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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용 의병장 사진.
 이석용 의병장 사진.
ⓒ 김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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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 의사 이석용은 역사적 조국광복의 대의를 밝혀 천리 밖에 있는 일본의 천황이란 그대에게 말하노니 잘 들어보아라. 목인(睦仁, 일왕 이름)아! 너는 대한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나 이석용이 있느니라. 나는 천하에 대의를 밝혀 피로써 기어코 원수를 갚고, 그대의 눈을 빼고야 말 것이며, 그대의 살을 씹고 그대의 가죽을 벗겨 그것으로 내 방석을 만들고야 말 것이다."-1911년 4월, 일왕에게 보내는 글 중에서

이석용은 1878년 11월 29일(음력) 지금의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죽전마을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호는 정재이며, 의병투쟁 때는 '이학사'로 불렸다. 그는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아 7~8세에 유가의 경전 사서삼경과 제자백가서에 이미 통달했다고 한다.

1906년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병오창의에 참여했으나, 최익현의 해산명령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력에 의한 의병활동을 결심한다. 그해 가을부터 이석용은 1년여 동안 거사준비를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전주, 임실, 장수, 진안, 남원, 순창, 곡성, 거창, 함양 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했고, 정부를 비롯해 일본정부 앞으로도 규탄문을 발송하고 전국의 동포에게 민족의 주권을 되찾자는 격문, 건의문, 호소문 등을 발송했다. 그러다 1907년 일본과 친일 대신들이 고종을 폐위하고 정미7조약을 체결, 조선정부 요직의 고문을 맡아 모든 정책결정에 관여하게 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고 의병거의를 서둘렀다.

호남의병창의동맹지. 진안군 마이산 입구에 있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풀이 무성하다.
 호남의병창의동맹지. 진안군 마이산 입구에 있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풀이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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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907년 9월 12일 진안 마이산 용바위 앞에서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니, 이때 제단을 중심으로 고천제가 끝나자 모든 의병들은 환호를 올리면서 이석용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그가 의병을 일으킨 동안 때로는 5백여 명, 3백여 명, 아주 비참한 지경에 이를 때는 10여 명을 거느리고 왜적과 맞섰다. 부적하는 자를 응징 또는 개과천선케 하고, 백성들의 적개심을 일깨우며, 민폐를 극소화해 백성을 위무했다.

그러나 열악한 장비로 월등한 전투력을 가진 왜병과의 싸움은 의병의 희생이 동반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는 엄한 군율과 무기개조, 군복을 염색해 입는 등의 지혜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특히 군기를 엄하게 해 덕망을 모았고, 부대편성에 있어서도 반상을 가리지 않았다. 당시 천민시하던 무당출신을 초장에 임명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전북의병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를 체포하기 위해 일본 군경과 행정기관이 총동원됐다. 많은 현상금을 내걸었고, 임실에 있던 그의 집은 물론이고, 장수에 살던 여동생의 집을 불태우고, 여동생과 매부 가족을 오수수비대로 끌고 가 온갖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이석용의 의병은 일본 군경과 50여 차례 전투를 벌이면서 많은 적을 살상했다.

1908년 10월 일본은 마침내 1만여에 달하는 소위 호남의병토벌대를 편성,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나섰다. 1차, 2차, 3차 단계를 정하고 의병에 대한 포위공격을 감행하니 몇백 명에 불과한 수와 열악한 무기를 가진 의병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갔다. 그는 이대로 투쟁을 계속하다가는 의병의 아까운 생명만 희생될 뿐이라 판단, 1909년 3월 6일 자기 예하의 의병들에게 일단 해산해 귀가토록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의 체포 대상자로 지목돼 귀가할 처지가 못돼 지하로 들어가 구국운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석용 의병장 묘
 이석용 의병장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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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일본은 끝내 순종황제를 폐위하고, 조선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에 이석용은 1911년 3월 옛 동지를 모아 비밀조직을 만들어 동경으로 가 일왕 암살계획을 세웠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 일본 경찰과 헌병의 경계망과 추적으로 국내 투쟁이 불가능해지자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투쟁을 이어가기로 하고, 1913년 망명 자금 모금을 위해 고향 친구를 찾았다가 밀고로 잡히고 만다. 그리고 1914년 4월 4일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했다.

전주 덕진공원 뒷편에 있는 황극단
 전주 덕진공원 뒷편에 있는 황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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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석용 의병장의 아들인 이원영은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사재를 털어 전주에 황극단을 세우고, 1957년에 고향 성수면에 소충사를 건립해 부친을 비롯한 28의사를 배향했다. 그러다 장소의 협소로 오봉리에 새 터를 마련하고 오늘날처럼 성역화가 추진됐다. 그리고 국가에서는 그의 순국정신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했다.

소충사 입구.
 소충사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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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0월 초순이면 임실에서는 소충사선문화제가 열린다. 이 때문인지 기자가 방문한 10월 1일 소충사는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하지만, 거기 머문 2시간여 동안 단 한 사람의 방문객도 만날 수 없었다. 인근에 있는 이석용 생가에도 들려봤다. 역시 깨끗하게 벌초가 돼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싸리문마저 잠겨 있었다.

분기탱천하는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한 마이산 용바위는 또 어떤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의병들이 집회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들의 기세가 두려워 감히 접근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지금 그곳은 풀이 무성해 접근하기 힘든 곳이 되고 말았다.

이석용 의병장 생가. 문은 닫혀 있다.
 이석용 의병장 생가. 문은 닫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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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들의 흔적을 되짚다보면, 사라지거나 방치된 사례를 허다하게 보게 된다. 그렇게 보자면, 소충사가 있고 생가까지 복원했으니 이석용 의병장은 괜찮은 대접을 받는 지도 모른다. 불과 100여년 전의 이야기들이 오래된 전설처럼 느껴지는 것이 현실이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북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석용, #의병장, #임실, #소충사, #황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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