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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당 빵집이 문을 닫았다. 삼선당 빵집이 망했다니 이 사실을 누가 믿겠는가. 전쟁직후 혜화문 밖 삼선교 천변에 천막을 치고 가마솥에 찐빵을 삶기 시작한지 어언 육십년. 삼선당 빵집은 그동안 수많은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

요컨대 삼선당 빵집은 삼선교 지역 토착기업이면서 동시에 삼선교의 자랑이었다. 한 치의 과장도 보태지 않고 삼선당 빵집은 삼선교 인근은 물론 고개 너머 미아리, 더 멀리는 공릉동 월계동, 상계동 하계동 심지어 의정부까지 그 명성을 떨쳤다. 서울 동북부 지역에 사는 사람치고 삼선당 빵집의 단팥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삼선당 빵집에서 친구 혹은 친지와의 약속을 잡아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삼선교에서 아무나 붙들고 길을 물어보시라. 백이면 백 '삼선당 빵집 앞에서 왼편으로 혹은 오른편으로…'라는 말을 들어야 할 터.

말하자면 삼선당 빵집은 단지 빵을 파는 가게로서가 아니라 서울 동북부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 마크인 것이다. 오죽해 한동안 '삼선당 빵집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유행했을까. 아니 간첩도 분명 삼선당 빵집은 안다. 오래된 일이라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70년대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 북한군 귀순 용사의 입에서 '내래 삼선당 단팥빵을 먹고 싶어게지구 왔씨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일도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삼선당 빵집이 결국 망했다. 전국적으로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중견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는 마당에 그깟 빵집 하나가 문 닫은 걸가지고 호들갑을 떤다고? 혹여 삼선교 근방에서는 절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마시라. 만일 사정을 잘 모르고 큰소리로 그따위 소리를 말을 입에 올린다면 그 누구라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선당 빵집의 폐업 소식은 지역 케이블방송에서 긴급 속보로 다뤄졌다. 그리고 이틀 뒤 같은 방송국에서는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특집방송을 내보낸다. 

기자 : 저는 지금 문이 굳게 닫힌 삼선당 빵집 앞에 나와 있습니다. 이곳에는 삼선당 빵집 폐업 소식을 듣고 놀란 시민들이 모여 있습니다. 간간히 눈시울을 붉히는 시민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삼선당 빵집의 오랜 단골이라는 노인 한분과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노인 : 안녕하지 못해!
기자 : 단골 빵집 폐업 때문에 충격이 크셨군요.
노인 : 충격이 크다 뿐이겄어? 내가 삼선당 빵집과 처음 인연을 맺은 지 자그마치 육십년이여.
기자 : 오랜 단골이셨군요.
노인 : 단골이다마다. 터줏대감 단골이지.
기자 : 처음 인연을 맺은 계기는 어땠는지요?
노인 : 피난길에서 부모형제 폭격으로 다 잃었어. 전쟁 끝나 군용열차 훔쳐 타고 혈혈단신 서울로 왔을 때 내 나이 열두 살이었지. 서울에 올라오니 갈 데가 있어야지. 보름을 쫄쫄 굶으며 사대문 안팎을 해갈을 하다가 여기 삼선교 개천가에 쓰러져 잠이 들었어. 그런데 잠결에 고소하고 달착지근한 냄새가 코를 간질이는 거야.
기자 : 그 냄새가 삼선당 빵 냄새였군요.
노인 : 기자양반! 말허리 자르지 말고 들어봐. 그 냄새가 얼마나 좋았는고 하니 내가 죽어서 천국에 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그래 간신히 정신을 채리고 엉금엉금 기어서 갔더니만 삼촌뻘로 뵈는 주인 양반이 가마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단팥빵을 꺼내 담고 있지 뭐야. 그걸 침을 젤젤 흘리면서 쳐다보고 있었지
기자 : 그때 처음 삼선당 빵과 인연을…….
노인 : 말허리 쫌 자르지 말라니께.
기자 : 알겠습니다. 방송 시간 때문에 가급적 좀 짧게…….
노인 : 그래가지구 설라무네…… 어디까지 했더라?
기자 : 침을 젤젤….
노인 : 그려 침을 젤젤 흘리는데 주인 양반이 따끈따끈한 단팥빵 두 개를 내 손에 쥐어 주는 거야.
기자 : 감동적이군요.
노인 : 감동뿐이겄어? 생명의 은인이지. 그 주인 양반이 바로 삼선당 빵집을 세운 이병출씨여
기자 : 돌아가신 삼선당 빵집 창업주 이병출 회장 말씀이십니까?
노인 : 그렇지 바로 이병출 회장이시지. 그 양반이 목숨을 구한 아이들이 나 하나 뿐이 아니여. 삼선교 토박이치고 그 양반한테 단팥빵 한번 얻어먹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여.
기자 : 향토기업 삼선당 빵집의 전설이 과장된 것이 아니었군요.
노인 : 돌아가신 이병출 회장님이 이 사실을 아시면 땅속에서 벌떡 일어나실 거네.

