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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이 준 끝물가지, 참 맛있습니다.
 어르신이 준 끝물가지, 참 맛있습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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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기 경비실에 가지 몇 개 두고 가니까 살짝 삶아서 손으루 죽죽 찢어서 무쳐 먹어봐. 끝물 가지라서 맛있다구. 그저께 시골에서 조카눔이 다녀갔거든."
"그냥 드시지 뭘 우리까지 나눠주세요. 근데 형님~."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인터폰이 끊기는 소리가 났습니다. 나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서 히말라야 립밤(Lip balm) 하나를 챙겨가지고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일층에 서있던 엘리베이터가 막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초조해 집니다. 어르신이 천천히 걸음을 놓았으면 좋겠는데….           

히말리야 립밤은 얼마 전에 딸아이가 인도 출장을 갔다가 사온 것입니다. '엄마 친구분들과 나눠 쓰라'고 일부러 한 통을 사왔답니다. 모처럼 친구들에게 선심을 쓰고도 두어 개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제는 머리카락이 하얀 나도, 친구들도 립스틱을 잘 바르지 않습니다. 성당에 나올 때 혈색이 있어 보이려고 아주 엷게 바르는 친구들도 있긴 하지만 나는 그마저도 하지않습니다. 그냥 수분을 보충해 주는 립밤만 바릅니다. 아까 그 어르신도 나처럼 립밤만을 바른답니다. 아마 이걸 드리면 무척이나 좋아하실 것입니다.

딸이 인도 출장갔다가 사온 립밤. 어르신이 참 좋아 하셨습니다.
 딸이 인도 출장갔다가 사온 립밤. 어르신이 참 좋아 하셨습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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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에 닿자마자 나는 얼른 어르신이 사는 아파트로 난 푸른 잔디밭 길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르신이 구부정한 모습으로 잔디밭 길을 마냥마냥 걸어가고 있습니다. 어르신은 툭하면 찾아오는 허리병이 도져서 사흘이나 누워만 있었답니다. 근데 지금보니가 말끔히 회복돼 어르신의 걸음걸이가 느리지만 가벼워 보입니다. 다행입니다. 나는 달음질을 쳤습니다.

"형님~!" 

어르신을 따라잡자마자 나는 턱에 찬 숨을 몰아 쉬며 말했습니다. 어르신은 순하게 웃습니다.     

"왜 쫓아왔어? "
"이거 드릴려구요."  

어르신은 '그게 뭔데'하는 눈으로 립밤을 받아들더니 흘러내린 안경을 나뭇가지처럼 뻣뻣한 검지손가락 끝으로 조금 밀어올리며 립밤을 요리조리 봅니다. 

"요거 입술에 바르는 거잖아. 지난 봄에 옆집에서 요거랑 똑같은 걸 하나 줘서 써봤지 뭐야. 아주 좋더라구. 근데, 산거야?"
"아뇨. 딸아이가 인도에 출장가서 사온 거예요. 부담갖지 마세요. 그나저나 먼 데서 온 가지를 주셨네요. 잘 먹겠습니다."  

"성당에서 만날 때마다 자네가 커피를 뽑아주곤 하잖아. 그래서 내 딴엔 별 거 아닌 가지 몇 개를 준 거라구. 것두 공짜루 생긴 걸 말야."
"저도 공짜루 생긴 거 드렸어요."

어르신은 또 유순하게 웃습니다. 나도 웃었습니다. 어르신의 눈가에 잔 주름이 오늘따라 깊어 보입니다. 가만 보니까 눈가에 잔 주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르신이 허리병을 앓는 동안 몸이 많이 축나신 것 같았습니다. 양쪽 볼까지 움푹 들어갔습니다.

"우리 딸이 일요일에 온다구 했는데, 요거 그 애 줘야지. 좋은 거니까 말야."
"추석에 다녀가지 않았나보네요?"

"걘 번화한 집안에 맏며느리인데다가 농사일도 많아서 추석에 왔던 적이 없다구. 그래두 추석 지나구 가을걷이 얼추 해놓고는 사위랑 꼭 다녀가구 한다구. 것두 얼마나 고맙구 감사한지를 몰라."

