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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쉽게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은밀한 이야기' 하나씩은 가슴에 담고 살고 있습니다. 부부사이에도 차마 말 하지 못했던 이야기, 직장상사는 죽어다 깨나도 모를 부하직원의 못다한 이야기, 그때 일을 생각하면 '피식' 웃음부터 나오는 나만의 이야기 등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그 '은밀함'을 과감히 밝힌 이들이 있습니다. 그동안 '은밀'했지만, 이제 더이상 '은밀할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편집자말>

우린 신혼이잖아!

 

"한 잔만 더 하고 가지."

"이해해라. 난 신혼이잖아. 이제 들어가 봐야지."

 

이건, 남편이 요즘 부쩍 친해진 같은 아파트 동갑내기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되도록 일찍 귀가하기 위해 자주 써먹는다는 '신혼생활 자랑하기' 핑계법이다.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돼서 들어온 남편에게 어떻게 일찍 왔냐고 물으니 "난 신혼이라고 자랑 좀 했지, 나 잘했지?"라며 애교 섞인 웃음을 짓는다.

 

술 냄새를 풍기며 뽀뽀를 해대도 전혀 밉살스럽지가 않다. 저녁엔 가만가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루 동안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하는데 이때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하다. 대화를 되도록 많이 하며 살기 위해 텔레비전도 집에 놓지 않은 우리 부부. 주변에서는 이런 남편과 나의 애정 표현이 실로 별나다고들 얘기하는데,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종종 겨울 추위 배경 삼아 남편과 둘이 손 꼭 잡고 아파트단지를 산책한다. 추워서 집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보다 나가서 조금이라도 걷는 게 낫겠다 싶어서다. 그러던 어느 날 베란다 창문을 통해 내다보던 남편 친구의 아내가 우리를 봤다. 그 이후부터 그 분은 가끔 '손 꼭 잡고 다정히 걸어가던 우리 부부' 이야기를 했다.

 

부러움 섞인 말투로, 자기 남편이 들으라는 식으로, 말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민망했던 나는 남편의 손을 슬그머니 놓은 적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내 손을 다시 꽉 잡고 "우리 신혼이잖아요"라며 웃었다. 그러고 나서 집에 들어오면 우린 두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우린 평생 신혼일 거지"라고 얘기하며 깔깔대고 웃었더랬다.

 

반짝반짝 빛나듯이 별나며, 겨울 솜이불보다 더 두터운 애정을 지닌 우리 부부는 결혼한  지 8개월 차 된 풋내기 부부다. 친구 소개로 만나 6개월 만에 결혼을 하게 됐다. 운명을 만났다고 여겨질 만큼 서로 이끌렸다. 하얀 솜이 물을 빨아들여 순식간에 무거워지듯 그렇게 사랑을 키운 우리는 짧은 연애기간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결심했다. 짧은 연애 끝에 성사된 결혼인지라 예상했던 만큼 주변의 우려와 의심은 컸다. 게다가 26살이던 내 친구들은 34살이던 남편의 친구들보다 더했다.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해?"

"너… 혹시 속도위반이야?"

"연애를 그렇게 짧게 해 놓고 벌써 결혼이야?"

 

뭐 이런 예상할 만한 반응들에 내 답은 간결했다.

 

"너도 얼른 결혼해. 좋을 걸?"

"기대했겠지만 속도위반은 아니야."

"너도 연애 오래하지 말고 얼른 결혼해."

 

예상 질문이었지만 사실, 축하한다는 말보다 앞선 엇나간 의심과 우려에 마음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우려와 달리 우리 부부는 지금 남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중이다. 또한 그 행복 속에서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이겨내자는 다짐을 서로 받아낸, 의리있는 부부이기도 하다.

