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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허공에 주먹질 깨나 했다는 꼰대일수록 요새 청년들이 정치에는 관심도 없고, 술이나 흥청망청 마신다며 "20대 개새끼론"이란 우습지도 않은 말까지 빌려 비난하곤 하지만 난 좀 다르게 생각한다. 요즘 아이들은 오히려 너무 놀지 않아 탈이다. 오늘날 누가 셔츠를 청바지 아래에 우겨넣고 잔디밭에 앉아 통기타 치며 밤늦도록 별을 헤아리는가. 무한 경쟁이 극도로 내면화된 사회 속에서 그런 풍경은 소설 내지는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낭만처럼 정서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청년들과 멀어졌다.

반천 만원에 육박하는 학비 마련하느라 늙어서도 쉬지 못하는 부모의 눈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고루한 현실과 드라마 속 "사회 지도층"들의 화려한 삶, 강남을 위시한 멋들어진 고급문화라는 불가능한 환상 사이에서 청년들의 의식은 분열될 지경이다. 여하간 나이를 막론하고 아이들은 놀지 못한다. 놀이터나 운동장은 텅텅 비었고, 캠퍼스에는 취직과 스펙에 관련된 광고 포스터만 넘쳐 난다. 질식할 만큼! 놀고 싶어도 함께 놀 수 있는 친구들이 모두 학원을 다녀 결국 자신도 학원에 들어갔다는 한 초등학생의 고백은 퍽 상징적이다.

이쯤에서 나는 되묻고 싶다. 아니, 대체 누가 논단 말인가?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건 기본이요, 뒤에서 등짝을 걷어차이는 이 시대에. 과제하고, 아르바이트하고, 웃기지도 않은 교수, 선배, 멍청이들에게 알랑방귀 뀌기 바쁜 이 시대에. 오히려 놀 수 있다는 건 아직 힘이 있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얼간이 기질의 반증 아닐까나.

어디 한번 놀아보자구! 술김에 시작된 음악회

가장 먼저, 음악회에 대해 말을 꺼낸 것은 지완이었다. 혜성 같이 등장하여 돌풍 같은 인기를 휘몰아치고 있는 블루스 밴드 "악어들"에서 활동하고 있던 그는 학교와 가까운 지하철 1호선 신이문역을 오가다 고가(高架) 아래의 훤한 공터가 공연하기에 천혜의 장소라며 우리에게 아이디어를 제안한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나와 영조, 정빈(모두 밴드 "소프트 크림∼"의 멤버이자 동아리 "시도와 가능성(이하 시가지)"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다)은 고개를 주억이면서도 내심 시큰둥한 입장이었다.

먼저 나는 요란하고 산만하기 짝이 없는 길바닥에서 공연하는 것에 대해 몹시 안 좋은 기억을 갖고 있었고, 정빈은 석관동에서 일을 벌여봤자 아저씨들만 모여 소주만 마실 것이라며 회의적이었던 것이다. 영조는… 그냥 만사가 귀찮은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먼저 지완에게 길거리 공연의 여러 애로사항에 대해 걱정거리부터 늘어놓았다. 자동차와 행인 소음에, 더군다나 전철이 온종일 지나가는 장소인 만큼 시끄러울 터이고 그만큼 공연의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더욱이 지완이 제안한 것은 내밀한 분위기 연출이 관건인 어쿠스틱 기타와 피아노로 구성된 조촐한 공연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지완이 공연을 추진하면 얼마든지 물심양면 도와주겠다고, 그렇지만 어쿠스틱 공연에 대해선 조금 신중하게 생각해보라고 조금 애매모호한 얘기를 해댔다.

그렇게 유야무야 좌초될 위기에 빠져 있던 신이문역 어쿠스틱 공연 기획이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은 동아리 "돌곶이비스타소셜클럽(이하 돌비)"의 회원 은정 누나가 합류하고 난 이후부터였다. 그녀는 유달리 지완의 공연 기획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우연찮게 돌비의 술자리에 끼게 된 우리들에게 누나는 "시가지도 같이 해야죠?" 하고 말하는 거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은정 누나는 시가지 4호의 표지 디자인을 제작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망년회를 비롯한 시가지의 각종 행사에 매번 참석하여 함께 놀았던 절친한 사이였던 터였다.

