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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흙이 보이기 시작한다. 검은색과 핏빛이 뒤섞인 흙들이 근 10년만의 귀향을 따뜻하게 환영하고 있다. 그 흙이 나타나고 얼마 지나지않아 30분 이내에 내가 태어나고 열 살까지 살았던 두메산골 전라남도 영광군 군남면 용암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엄마의 뿌리를 보여줄 요량으로 다섯살 난 큰아이를 데리고 무작정 고향을 찾은 것이 9년 전이었다. 아이는 귀가 먹은 듯이 적막하고 특별할 것 없는 시골이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난 자식에게 어미의 요람을 꼭 보여 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이번엔 그 큰 아이는 물론 둘째, 셋째 아이까지 데리고 왔다. 아버지, 어머니 묘를 만들러.

"인자 나 죽어서나 가제. 은제 느그들이 가겄냐. 에미 에비가 죽어서 살 집 맹드는 거신게 꼭 와야쓴다."

평소에 우리집에 전화 거는 일이 없던 팔순의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너무 놀라서 인사대신 "무슨 일이세요? 아버지!"라고 물었다. 4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윤달은 5월 20일까지였다. 그 윤달 마지막날 20일, 부모님과 사촌 부모님 네 분이 5대조부터 모셔진 곳에 가묘를 만들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자식들이 오길 얼마나 바라셨으면 아버지가 직접 전화하셨을까 싶어 "꼭 와야쓴다이"를 반복하실 때마다 아버지가 보지 못하는데도 고개를 끄덕이며 "예, 예"라고 했다.

"자석들한티 손 벌릴라믄 애시당초 생각도 말라했제. 다 살기 바쁜디... 니 아부지가 다 내기로 했응게 몸만 오믄 되야."

출가외인이라지만 조금 보태고 싶어 돈 얘기를 꺼내자 엄마가 손사래를 치며 하신 말씀이다. 임대 아파트라도 당첨되면 쓰려고 그동안 모아왔던 청약저축을 깨서 이번에 두 분 묘를 만드신단다. 평생 집 한 채 장만하지 못한 부모님은 결국 죽어서 쉴 집에 그 돈을 쓰기로 하신 모양이다. 묘를 만든다고 할 때부터 "돌아가시긴 누가 돌아가신다고 그러세요?"라고 소리라도 질렀다. 언젠가는, 기필코 다가올 그 순간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런 돈으로 묘를 만든다니 아예 입을 뻥긋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심경이었다.

할아버지 라면 '오도독' 몰래 먹던 나

내가 혼자 놀다가 깜박 잠도 잤던 나무그늘에서 내 아이들이 쉰다. 옛날보다 납작 돌들이 많아져 누군가 돌탑까지 만들어놨다.
▲ 옛날 어린아이였던 엄마가 놀던 곳 내가 혼자 놀다가 깜박 잠도 잤던 나무그늘에서 내 아이들이 쉰다. 옛날보다 납작 돌들이 많아져 누군가 돌탑까지 만들어놨다.
ⓒ 한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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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 집안으로 동네에서 처음으로 기와 얹고 위세를 자랑하던 큰 댁에 사촌들까지 30명이 넘게 모여든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여생을 마치고 유복자 아들마저 출가시킨 후 큰 어머니 혼자 살 동안 큰 댁 기와와 벽, 흙담은 그 세월만큼 낡아있다. 그나마 올해 2월 큰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면서 이제는 빈 집이 돼 있다. 빈 집이 사람들로 꽉 차고 음식 냄새가 진동한다. 오랜만에 부모세대와 자식세대가 모인 날이라 우리들 어릴 적 얘기가 끝도 없다.

"할아부지 점심으로 저것들이 라면을 끓여줬지. 라면을 남기고 할아부지 끓이주고는 저그 둘이 토방 밑이서 라면을 먹은 거시제. 할아버지가 나종에 그러는 거여. 오도독 오도독 소리가 나서 '느그들 시방 뭐 묵냐'하면 '암것도 아묵어라우' 그런다고. 오도독 오도독 소리가 요란헌디 말여."

어른들이 밭일을 나간 사이 눈이 어두운 할아버지의 라면 점심을 책임지곤 했던 사촌동생과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6살, 7살 사촌자매가 사이좋게 기어들어가 한껏 만족한 얼굴로 생라면을 먹던 그 마루 밑은 지금보면 어떻게 기어서 들어갔을까 싶을 정도로 한없이 낮고 좁다. 라면만 먹은 것이 아니라 그 아래서 할아버지가 버린 담배꽁초를 피워보기도 한 것은 사촌동생과 나만 아는 비밀이다.