이만 하면 삼선교 일대에 '시일야방성대곡'이 터져나올만하지 않겠는가. 노인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삼선당 빵집의 창업주 이병출 회장의 미담은 여기저기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그는 빵집을 경영하면서 원칙을 지키기로도 유명했다. 모든 원자재가 부족하던 6,70년대, 당시 대부분의 경쟁 기업에서는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별의별 장난을 치곤했다. 빵과 과자의 단맛을 내는 식재료도 그중 하나였다.

지금이야 건강을 위해 단맛을 피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단것에 대한 유혹은 대단했다. 굴지의 제과회사는 물론 지역 빵집과 제과점들은 원가를 줄이기 위해 설탕 대신 값이 싼 사카린을 공공연히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삼선당 빵집의 이병출 회장은 직원들에게 사카린의 '사'자도 꺼내지 못하도록 고집을 부렸다. 그의 고집 때문에 경영상의 위기를 맞은 적도 있지만 그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가 유달리 사카린 원료를 금지시킨 것은 빵의 맛 때문이기도 했지만 도매시장에 유통되던 사카린이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밀수품이었기 때문이었다. 내로라하는 굴지의 대기업이 밀수한 일종의 장물이었던 것이다.

'빵으로 장난치면 죽는다!' 이 말은 창업주 이병출 회장이 임종 직전 후계자인 막내 아들 이건휘 2대 회장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후계자 이건휘 회장은 아버지의 유언을 삼선당 빵집의 사훈으로 삼으려 했으나 사훈치고는 다소 과격하다는 이유로 채택되지는 못했다. 결국 '빵 제일주의'를 사훈으로 채택했지만 '빵으로 장난치면 죽는다!'는 삼선당 빵집의 창업정신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삼선당 빵집의 경영권이 아들인 건휘에게로 이어지는 과정도 보통의 기업과는 사뭇 달랐다. 아들이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 것이야 흔하고 당연한 듯 보여도 건휘가 아버지를 이어 2대 회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가 이병출 회장의 아들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병출 회장은 건휘 위로도 명휘, 국휘, 성휘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치자면 장남인 명휘가 대를 잊는 것이 당연 했지만 이병출은 그리하지 않았다.

삼선당 빵집의 혹독한 경영자 검증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정도로 유명하지 않던가. 바닥청소와 식기 설거지를 비롯한 허드렛일만 3년, 밀가루 반죽과 단팥소 버무림 2년, 매장 접객 3년의 실무과정은 기본 필수 코스에 불과하다. 본격적인 경영 수업에 대해서는 극비에 부쳐진 관계로 알려진 바 없으나 추가로 10년을 넘는 혹독한 수업을 마친 후에야 사무실에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고 한다.