 

아내인 내가 털어놓지 못한 비밀

 

이렇게 사랑과 의리로 똘똘 뭉쳐있는 우리 부부에게도, 실은 아내인 내가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있다. 이제야 밝히자면 나는 아직 옛 남자친구들에게서 받았던, 글씨로 빼곡히 채워진 엽서와 편지들을 버리지 못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사랑하는 주인공들 사이에서 미처 말 못한 상대방의 비밀을 우연치 않게 알게 되듯이, 남편과 나 사이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

 

물론 노란색의 지퍼 달린 커다란 주머니 속엔 남편이 써준 작은 메모도 있고, 대학 때 강의시간에 친구가 강의노트를 북 찢어서 쓴 소소한 일상을 담은 편지도 있다. 군인이었던 친구가 여자친구와 전혀 연락이 안 된다며 눈물로 하소연하듯 쓴 편지와, 역시 군대에서 외로운 마음을 편지로 달래고자 무려 6장씩이나 꾸역꾸역 자신의 이야기를 채워 넣어 편지를 보낸 학교 선배의 마음도 있다.

 

그런 무리의 낡은 편지 묶음 중 눈에 띄는 색색의 엽서들이 있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그리고 프랑스 파리, 스페인 등에서 보내온 예전 남자친구의 엽서들이다.

 

엽서에는 옛 남자친구가 느꼈던 타국에서의 외로움, 여행 중에 느꼈다는 높기 만한 언어장벽, 그곳에서 새로 사귄 외국 친구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당시 그의 소소한 이야기들은 대학생활에만 매진하고 있던 내게 신선한 자극이 됐다.

 

그때부터 못 가본 곳에 대한 동경이 시작됐다. 여행을 좋아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다. 여행과 어학연수로 해외체류기간이 길었던 그 사람이 보낸 여러 장의 엽서들은 내용보다도 이국적인 색채나 디자인이 더 돋보였다. 나는 어떤 화려한 선물보다도 잊을 만하면 학과 사무실에 도착해 있는 그의 엽서가 좋았다.

 

엽서에 붙어 있는 그 나라 우표와 도장이 찍혀있는 흔적도 좋았고, 멀리서 오느라 많이 너덜너덜해진 엽서의 모서리 부분도 멋스러웠다. 볼펜으로 눌렀음직한 작은 흔적에 이미 까만 볼펜색이 많이 바랜 부분도 있다.

 

그것들은 컴퓨터와 핸드폰이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내 삶에 설명하기 벅찬 매력으로 다가왔다. 좀 더 아련했기에 더 많이 그리웠던 것 같다. 물론 그땐 전화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었고 이메일도 있었다. 그렇지만, 시차나 요금을 고려하면 전화는 마땅찮은 일이었고, 이메일이 있었지만 여행 중인 나라의 정취를 충분히 담아내기엔 역부족이라 여겼다.

 

그 아날로그적인 매력이 듬뿍 담긴 엽서와 손편지는 지금의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SNS나 문자로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편지 꾸러미들을 구분 없이 모아두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래도 사진은 다 버렸다우!

 

엽서뿐만 아니라 낡은 편지들, 작은 쪽지들이 담겨 있는 그 주머니 속엔 나를 사랑했던 그 때의 사람들 얘기가 있다. 옛 남자들이 써줬던 것을 아직도 가지고 있느냐는 질타가 쏟아질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고백했더니 남편은 이렇게 말한다.

 

"엽서 쓴 그 남자는 왜 널 두고 혼자 그렇게 돌아다녔대? 나 같으면 절대 혼자 두고 가진 않았을 거야. 너 데리고 갔을 거야."

 

편지를 모아두는 줄은 알았지만 옛 남자들의 손편지 꾸러미를 아직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는 남편은, 불편한 사실임에도 여러 토라짐 끝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더 읽어보자며 졸라대기도 하는 사랑스러운 남편에게 덧붙여 이 말을 전한다.

 

그래도 사진은 다 버렸다우. 생각해봐요. 스토리에 환장하는 내가 내 이야기가 담긴 글들을 옛 남자들이 써줬다고 해서 버릴 수가 있었겠어요? 그저 연애소설 읽듯, 로맨스영화 보듯, 그렇게 하려고 모아둔 책이나 영상파일이라고 생각하면 더 쉽겠지요. 우리 다음에 다시 같이 읽어요! 너무 재밌다고 섭섭해하진 않을 거죠? 그때가 행복했다 하더라도 이미 지나가버린 순간들이고 지금의 나는 당신을 사랑하잖아요.

 

그나저나, 다른 아내들은 연애편지 다들 버렸답디까?


태그:#손편지, #엽서, #비밀, #아날로그,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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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문화, 다양한 사회현상에 관해 공부하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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