그런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길거리 공연은 좀…" 하고 발을 뺄 수 있기란 좀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그럼요, 같이 해야죠. 원래 지완이랑 같이 기획한 거랑께요" 하고 뻥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음악회는 그렇게 술자리에서 설렁설렁 시작되었다! 모든 기획은 그런 거 아니겠어?

술자리에서 시작된 쓰레빠 음악회.
▲ 쓰레빠 음악회 사진 (1) 술자리에서 시작된 쓰레빠 음악회.
ⓒ 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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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안 작성이 시작되었다. 기본적인 골자는 모두 은정 누나가 맡아 구성키로 했는데, 기획안을 써본 경험이 없다기에 시가지에서 만들었던 기획안들을 참고하라고 건네주었다. 그러는 사이 음악회의 이름을 놓고 은정 누나와 은실의 격론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최종심까지 올라온 후보는 "쓰레빠 음악회"와 "시지프"였다. 전자는 은정 누나의 아이디어로, 말죽거리에서 보내던 학창 시절 야밤에 친구들과 쓰레빠를 신고 나와 수다를 떨던 기억을 되살린 것이었고, 은실이 추천한 후자는 "시니문(신이문)에서 지랄하는 프로젝트"의 약자였다.

"시지프"는 몇몇 사람들의 강력한 항의에 직면했고, 결국 이름은 "쓰레빠 음악회"로 결정되었다. 해가 지는 초저녁에 쓰레빠 신고 마실 나오듯 놀러 나와 음악도 듣고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며 놀자는 의미가 다정하게 어필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름 짓기가 가장 어려운데, 큰 시름 놓았다. 휴!

펜디 모피 패션 쇼? 하~ 펜타포트? 쳇~ 우리는 쓰레빠다!

마침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에서는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이하 자립)과 몇몇 학생들이 의기투합하여 "클럽 대공분실(이하 대공분실)"을 개장하기 위한 연석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음악 공연뿐만 아니라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씬(scene)이 홍대 앞, 이젠 생각하기도 지긋지긋한, 에만 국한되어 있는 작금의 현실에 대항하여 한예종을 거점으로 주변 여러 대학과 지역 주민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로컬 씬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 대공분실이다. 여하간 쓰레빠 음악회에서 공연할 회기동 단편선(이하 단편선)과 하헌진 역시 자립 소속인데다가 비슷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인 만큼 쓰레빠 음악회의 기획안을 들고 대공분실 회의를 찾아갔다. 

회의에는 자립 사람들과 한예종 학생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잠시 틈이 난 사이에 음악회에 대한 기획을 얘기해주었다. 대공분실 관리를 맡은 이랑은 "할 거면 하지 굳이 말할 게 뭐 있냐" 하고 시큰둥했고, 밤섬 해적단의 장성건과 단편선은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음악회에 사용할 장비와 인력을 자립과 한예종 동아리 연합회에서 빌려야 할 입장이었으므로 최대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단편선과 하헌진의 공연 섭외는 그들과 절친한 지완이 맡았고, 장비 문제는 내가 해결하기로 했다.

밴드 섭외와 장비 대여는 그렇게 큰 어려움 없이 성공! 특히 장비를 외부 업체에서 빌릴 경우 어마어마한 돈이 들기 십상인데, 이렇게 학교나 관련 단체와 끈이 닿아 있으면 상당히 저렴하거나 말만 잘 하면 공짜로 빌릴 수 있다. 그러니 평소에 술 먹고 싸우지 말고 두루두루 친하게 지낼 것!

사실 음악회의 라인업을 두고 지완과 나 사이에 많은 말이 오갔다. 라인업에 밴드를 포함시킬 것이냐, 아니면 밴드 사운드를 완전 배제하고 어쿠스틱 세트로만 구성할 것이냐에 따라 음악회의 성격이 크게 달라지는 까닭에 이는 무척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밤섬 해적단을 비롯하여 밴드 공연도 마련하자는 쪽이었다. 전철이 시끄럽게 오가는 길거리에서 어쿠스틱 공연이 들리기나 할까? 기왕 소란을 피울 것이라면 아주 강하게 한 방 먹여야지! 예컨대 밤섬 해적단의 불온하기 짝이 없는 록 음악처럼… 그러나 지완은 신중했다.

