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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로의 초점>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타네 데이코는 이번 가을에 선을 보고 우하라 겐이치와 결혼했다."
 
스물여섯 살 데이코가 열 살 연상인 겐이치와 결혼한 해는 1958년, 그러니까 미군(美軍)에 의한 일본 통치시기(미군정기 : 1945~1952년)가 끝나고 6년이 지난 시점이자, 일본이 '한국전쟁 특수'로 패전국에서 벗어나고, 고도 경제성장의 기초를 다지던 시기다.

 

남편인 우하라는 도쿄의 광고대리업계에서 꽤 알아주는 A광고회사 호쿠리쿠 지점장으로 능력 있고, 장래성 있는 남자다. 우하라는 결혼과 동시에 도쿄로 발령을 받아 신혼살림을 도쿄에서 차릴 예정이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우하라는 호쿠리쿠 지점의 업무를 정리하고, 후임자에서 인계하기 위해 북쪽 지방인 호쿠리쿠 행(行) 열차에 오른다.

 

그리고 얼마 뒤 데이코가 호쿠리쿠 행 열차를 탄다. 사라진 남편을 찾기 위해서다. 이틀 후면 도쿄로 돌아가겠다고 엽서까지 보낸 남편은, 무슨 일인지 돌아오지 않았다. 연락도 없다. 회사에서도 남편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남편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60여 년 전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워

 

이 작품은 2009년 마쓰모토 세이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이누이 잇신 감독에 의해 <제로 포커스>(Zero Focus)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될 정도로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인 마쓰모토 세이초(松本凊張)의 대표작 중 하나다.

 

사회파 미스터리란, 트릭이나 범죄 자체에 매달리기보다는 범죄의 동기와 배경을 드러내 인간과 사회간의 갈등을 묘파하는 일련의 작품을 통칭하는 말로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들이 그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제로의 초점> 역시 범인이 누군가 하는 데에 주목하기 보다는, 한 남자의 실종과 숨겨진 과거, 주변 인물들의 잇따른 죽음을 통해 패전과 미군정기가 일본사회에 남긴 시대적 상흔(傷痕)을 그려내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의 서사(敍事·narrative)의 속도감은 60여 년 전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그만큼 문장이, 군살 하나 없는 경량급 복서의 풋워크 마냥 가볍고 날쌔다. 어떤 배경 묘사 없이 첫 문장부터 데이코와 겐이치의 결혼을 언급하며 독자를 단번에 이야기의 한가운데로 이끈다. 그리고는 이야기의 끝을 향해 폭주하듯 내달린다.

 

뿐만 아니라 작품 속 등장인물에 대한 묘사를 복선(伏線)과 반전(反轉)의 계기로 사용한 것도 그렇고, 일본 북쪽지방의 음울한 날씨와 자연환경을 통해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설정한 것도 무척 근사하다. 1950년대 후반에 이 정도 수준의 대중소설이 나왔다는 게 놀랍다.

 

그렇다고 이 작품에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데이코가 예정에 없던 무로타 사장의 도쿄 출장 관련 사실을 '우연히' 엿듣게 된다든지, '우연히' 보게 된 TV 좌담 프로그램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추론을 생각해 내거나, 무로타 부부를 만나러 가는 후반부에서 아직 풀 수 없던 트릭을 택시 안에서 '우연히' 듣게 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해결하는 등 주요 사건의 전개와 전환이 '우연'에 기대고 있는 탓에 플롯의 농도가 전체적으로 묽게 느껴진다.

 

또한 앞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개요와 살해방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용의자를 뒤쫓아 가서는 같은 방식으로 살해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억지스럽다. 덧붙여 반전(反轉)의 효과를 위해서였을 테지만, 한 인물을 지나치게 완벽한 사람으로 묘사함으로써 오히려 숨겨진 범인이 보다 일찍 눈에 띄기도 한다.

 

말하자면, 2012년 지금의 기준으로 봐서는 추리물(物)로서 완성도가 다소 떨어진다는 느낌이랄까.

 

'불편한 진실'을 향해 떠나는 음울한 여행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일본의 미군정기 이후, 미군에 의한 일본 통치에서 비롯된 사회 병리현상을 다루고 있다. 세이초는 남편을 찾아 낮선 북쪽지방을 헤매는 데이코의 행로를 통해 그 시대, 일본이 몰랐던, 어쩌면 감추고자 했던 "불편한 진실"을 들춘다.

 

이처럼 세이초는, 당시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지, 오구리 무시타로와 같은 일본 미스터리 문학의 거장들이 현실로부터 격리되거나, 밀폐된 공간에서의 수수께끼, 밀실 트릭 등을 다뤘던데 반해 대담한 필력으로 미스터리를 현실사회, 역사문제로까지 확장시켰다.

 

때문에 1950년대 후반 세이초의 <제로의 초점>이 발표됐을 때, 세이초의 단편 <일 년 반만 기다려>를 두고 미야베 미유키가 한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이 작품을 접한 많은 독자들이 온 일본에서 '아!'라는 탄성을 올렸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트집 잡힐 몇몇 결점에도 불구하고, <제로의 초점>이 여전히 미스터리 걸작으로 사람들에게 읽히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제로의 초점>(마쓰모토 세이초 씀 | 양억관 옮김 | 이상북스 | 2011.11 | 1만3000원)
이 글은 미디어 여주(www.yeoju.me)에 실린 바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쓴 글에 한 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제로의 초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양억관 옮김, 이상북스(2011)


태그:#마쓰모토 세이초, #사회파 미스터리, #사회파 추리소설, #미야베 미유키, #이누이 잇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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