마음 한 켠에 있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자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그 잘린 덩굴에서 다시 새순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다시 건물을 감싸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절망이란 없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붙여준 벽의 이름이 '절망의 벽'이었다. 그 절망의 벽을 온전히 다 덮어버리고야 말겠다는 담쟁이덩굴의 다짐을 보는 듯했다.

척박한 곳을 기어오르다보면 말라죽는 일도 있지만, 그래도 기어오른다.
▲ 담쟁이덩굴의 꽃 척박한 곳을 기어오르다보면 말라죽는 일도 있지만, 그래도 기어오른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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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또다른 나의 모습이다. 그들을 통해서 삶의 지혜를 얻고, 그들을 통해 용기를 얻는다. 무엇보다도 고마운 것은 그것을 넘어 자신의 생명 혹은 열매를 줌으로 인간의 생명을 존속하게 한다. 자연은 이렇게 자기를 내어주는 데 인색하지 않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니 그렇게 살아야 정상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자연성을 상실했으며, 자연성을 상실한 인간은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간다. 그 결과는 다른 자연의 황폐함뿐 아니라,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것을 인식하는 이들 조차도 걸어온 길을 포기하지 못한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죽음의 행렬,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

절망의 벽, 소리없이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지금 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벽에 기대어 목말라하는 그들의 온 몸을 흠뻑 적셔줄 비, 그 비가 어서 내렸으면 좋겠다.


태그:#담쟁이덩굴, #절망, #작은 것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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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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