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서울지방노동청의 종합고용지원센터를 찾은 실직자 등이 실업 급여 신청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자료사진)
 서울지방노동청의 종합고용지원센터를 찾은 실직자 등이 실업 급여 신청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자료사진)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이 어둡고 잔인한 시절에 실직했다. 닥친 현실이 믿기지 않았으면서도 처음에는 후련하다 못해 기분 좋은 해방감이 밀려들었다. 수년을 늦은 밤까지 격무에 시달리는 동안 몸과 마음은 녹아내렸고, 사람들에게 무수히 상처받은 터라, 당장의 휴식은 달콤했다.

역시 사태를 지나치게 낙관했다. 아내의 반응을 보자. 사십대 초반만 되었어도 틀림없이 그러지 않았으리라. '걱정 마, 아직 젊으니까 잘 될거야'라며 넓고도 든든한 가슴으로 안아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십을 앞둔 지금. 그때의 아내는 저만치 달아나고 보이지 않았다. 남편의 사기앙양을 위해 극도로 자제하고 있으나, 바보가 아닌 한 그녀의 말투와 몸짓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내미는 고통스런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할 까닭이 없다. 그것은 끼니와 빚을 걱정해야 하는 동물적인 두려움이었다.

수출강국 대한민국의 빈약한 사회안전망 속에 살아가는 소시민의 대책 없는 공포에 다름 아니었다. 판이하게 달라진 아내에게 섭섭했지만 평생을 안정과는 거리가 먼 직장만 쫓아다니며 애간장을 끓였으니 그녀에게 걷어차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중년의 실직에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둔감하다. 취업 못해 어깨가 처진 청년들의 모습을 보기도 안쓰럽지만, 중년의 실직이야말로 위험하고도 위험하다. 그들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고, 미취업 청년들마저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빠가 무너지면 가족들이 받아야 할 마음의 상처는 고사하고 가족 모두 무너질 위기에 직면하고야 만다. 연결고리 추적이 분명한 이 사회적 문제에 투입될 만만찮은 비용을 누가 계산이나 해보았을까.

가장의 실직은 한 가정의 위기... '중년 실업' 정책 늘어났으면

실직한 중년의 재기를 목적으로 하는 정부의 특별한 대책을 염원해보지만, 당장은 청년의 일자리를 독려하는 제도와 지원정책들이 실직한 중년에게도 유사하게 적용되길 바란다.

예를 들어 6개월에서 1년간 급여의 절반을 기업에 지원하는 청년인턴 제도를 보자. 청년들의 일자리를 빼앗지 않는 분야는 분명히 존재하므로 그 대상을 청년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기업 입장에서는 숙련된 인력이 필요한 분야에 인건비 부담을 덜며 채용할 수 있으므로 생산성을 올리고 비용을 절감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정부지원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영세한 기업에게라면 그 효과는 더 할 것이다. 다만 인턴기간이 끝난 후 기업에 채용을 강제할 수 없으므로 근원적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실직자는 다소 안정된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설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인턴기업에서 기량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자리를 잡게 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또 중년의 창업지원을 거시적 관점으로 판단해 보았으면 한다. 이들의 창업이야말로 한 가정을 살리는 차원을 뛰어넘어 안정적인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데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직장생활 동안 갈고 닦은 직무경험, 발품과 서러움의 토대 위에 세워진 인적네트워크, 숙련된 어른이 아니면 알기 어려운 사회 경험치는 사업실패의 위험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직장생활을 통해 꿈꿔왔던 소중한 창업 아이디어마저 있다면 일자리 만들기에 분주한 정부로서도 구미가 당기는 일이 아닌가. 꽤 매력을 끄는 창업아이디어들을 만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중년의 실업을 대비한 정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중견전문인력 채용기업에 세제 혜택과 일정 기간 장려금을 지원하는 정책이 있다. 하지만 이 지원책은 완전하지 않다. 이 정책의 지원을 받으려면 명시된 중견간부의 대상에 포함이 되어야 하는데, 경력자들이 근무했던 기업의 규모, 성격, 근무기간 산정 등에 있어 경직된 제한을 둠으로써 이 대상범위에 들어오지 못하는 다수의 중년들은 배제된다.

예를 들어 30인 미만 중소기업에서만 근무했던 경력자들에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조사해 보라. 30인 미만 기업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은지. 작은 기업이라고 그들의 역량이 큰 기업의 경력자들보다 떨어진다고 단정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손질이 필요하다.

중년은 저물어가는 황혼 아냐... 탄탄한 내면 담겨있어

실직한 한 중년의 푸념이나 넋두리로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나 다가오는 중년을 피할 수 없다. 지금 여러분의 호주머니를 점검해 보라.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들 교육비, 주거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지 않은지.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당장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무수히 도사리고 있다. 자녀들을 모두 각자의 삶으로 돌려보내고 여생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 재무설계가 지금 이 순간 확고하지 않다면 아직 중년이 안 된 분들도 긴장해야 한다. 더구나 세상은 양극화의 극단으로 치닫고 있지 않은가.

나는 하다 하다 안 돼, 젊은 사람들도 힘들어 한다는 극한의 생산현장으로 와서 연장근무와 휴일근무도 마다하지 않고 시종일관 어두운 얼굴로 살아가는 수많은 중년들을 목도하였다. 휴식과 재충전은 그들에게 가당치도 않을 뿐더러 호강에 겨운 일이다. 그것이 이제는 남 일로만 볼 수 없게 되었으니 내 마음은 내내 불안하고 착잡하다.

중년은 저물어가는 황혼이 아니다. 젊은 날의 패기와 열정은 여전하며, 통찰은 날카롭고 태도는 겸손하다. 자신의 삶을 스승삼아 넘어지고 일어서며 다져온 탄탄함이 그들 내면에 담겨있다. 나만 살고 보자는 이기적인 중년이 되고 싶지 않다. 곡예하듯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지만 품위를 지키고도 싶은 게 중년이다.

정책당국에 건의 드린다. 중년의 실직에 대하여 깊은 문제의식을 가져주기를 바란다. 좀 더 크게 보는 시선으로 가슴을 열어주시라. 어렵게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소중한 인적 자산들이 쉽게 버려지는 일이 없기를 희망한다.


태그:#중년, #실직, #실업대책, #가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