가묘를 만드는 곳은 멀리 저수지를 앞에 두고 삼면이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이른바 '배산임수' 명당자리다. 옛날 우리집 밭이기도 하다. 시아버지의 위세에 눌려 9년 동안 혹독한 시집살이를 겪던 엄마는 무서운 시아버지와 몇 번의 대결 끝에 이 밭과 몇 마지기 논을 겨우 얻어 시집살이를 벗어났다고 했다. 그래봐야 3분거리 초가집으로 분가하는 것이었지만...

어린 나는 농사일을 거들지도 못하면서 어떻게든 엄마 옆에 있으려고 논밭을 부지런히 따라다녔다. 서른을 겨우 넘긴 젊은 엄마가 이 밭에서 허연 수건을 둘러쓰고 밭고랑에 엎드려 일할 때 초등학교도 안 간 나는 밭 옆에 있는 나무 그늘 아래서 엄마를 기다리곤 했다. 그 그늘은 작은 나무 여러 그루가 머리를 맞대고 있는데다가 바닥에 맨들맨들한 돌들이 깔려있어 쉴 곳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엄마랑 점심을 나눠먹고 그늘에서 놀다가 어느 결에 나는 돌에 얼굴을 붙이고 잠이 든다. 서늘한 바람결에 선잠이 퍼뜩 깨 엄마를 찾아보면 푸른 감자잎이 무성한 밭고랑에 엄마의 굽은 등이 절반만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이제 당신 집잉게 당신 맘대로제"

큰아버지 부부, 합장묘로 만든 둘째 큰아버지 부부, 맨 끝에 아버지 어머니묘다. 생전에 살뜰한 삼형제는 아니었지만 돌아가셔서는 같은 곳에 쉬고 싶으셨나 보다.
▲ 언젠가 나란히 쉴 삼형제 부부 큰아버지 부부, 합장묘로 만든 둘째 큰아버지 부부, 맨 끝에 아버지 어머니묘다. 생전에 살뜰한 삼형제는 아니었지만 돌아가셔서는 같은 곳에 쉬고 싶으셨나 보다.
ⓒ 한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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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한 줄기 없는 5월의 뙤약볕 아래서 오빠들은 옛날의 엄마처럼 쉬지 않고 일한다. 살아계실 때 가묘를 만드는 효를 행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부모님 묘를 만드는 일이 즐겁지 만은 않을 터다. 혹시 뗏장이 벗겨질라 빈틈을 꼼꼼히 메우고 동그랗게 예쁜 봉분 모양 만드느라 오빠들의 손과 발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아버지는 당신이 들어갈 묘에 직접 뗏장을 얹고 거동이 불편한 엄마는 큰 댁에 있으시라 해도 "봐야제"라며 묘지 옆을 지킨다. 아버지는 당신의 묘라서인지 유독 고집을 내세우신다. 뗏장은 겹쳐놓는 것이 아니라는 주위의 만류를 듣지 않고 "알도 못험시롱"이라며 뗏장을 꼼꼼히 겹쳐 놓는다. 사촌들 중 맏이격인 큰 댁 오빠가 한마디 하신다.

"하고 잡픈디로 하게 두시오. 당신 집잉게 당신 맘대로제."
"그라제!"

누군가 맞장구친다. 하하하! 포크레인 소음만 가득하던 들판에 한바탕 웃음이 번진다. 안타깝고 가슴 아픈 죽음보다는 애잔하면서도 가슴 따뜻해지는 죽음이면 좋겠다 싶다.  부모님을 묘지에 안장하는 미래의 그날, 아버지의 "알도 못험시롱"이 떠올라 눈물을 매단 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올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엄마는 50년을 같이 살면서 많이 어그러졌다. 자식들 키우는 동안은 앞날 준비에 바빠 두 분이 같은 방향을 바라봤지만, 우리들이 장성하자 두 분 사이는 급격하게 벌어졌다. 무언가 몰두할 것이 필요했는지 아버지는 잠시 한 눈을 팔았고, 엄마는 그때부터 "니 애비"라는 말로 아버지 이름을 대신했다. 아버지와 엄마의 갈등이 너무 깊어 자식들이 이혼을 권할 정도가 됐다. 그런데 엄마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똥밭에 궁구러도 서방 그늘 밑이 나슨 뱁이제."

