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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도 모른 채 어보를 받들고 들어온 상서사 관원을 이끌고 환관 전균이 경회루로 향했다. 대보를 확인한 임금이 승전색 전균에게 명했다.

 

"수양대군을 들라 이르라."

 

수양이 달려오고 승지와 사관이 그 뒤를 따랐다.

 

"전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수양이 엎드려 통곡했다.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보(大寶)를 들었다. 손이 떨리고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다. 임금이 수양에게 대보를 건네주었다.

 

 

"아니 되옵니다. 전하!"

 

수양이 엎드려 사양했다.

 

"받으시오. 숙부!"

 

임금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은 창백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이것은 내 명령(令)이고 숙부의 명운(運)이오."

"아니 되옵니다. 전하!"

 

수양이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대보를 받았다.

 

"뭣들 하고 있는 게냐? 새 주상을 모시지 않고…."

 

명하는 어린 임금의 목소리가 파리하게 떨렸다. 환관들이 수양을 부액하여 나갔다. 환관의 부축을 받은 수양이 대군청에 이르렀다. 이제는 대군도 아니고 영의정도 아니다. 대보를 손에 쥐었으니 새 임금이다. 사복관이 시립하고 군사들이 시위했다.

 

한확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집현전 부제학 김예몽으로 하여금 선위교서와 즉위 교서를 짓도록 했다.

 

"종묘사직을 수호할 책임... 숙부에게 있다"

 

임금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근정전으로 나아갔다.

 

"내가 어린 나이에 선왕의 대업을 이어받아 궁중 안에 깊이 거처하고 있으므로 내외의 모든 일을 알 도리가 없으니 흉한 무리들이 소란을 일으켜 국가의 위난을 초래하였다. 이 때 숙부 수양대군이 충의를 발하여 내 몸을 보살피고 흉도들을 숙청하여 어려움을 물리쳤다. 그러나 아직도 흉한 무리들이 소탕되지 않아 변고가 계속되고 있으니 내 과덕한 몸으로는 이를 제압할 능력이 아닌지라 종묘사직을 수호할 책임이 우리 숙부에게 있다.

 

숙부는 선왕의 아우님으로 일찍부터 덕망이 높았으며 국가에 큰 공로가 있어 인심이 귀의하는 바가 크다. 이에 과인의 무거운 짐을 풀어 숙부에게 넘기는 바이다. 종친과 문무백관 그리고 대소신료들은 우리 숙부를 도와 조종의 유명에 보답하여 뭇사람에게 이를 선양할지어다."

 

임금이 선위교서를 반포하는 사이 한명회가 신숙주의 귀에 소곤거렸다.

 

"주상전하께서 아무래도 사신을 만나러 갈 것 같습니다. 미리 귀뜸 해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도승지 신숙주의 발바닥에 불이 붙었다. 선위식이 행해지는 경복궁을 빠져 나온 신숙주가 사신들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태평관으로 잰걸음을 놓았다.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기생을 희롱하고 있는 고보 앞에 신숙주가 머리를 조아렸다.

 

"꼭지가 어디 붙어있는지 몰라 찾고 있는 중인데, 이보다 급한 일이 있단 말이오?"

 

게슴츠레한 고보의 눈길이 신숙주의 얼굴에 머물렀다.

 

"전하께서 수양군에게 대위를 양위하셨습니다."

"양위라 했소?"

 

술이 화들짝 깬 모양이다.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수양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셨습니다."

"그게 너희들끼리 주고받을 만큼 가벼운 것이냐?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작위를 가지고 그렇게 장난쳐도 된다는 말이냐?"

 

발끈한 목소리가 태평관을 흔들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양해를 드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별도로 주문(奏聞)을 올리겠습니다."

"고얀 일이로군."