이번 한 번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음악회를 할 건데 처음부터 야단법석(하긴 밤섬 해적단의 소음은 노인들에게 그야말로 무기다)을 치면 추후에 안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좋은 이미지를 심고 시작하자는 것이 지완의 전략인 셈. 물론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음에도 나는 밴드를 쉽사리 포기할 수가 없었다. 물론 내가 몸담고 있는 "소프트 크림∼" 역시 밴드 구성이라는 점 역시 크게 작용했지만… 대화를 듣고 있던 장성건도 "우리는 일본에서 공연할 때 두 번이나 경찰 왔어!" 하고 겁을 줬다.

나 역시 신이문 쪽에서 영화 촬영하다 시끄럽다며 주민에게 욕이란 욕은 잔뜩 먹은 기억이 있기에 "밴드가 시끄럽긴 하지…" 하고 위축되었다. 결국 지완의 의견에 수긍하기로 결정! 1회 쓰레빠 음악회에는 밴드 없이 팀을 구성하기로 하였다.

기획 회의를 하는 우리들.
▲ 쓰레빠 음악회 사진 (2) 기획 회의를 하는 우리들.
ⓒ 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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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의 모든 이야기들을 기획안에 잘 정리하여 신이문역을 찾아갔다. 역 앞에서 공연을 성사시키려면 어떻게든 역장을 구워삶아야 했다. 아무리 취지가 좋든, 공연의 라인업이 좋든 역장이 "흐응, 그래도 여기선 안 돼" 하고 딱 잘라 거절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그 중대한 임무를 맡은 건 은정 누나였다. 확률은 반반이었고, 우리로선 그 결과를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에 도리가 없었다. 저녁에야 학교로 돌아온 은정 누나가 들려준 얘기는 실로 놀라웠다.

역장은 쓰레빠 음악회를 무척이나 반겼다! 이런 기획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과 함께… 그렇지 않아도 한예종에 찾아가 학생들에게 비슷한 행사를 부탁하려고 했다며 "예술학교 학생"들의 자발적인 지원을 몹시 감동한 눈치더란 거였다. 아닌 게 아니라, 역장은 몹시 적극적이었다(너무 적극적이어서 탈이었다). 그 즈음에 무슨 사진 전시회를 역에서 하는데 같이 하는 게 어떻겠느냐, 어두컴컴하고 칙칙한 1번 출구 앞보다 2번 출구가 낫지 않겠느냐, 신이문역이 아니라 성북역에서 하진 않겠느냐… 그 부탁들을 하나도 들어주지 못하는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쓰레빠 음악회는 이미 신이문역 1번 출구에서, 5월 13일 금요일에 하기로 내부 방침을 공고히 세운 터였다. 장소와 시간을 변경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전하자 역장은 아쉬워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런데 돌아가려는 은정 누나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역 앞은 우리 관할이 아닌디… 아니, 이건 또 무슨 봉창 두들기는 소리? 알고 보니 신이문역이 관리하는 범위는 역사까지고, 출구 계단 밖부터는 동대문 구청 관할이란다. 이 아저씨, 그럼 지금까지 무슨 소리를 한 거야!

결국 은정 누나는 신이문 주민 센터를 다시 찾아가야 했다. 여기서 만난 담당자 아주머니 역시 환영 일색이었다. 좋아하면서도 "이 기획, 응봉역에서 하면 어떨까?" 하고 딴소리를 했지만. 역장이나 담당자 모두 전철 문화 공연이란 명목으로 우리를 끼워 넣으려는 심산인 듯했다. 헹, 그런 생각이면 번지수 잘못 찾았다고! 음악회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하니 공간 사용과 포스터 부착은 자기 선에서 해결하겠단다. 조금 의뭉스럽긴 하지만, 여하간 친절하고 호의적인 관계자 여러분 덕분에 행정적인 절차를 매우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핫! 챠! (나중에 우리들은 이것이 착각이었음을 온몸으로 고생하며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잘만 얘기하면 공무원들도 우리 편이라네

제일 문제될 것 같았던 역 앞 공간 섭외가 무리 없이 해결되자 남은 것은 공연 팀을 구하는 것과 포스터 제작이었다. 단편선과 하헌진은 지완이 공연 전부터 얘기를 해둔 상태라 큰 어려움은 없었고, 또 다른 뮤지션인 "이류" 역시 공연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터라 쓰레빠 음악회 얘기를 하자 무척 반가워했다. 라인업은 그렇게 대강 갖춰졌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포스터 디자인을 맡겠다고 선뜻 자처한 사람들이 모두 꽁무니를 내뺀 것이다.