젊은 나는 그런 엄마에게 적잖이 실망해 '엄마처럼 살지 않을거야'라는 문구를 가슴에 새겼던 기억이 있다. 엄마에게 아버지 옆에 묻히게 돼서 행복하신지 묻는다.

"갈 디가 업슨게 허기는 헌다만, 합장은 절대 안허제."

즉답은 피한다. 합장을 거부하는 것으로 그나마 엄마의 자존심을 지키신 듯. 엄마 세대의 가치관으로써는 갖은 풍파를 이겨내고 이 집안 선산에 묻히는 것이 최대 영예이기도 한 모양이다. "부잣집 메느리라서 죽어서 살 집도 맨들고 참말 부럽소이"라는 동네분들 말에 엄마가 "글지라우. 내가 부잣집 막내 메느리 아녀라우"라고 응수하시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인자 느그들 큰 일은 읍다. 상 치를라믄 뫼똥 맨드는 것이 질 큰 일인디. 갖다 묻기만 허믄 된게."

가묘를 짓고... 나도 향할 곳을 정했다

아이들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묘 젯상에 자신의 이름까지 새겨진 것이 좋은 모양이다. 아빠 이름도 확인하고 틀린 글자 없나 보고, 또 보고...
▲ 내 이름 어딨나 아이들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묘 젯상에 자신의 이름까지 새겨진 것이 좋은 모양이다. 아빠 이름도 확인하고 틀린 글자 없나 보고, 또 보고...
ⓒ 한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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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자식들 못지않게 손발을 놀리시던 아버지가 고목처럼 마른 얼굴로 웃는다. 뒤늦게 가묘 만드는 일이 자식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부모의 내리사랑은 죽음 이후에도 이어진다. 세 아들과 며느리, 손주들은 물론 출가외인 딸과 사위, 외손주 이름까지 새겨진 비석을 가운데 세우고 쌍둥이 묘가 만들어진다. 묘 주위에 뗏장을 덮어 폭신한 잔디밭도 만든다. 천방지축 내 아이들이 뗏장을 지근지근 밟으며 비석에 새겨진 자기 이름을 여러 번 확인한다. 

아이들은 오늘의 풍경을 어떻게 기억할까. 더웠던 기억, 운동화가 흙투성이가 됐던 기억, 둥그런 묘 속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어떻게 집어넣나 궁금했던 기억들이겠지. 어쩌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러 올 때 묘 주위에서 토끼풀을 뜯어 반지를 만들었던 기억을 생각해내며 거기 서 있던 외조부모를 같이 떠올려주면 내가 굳이 아이들을 끌고 온 보람이 있을 듯하다.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노루를 만난다. 다음 날 아이들 등교와 출근이 걱정돼 운전속도를 올리던 오빠는 뛰어든 노루를 피할 틈이 없다. 졸고 있던 나와 아이들은 차가 크게 흔들리며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나자 비명을 질러댄다. 뒤따르는 차들 때문에 노루를 치고서도 차를 멈출 수가 없다. 가까운 휴게소에 가서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차를 살펴볼 뿐이다.

아이들은 아직 노루가 살아있을 지 모른다며 119 아저씨한테 전화하자고 졸라댄다. 시속 100km 이상 속력을 내고 있던 차에 치인 그 노루가 살았을 리가 없다. 급사하지 않았다하더라도 뒤따라오는 차에 또... 애달픈 마음으로 부모의 죽음을 준비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급히 일상생활로 돌아가던 우리들은 죽인 노루를 묻어주기는 커녕 고속도로에 버려두고 오게 됐다. 필연적일 부모의 죽음과 노루의 비명횡사가 뒤엉켜 서울에 와서도 며칠동안 마음은 고향 골목길을 헤맸다.

언젠가 정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쉴 곳이 필요한 날이면 뗏장이 곱게 입혀진 동그란 부모님 묘 옆에서 잠시 쉬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죽으면 바다에 뿌려지길 원했던 마음을 바꾼다. 내 아이들이 가끔 고단할 때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가 다시 힘을 내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나무 밑에 내 재를 뿌려달라고 해야겠다. 남은 사람들을 묵묵히 위로하는 죽음이 될 수 있게...


태그:#부모님, #가묘, #윤달, #노루, #내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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