 

혀 꼬부라진 소리가 신숙주의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여흥을 깨서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이홍위, '상왕'으로 물러나다

 

궁하면 튀는 게 상책이다. 신숙주가 잽싸게 태평관을 빠져 나왔다.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길 광통교에서 어가를 만났다. 가마를 멈춘 임금이 신숙주를 불러 세웠다.

 

"어디를 다녀오는 길이오?"

"아, 예. 그것이…."

 

머뭇거리던 신숙주가 임금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예전 같으면 할 수 없는 무엄한 행동이다. 승정원은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기관이다. 군주의 분신이고 임금의 그림자다. 그 수장이 도승지다.

 

임금이 수양에게 선위한다고 교서를 반포했다. 이홍위는 옛 군주는 될지언정 현 임금은 아니다. 현재 도승지가 모셔야 할 임금은 수양대군 이유(李瑈)다. 옛 정을 생각하여 예우는 하더라도 통제받고 보고해야 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눈빛이다.

 

그렇게 신하와 임금은 광통교에서 헤어졌다. 임금은 태평관으로 갔고 신숙주는 경복궁으로 향했다. 임금이 좌승지 박원형을 대동하고 태평관에 도착했다. 기생 치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사신이 옷매무새를 고치며 임금을 맞이했다.

 

"내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계유년에 안평대군이 반란을 꾀하여 숙부 수양대군이 평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남은 일당들이 아직도 암약하여 변란을 꾀하고 있으니 이 어찌 어린 내가 감당할 바이겠습니까? 수양대군은 종실의 장(長)으로서 사직에 공로가 있으니 중임을 부탁할 만합니다. 이에 그로 하여금 국사를 임시 서리토록 하고 장차 이를 주문(奏聞)하겠습니다."

 

"선위는 국가의 대사인데 국왕 본인으로부터 직접 설명을 들으니 오해할 일이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사신 고보가 답했다. 선위 사실을 통보한 임금이 경복궁으로 돌아갔다. 수양이 사정전으로 들어가 임금을 알현했다.

 

"전하께서 물려주신 이 나라, 아름답게 경영할테니 상왕으로 지켜봐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숙부!"

 

수양, 상왕의 '간곡한' 뜻을 좇기로 하다

 

사정전을 나온 수양이 익선관에 면복을 갖추고 근정전에 섰다. 새로운 임금의 탄생이다. 발아래 문무백관이 시위하고 조선팔도가 수중에 들어왔다. 땅 뿐만이 아니라 백성과 초목까지 손안에 있다. 감개가 무량하다. 아버지 세종과 어머니 원경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돌고 돌아 이 자리에 선 것이다. 실로 38년 만이다.

 

한확이 문무백관을 인솔하고 전문을 올려 하례했다.

 

"백성이 도와 군왕이 되시니 천명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큰 덕이 있어 인심에 순응하신 까닭입니다. 이제 위태로웠던 사직이 안정을 얻으니 조야가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근정전 계단아래 수많은 문무백관이 시립했으나 한확의 전문에 수긍하는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았다. 모두가 하나같이 냉소를 흘리고 있었다.

 

수양이 하교했다.

 

"태조께서 하늘의 명을 받아 대동(大東)의 나라를 창업하셨고, 열성(列聖)께서 서로 계승하시며 밝고 평화로운 세월이 거듭되어 왔다. 그런데 주상 전하께서 선업(先業)을 이어받으신 이래 불행하게도 국가에 어지러운 일이 많았다. 이에 장군(長君)인 내가 아니면 위태로운 나라를 이끌 사람이 없다며 전하께서 나에게 대위(大位)를 주시는 것을 한사코 사양했으나 이를 윤허 받지 못했다. 또 종친과 대신들도 사양만이 능사가 아니라 하여 마지 못해 주상의 뜻을 좇았다. 이에 근정전에서 즉위하고 주상을 높여 상왕으로 받들고자 하는 바이다."

 

즉위식을 마친 수양이 의장을 갖추어 잠저로 돌아갔다.


태그:#수양대군, #선위, #단종, #근정전, #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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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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