큰 아들 명휘는 설거지 2년째 되던 해 겨울 들고 있던 행주를 부엌 바닥에 패대기치는 바람에 일찍이 후보에서 밀려났다. 둘째 국휘는 밀가루 반죽이 묻은 손으로 단팥소를 집어 먹다가 아버지 이병출에게 들키는 바람에 꿈을 접어야 했다. 본격적인 경영 수업에 들어간 사람은 성휘와 건휘였다. 셋째 성휘가 건휘와의 경쟁에서 밀린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소문에 의하면 최종 단팥빵 만들기 브라인드 테스트에서 심사를 맡은 쉐프들이 건휘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삼선당 빵집의 2대 회장에 취임한 이건휘는 일대 개혁을 단행한다. 아버지의 유훈 '빵으로 장난치면 죽는다'정신을 이어받으면서도 '빵 제일주의'라는 모토로 세계화를 선언했다. 그에 관해서도 일화가 전해진다. 이건휘는 회장에 취임 즉시 전국 빵 기행을 떠난다. 전국의 유명한 빵집을 돌며 그 맛과 비법을 탐색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그 여행에서 이건휘 회장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충격에 빠지게 된다.

특히 경주빵과 안흥 찐빵의 맛을 본 후 그는 식음을 전폐했다. 동행했던 임직원들 역시 며칠을 굶어야 했다. 전국 빵 기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한 달간의 칩거 후 '빵 제일주의'를 선언하고 최고의 빵을 개발하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감행한다. 신제품 개발의 산실인 삼선당 빵집의 계열사 '제일제빵'은 그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무리한 투자라는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서릿발 같은 이건휘 회장의 결단을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건휘 회장이 제2의 창업이라 선언한 제일제빵. 그의 결단이 옳았음이 증명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삼선당 빵집의 명성이 삼선교 일대를 넘어 서울 동북부를 석권하고 더 나아가 전국적인 브랜드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제 '삼선'이라는 이름은 엄청난 브랜드가치를 달고 날아오른다. 전국의 중국음식점에서 조차 평소 주문이 드물던 삼선짜장과 삼선짬뽕 매출이 급격히 늘었다고 하니 삼선의 브랜드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으리라.

단고기 주변엔 까마귀가 모여드는 법. 삼선당 빵집의 명성이 커지자 이에 눈독을 들이는 세력의 손길이 스멀스멀 주위에 모여들었다. 이건휘 회장이 제2의 창업을 선언하고 제일제빵을 설립한 시기는 범죄와의 전쟁 당시 지하로 숨어들었던 조직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삼선당 빵집이 성장을 구가하는 동안 서울 동북부 일대를 주름잡던 최대 조직 큰나라파 역시 비슷한 속도로 몸집을 불렸다.

큰나라파의 보스의 이름은 이묭박. 전과 14범의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그는 그 업계에서는 신화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맨 바닥에서 시작해 안 해본 일이 없었던 이묭박은 자기 스스로를 한나라 장수 한신에 비유하곤 했다. 졸개들을 혼낼 때마다 한신의 과하지욕(跨下之辱) 고사를 인용하면서 자신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가랑이를 벌리고 그 사이로 기어갈 것을 명령했다는 뒷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여하튼 큰나라파 보스 이묭박과 삼선당 빵집 이건휘와의 독대는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이묭박은 졸개들을 이끌고 예고도 없이 이건휘의 사무실로 들이닥친다.

이묭박 : 회장님. 삼선당 빵집 사업이 엄청나게 잘된다면서요? 순이익이 사상최대라고 들었습니다.
이건휘 : 과찬이십니다. 큰나라파야 말로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보스이신 이선생님의 명성이 자자하더군요. 그린벨트 지역에서 부동산사업까지 하신다니 대단하십니다.
이묭박 : 어허! 무슨 농담을……. 그건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이건휘 : 저야 장사꾼이라 잘 모르지요. 그런데 하실 말씀은?
이묭박 : 장사라면 저도 해봐서 잘 압니다. 각설하고 삼선당 빵집의 엄청난 이익을 사회정의를 위해 저희와 공유하는 것이 좋겠다 그래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건휘 : 무슨 말씀인지 당최…….
이묭박 : 한마디로 삼선당의 빵을 함께 공유하자는 제안입니다.