하여간 이 바닥 사람들은 너무 재미있게 노느라 할 일을 망각하거나 스스로 짊어진 일의 무게에 허덕여 정신을 못 차린다니깐! 덕분에 은정 누나만 고생의 바가지를 뒤집어써야 했다. 그녀는 신이문 일대에 붙일 포스터 수십 장을 스텐실 기법을 이용해 혼자 밤늦도록 만들었다. 직접 오린 스텐실 종이와 페인트, 그리고 롤러로 말이다! 작업이 끝나갈 무렵에야 합류한 소프트 크림∼ 일당들도 도전해봤는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공작 능력에 있어 장애 판정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영조 같은 경우는 그 고된 노동에 실신할 뻔했다.

견본을 포스터 위에 올리고 페인트를 묻힌 롤러를 밀면 된다.
▲ 쓰레빠 음악회 사진 (3) 견본을 포스터 위에 올리고 페인트를 묻힌 롤러를 밀면 된다.
ⓒ 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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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으로 음악회가 있는 주중에 내내 비가 내렸다. 비닐에 포장하여 붙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노력에 비해 효과가 좋을 것 같지 않아 포기하고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포스터 부착과 공간 사용에 대한 허락을 확실히 받기 위해 다시 한 번 주민 센터와 신이문역을 찾았다. 그 전에 이미 전화 통화와 전자 메일로 최종 확정된 기획안을 발송하고, 구두로 언질을 받긴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공무원들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존재였다!

공문을 통해 해당 부처에 협조를 구한 것처럼 말하던 담당자 아주머니는 책임자가 지금 자리에 없다며 "당일에 그냥 몰래 붙이면 안 될까?" 하고 눙치려는 기색이었고, 역장 아저씨는 뜬금없이 학교 공문과 도장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전까지 아무 말도 안 하다가 공연이 코앞인데 이제 와서 그러면 어쩌라고요… 싸워봤자 일만 그르칠 터이니 원하는 동아리 연합회 직인을 서둘러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학교의 동아리 연합회장인 명교에게 문의를 하니 직인은 애초에 있지도 않단다.

이대로 물러날 우리가 아니다. 얼른 역 앞에 있는 도장 가게로 달려가 직인을 새로 파기 시작했다. 없는 돈 털어가며… 도장 가게 할아버지는 마지막 남은 장인처럼 정말 신중하게 글씨를 새겼고, 긴 시간 끝에 겨우 얻은 직인을 들고 역장에게 돌진! 그런데 역장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엉? 직인은 필요 없어! 이 아저씨가 벌써 노망이 들었나… 방금 전까지 직인 없으면 허락 안 해주겠다며 난리더니 무슨 딴소리? 황당하여 졸도할 지경이었지만 어쩌겠는가. 관료 사회를 원망하여 그저 참을 수밖에. 역 관리실 컴퓨터에 앉아 역장의 지시에 따라 한참 공문서를 만든 끝에 소동은 겨우 일단락됐다.

먹구름은 기적처럼 공연 전날인 목요일에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은정 누나와 지혜가 역 앞의 거리를 맡고, 나와 명교는 석관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에 포스터를 부착하기로 하였다. 명교가 포스터를 들고 있으면 내가 테이프를 떼어주는 식으로. (테이프의 점성이 어찌나 강하던지 나중에는 지문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학교 앞 주택가에만 대강 붙이려던 우리는 생각보다 포스터가 많이 남아 주변을 정처 없이 배회했다. 후미진 여관 골목부터 재개발 반대 벽보가 덕지덕지 붙은 담벼락과 석관 시장, 인근의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마수를 뻗치는데 주저가 없었다.