"그럼요. 고맙고 감사하지요. 둘도 없는 효녀네요."

"걘 고춧가루며, 내가 좋아하는 씀바귀김치며 뭐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가지구 오는데 난 줄게 없지 뭐야. 추석에 아들, 며느리가 회사에서 받아온 선물 상자들이 그대루 있지만, 그건 내 소관이 아니라서 건드릴 수가 없다구. 요거나 줘야겄어."  

나는 어르신의 눈빛에서 사랑하는 딸아이와 사위를 기다리는 어르신의 애틋한 마음을 읽어냅니다. 한 개 더 챙겨가지고 나올걸 그랬나….

"딸이 오면 며칠 묵고 가나요?" 
"무슨, 하룻밤 자고 가지. 원체 농사일이 많으니까." 

"마음껏 이야기도 못 나누시겠네요."
"그렇지 무어. 걘 말도 별루 없어. 작년에 왔을 때두 '여름내내 땡볕에 얼마나 힘들었냐'고 했더니 내가 맘 아파 할까봐서 그냥 웃기만 하더라구. 그래두 딸애 거친 손등을 보면 훤히 보이지." 

어머니는 자식이 말을 안해도 무엇이나 한눈에 알아봅니다. 밥을 먹었는지 안먹었는지는 물론이고, 자식의 주머니 사정이며 어디가 아픈 것까지도 모두 알아 봅니다. 깊고 깊은 모성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대학 다닐 때두, 회사에 다닐 때두, 앉은 자리에 걸레질 한 번을 안 했는데 연애 결혼이 뭔지…. 그 힘든 농사일을 말없이 하구 산다구. 그렇게 180도 달라진 모양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고 아프다구."
"잘 살면 됐죠 뭐…."

그러나 어르신은 들은 체도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십 후반이 된 딸입니다. 그럼에도 어르신은 아직도 딸이 힘든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얼른 사위 얘기를 합니다. 언젠가 어르신이 '내가 팔순이 되면서부터 말야. 그니까 작년부터 그 무뚝뚝한 사위가 전화를 자주 하더라구. 오래 살구 볼 일이라더니…'라고 하던 말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사위가 요즘도 전화 자주 해요?"
"일주일이 멀다하구 허지. 아무리 그래두 사위는 사위구 딸은 딸이라구."   

어르신은 어두운 눈빛으로 아파트를 향해 돌아섭니다. 그 뒷모습이 쓸쓸해 보입니다. 이상합니다. 마치 내 친정 어머니가 세월의 무게인 흰 머리카락을 이고 서있는 내 모습이 가슴 아프고 보기 싫어서 돌아서는 것만 같았습니다. 나도 쓸쓸해 졌습니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하나 하다가 어르신의 그 작고 구부정한 등을 향해 말했습니다.

"사위가 효자네요. 요즘 전화 그렇게 자주하는 사위 드물어요. 진짜 효자라구요."

어르신이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그럴지도 모르지 하는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허긴, 사위 목소리 들을 때마다 보상받는 기분이 들기는 헌다구."
"형님, 사위 목소리가 천 냥이죠? 그쵸?"
"에이, 천 냥이 뭐야. 만 냥짜리라구 만냥!"

나는 웃음이 터졌습니다. 사위가 '진짜 효자'라는 내 말에 어르신이 그렇게 마음을 풀고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긴 사위도 자식입니다. 사위의 안부 전화가 천 냥짜리라는 것 보다는 만 냥짜리라는 것이 더 듣기 좋겠지요. 이제 생각하니까 어르신은 딸 생각에 아렸던 가슴이 전화 속 사위의 목소리를 들을때마다 조금씩 아물고 있었나 봅니다.

'언젠가는 어르신이 먼저 사위에게 안부 전화를 하게 되는 날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경비실에 들려 어르신이 놓고 간 비닐봉지를 집어들었습니다. 오늘 저녁 식탁은 푸짐할 것 같습니다. 어르신의 말씀대로 가지를 살짝 삶아서 손으로 죽죽 찢어서 먹음직하게 무친 끝물 가지나물 접시가 저녁상 한 가운데를 차지할 테니까요.


태그:#사위, #어르신 , #만 냥짜리 문안 전화, #립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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