이묭박의 협박성 제안에 이건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어릴적부터 빵장사 집안에서 장사를 공부해왔으나, 빵을 공유한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제빵학에서도 배우지 못했고 누가 만든 말인지 모르겠군요."

이묭박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얼굴만 붉그락푸르락 변하여 자리를 나왔다. 졸개들을 불러 삼선당 빵집을 박살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미 졸개들은 두 사람이 독대를 하는 동안 삼선당 단팥빵 맛에 길들여져 있었으므로 물 건너간 일이었다. 결국 이묭박과 이건휘의 싸움은 이건휘의 완승으로 끝을 맺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삼선당 빵집의 몰락을 예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묭박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이건휘 회장은 자신의 아들 이제용의 후계자 수업에만 몰두하게 된다. 3대세습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건휘는 자신이 젊은 시절 선친 이병출 회장으로부터 받았던 혹독한 경영자 수업을 아들 제용이 똑같이 밟기를 고집했다. 

그러나 뒤끝이 있기로 유명한 이묭박이 삼선당 빵집을 그대로 둘리 없었다.  자신이 당한 것보다 열배 이상 갚아주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는 이묭박은 자신의 구역인 서울 동북부 지역 상권을 무제한 개방하기로 결정한다. 그 대가로 이묭박이 어떤 이익을 챙겼는지에 대해 설왕설래 말들이 많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서울 동북부를 포기하고 무제한 개방한다는 것은 서울 동북부 일대의 모든 향토기업들에겐 치명적인 위험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묭박의 무제한 개방 조치이후 향토기업들이 하나둘 간판을 내렸다. 제빵업계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강남지역에서 잘나가는 럭셔리 제과점이 서울 동북부일대를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프랑스식 바케트와 크로와상으로 무장한 다국적 럭셔리 제과점의 이국적 맛이 젊은이들의 입맛을 장악해 나갔다. 삼선교 일대에서도 이젠 삼선당 빵집의 대표 상품인 단팥빵을 먹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삼선당 빵집 바로 건너편에 프랑스식 제과점이 문을 열고 바로 옆에는 이탈리안 패스트푸드와 다국적 햄버거 체인점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이제 삼선당 빵집에는 수십 년 동안 단팥빵에 길들여진 노인들 몇몇과 날파리들이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키는 지경이 되었다.

후계자 수업을 마치고 아버지 이건휘 회장으로부터 삼선당 빵집의 경영을 물려받은 이제용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다. 단팥빵에 단팥소대신 겨자를 잔뜩 넣은 일명 '복불복 단팥빵'을 출시한 것이다. 출시되는 단팥빵 중에서 무작위로 겨자를 넣은 빵을 만들어 숨겨놓고 그 빵을 사 먹은 사람에게 1년간 무상 이용권을 주는 파격적인 마케팅을 단행한 것이었다.

복불복 대박찬스는 단기간에 다국적 기업에게 빼앗긴 손님을 다시 불러 모으는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이것이 승부수가 아니라 자충수가 될 줄이야. 겨자가 든 빵을 먹고 경련을 일으킨 고객이 소송을 제기하면서 예상치 못한 불매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빵으로 장난치면 죽는다.' 삼선당 빵집의 3대회장 이제용은 뒤늦게 조부인 이병출의 유언을 떠올려보지만 이미 해는 떨어진 뒤였다.

서울 동북부의 랜드마크, 삼선교의 자랑 삼선당 빵집. 비록 비운의 운명을 마감했으되 그 이름은 영원히 기억되기를.

덧붙이는 글 | 본 글은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 85호(3,4월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삼선당, #삼성, #이건휘, #빵집, #이익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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