나나 명교나 입학한 이후로 석관동에서 5년 가까이 비비적거렸음에도 여태 모르는 장소가 참 많았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촘촘하게 얽힌 거미줄 골목부터 밝은 햇살과 활력이 미약하게나마 반짝이는 시장,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머리가 천장에 닿는 간이 터널, 지하철 역 뒤편의 꼼장어 가게, 고가 아래서 고스톱에 열중인 노인들… 더욱이 동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대부분 장년층)은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포스터의 내용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호의적인 관심을 내비쳤다. 이는 정말이지, 무관심과 냉소로 팽배한 교내에선 결코 찾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변함없이 흘러가는 하루에 진력이 나 뭔가 재미있는 소동이 나지 않을까, 눈을 번뜩였는데 사실 그것은 우리가 청년들에게 기대하는 반응이었다. 그런 면에서 무척 아쉽긴 했다. 하지만 그들만 탓할 순 없는 것이, 먼저 요즘의 청년들은 놀 틈도 없이 바빴다. 리포트와 조별 과제에 치이는 대학생들은 그나마 나은 수준이고, 수험과 내신 관리에 목을 맨 중고교 학생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뜨거운 지옥에서 쉼 없이 탭댄스를 추는 꼴이니 말이다. 대체 전생에 무슨 죄가 있기에… 그런 망상을 입증하듯 포스터를 붙이는 내내 동네에서 청년들은 거의 만나볼 수 없었다.

고스톱에 한창이셔서 포스터에는 관심 무!
▲ 쓰레빠 음악회 사진 (4) 고스톱에 한창이셔서 포스터에는 관심 무!
ⓒ 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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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밖으로 나오니 별천지일세!

낯익으면서, 동시에 더없이 낯선 석관동을 걸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청년들이 자본과 소비 없이 즐길 수 있는 놀이판이 없다, 문화가 없다, 다른 누군가에게 그걸 기대하면 안 된다, 포섭되면 안 된다, 우리가 직접 만들어 나가야 한다, 지역의 결을 살리면서,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말이다. 쓰레빠 음악회가 출발하게 된 대강의 대의에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렇지만 왜 석관동이란 말인가? 단지 우리 학교가 있는 동네라서? 명색이 예술 학교인데 동네에서 공연 한 번 하지 않는 게 이상스러워서?

사실 내겐 석관동에 대한 애정이 거의 없었고, 그런 까닭에 열심히 준비하면서도 한편으론 의구심을 몰래 품었다. 더군다나 지역 문화라면 내가 태어나고 훨씬 애정이 깊은 고향 남양주에서 진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서울 토박이이자 도시 예찬자 명교의 생각은 어떠할까. 시가지의 정치적 배후를 자처하는 인물답게 그는 석관동이 강북 지역 가운데서도 가장 문화적으로 소외된 곳임을 지적했다.

또한 자본에 잠식된 홍대 앞, 강남 등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로컬 씬을 만들려는 입장에서 석관동 일대는 퍽 좋은 조건을 지녔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경희대, 한국외대, 한예종을 포함하여 서울시립대, 광운대 등 주변의 대학이 밀접하게 붙어 있어 청년들의 연대를 꾀하기가 수월한 것 역시 큰 이점이었다(물론 대학생만이 청년 문화를 생성하고,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나는 오히려 대학생들보다 중고교생과 같은 "틴에이지"들에게 훨씬 많은 기대를 하고 싶다).

명교는 심광현 교수의 책을 인용하며, 앞으로 자의적으로나, 타의적으로나 여가 시간이 많아질 텐데 노동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놀기 위해 살아야 하는, 즉 노동 사회에서 문화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말은 평소 고민하고 있던 지점을 정확히 관통했고, 그 이후부터 깨달음을 얻었단 얼굴로 포스터를 붙일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이 일주일 전부터 미리 이루어졌으면 좋았겠지만 말이다.

간이 터널 안에 붙은 포스터. 불빛이 멋지다.
▲ 쓰레빠 음악회 사진 (5) 간이 터널 안에 붙은 포스터. 불빛이 멋지다.
ⓒ 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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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당일의 이야기과 후일담은 후편에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시도와 가능성 웹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시도와 가능성 웹진 http://si-ga.tistory.com/)



태그:#쓰레빠 음악회, #지역 문화, #거리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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