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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수련회에서 미션 놀이를 했다. 팀을 짜서 여러 가지 설정 사진을 찍어 가장 재미난 것을 뽑는 콘테스트 같은 것이었다. '빵 터지는 사진' '무서운 사진' '배고픈 사진'  등 미션은 아주 다양했는데, 그중 하나가 '럭셔리한 사진' 찍기였다.

미션 수행에서 가장 독창적 사진을 찍은 그녀.
만원으로 이쑤시는 그녀는 얼마나 럭셔리한가
▲ 럭셔리 사진 미션 수행에서 가장 독창적 사진을 찍은 그녀. 만원으로 이쑤시는 그녀는 얼마나 럭셔리한가
ⓒ 김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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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세워진 외제차 앞에서 집 열쇠를 들고 따는 척을 한다든지, 각종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사진을 찍는다든지, 여러 가지 설정이 나왔는데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만 원짜리로 이를 쑤시는 설정 사진이었다. 만 원짜리로 이를 쑤시고 있는 그녀는 진정 럭셔리해 보였다.

그만큼 우리에게 '만 원'은 꽤나 값진 돈이었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오마이뉴스> 기자의 전화를 받기 전까진 말이다.

점심값만 8000원인데, 만원으로 하루를 버티라고?

"하루 만 원으로 버티는 직장인 콘셉트로 기사 쓸 수 있겠어요?"
"음, 무지 쉬울 것 같은데요."
"출퇴근 교통비에 점심 사 먹지 않아요? 거기다 커피도 마실 테고."
"어, 그러네요."


내가 근무하는 곳 삼청동은 점심값도 꽤나 비싼 편이다. 그러고 보니, 단골 청국장집의 청국장도 얼마 전 7000원에서 8000원으로 올랐다. 점심 먹고 나면 간단하게 아메리카노 테이크아웃은 기본인데…. 생각해 보니 나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특별한 약속이 없어도 하루에 만 원을 훌쩍 넘기는 돈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이참에 만 원으로 과연 하루를 살 수 있는지 도전해보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차비 2000원을 빼고, 나머지 8000원으로 하루를 살 수는 없었다. 점심과 저녁을 4000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던가. 굶는다고? 예전에 <오마이뉴스> 청탁 원고 때문에 소녀시대 식단 체험하다 죽을 뻔한 적이 있다. 그 뒤로 내 사전에 단 한 끼라도 굶는 건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한 끼는 사 먹고, 나머지 한 끼는 얻어먹어야 한다. 달력을 봤다. 아뿔싸, 다음 날은 후배와 점심약속을 해놓았다. 늦깎이에 다시 학생이 된 후배에게 풀코스로 무차별 점심을 쏴도 모자랄 판에, 나는 하루를 만 원으로 살기 위해 비굴한 카카오톡 메시지를 날렸다.

"내가 이러저러 미션을 수행해야 해서…. 내일 점심은 네가 사줘."
"네, 언니- 나도 요즘 개털이긴 한데, 그래도 밥 쏠게요."


손발이 오그라들도록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답장이지만 애써 말을 번복하진 않는다. 그렇게 부끄러워하며 점심을 챙겨먹었다.

밥은 굶어도 커피는 사 먹어야 한다는 요즘 시대, 나도 사실 된장녀 수준으로 커피맛을 따지며 커피를 즐기는 여자다.

"밥은 네가 샀으니, 커피는 이 언니가 쏘마."

한층 소극적이 된 목소리로, 굳이 멀고 먼 길을 돌아 커피집 앞에 당도했다.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그래, 모두가 짐작한 바대로 커피 모양 스티커가 10개나 붙여져 있어 하나를 공짜로 먹을 수 있는 쿠폰이 있었기 때문이다.

차마 커피마저 얻어먹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두 잔을 사면 나의 저녁 먹을 돈은 홀연히 사라지기 때문에 선택한 곳이다. 쿠폰을 꺼내고, 테이크아웃 1000원을 할인하여 3500원을 냈다. 

돈 만원 물고 있을 땐 럭셔리해 보이더니, 단돈이구나

점심시간마다 펼쳐지는 도시락파티. 각자가 집에서 정성껏 장만한 음식들을 싸와 함께 나누면 맛도 두 배, 즐거움도 두 배가 된다.
 점심시간마다 펼쳐지는 도시락파티. 각자가 집에서 정성껏 장만한 음식들을 싸와 함께 나누면 맛도 두 배, 즐거움도 두 배가 된다.
ⓒ 김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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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돈으로는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을 안다. 그곳 외에는 어디도 내가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곳은 없다. 그곳은 김밥천국. 김밥뿐 아니라 자취생들의 천국이자 낙원으로도 불리는 곳이다.

작은 체구를 지녔지만 뱃속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엄청나서 한때 이장육부(심장과 위장만 존재하는 여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나답게, 이토록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고 왔는데 김밥 한 줄로 배를 채우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참치김밥을 한 줄 더 시켜서 누구에게 뺏길새라 열심히 먹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내게 남은 돈은 500원이었다. 비굴하게 점심을 얻어먹고, 아끼고 아껴두었던 커피 쿠폰을 쓰고, 고작 김밥 두 줄로 저녁을 때우고 남은 돈은 500원. 중고등학교 때 엄마에게 일주일 용돈으로 받았던 어마어마하게 큰 돈 만 원, 그 엄청나게 큰돈을 3일쯤 되던 날, 간 크게 다 써버리고 금요일쯤 쭈뼛쭈뼛 거짓말로 문제집 산다며 몇 천원을 더 받아갔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런 거금이 어느새 '단돈'이 되어 있었다.

'자취' 딱지를 붙이지 않은 직장인들이 있다. 잔소리하는 엄마 밑에서, 혹은 바가지 긁는 아내에게서 꾸역꾸역 도시락을 싸오는 꿋꿋한 직장인들 말이다. 오늘 새삼 그와 그녀들이 부러웠다. 아직 그들에겐 '만원'으로 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일들이 많을 것 같다.

별다른 약속이 없어도 직장인의 하루는 돈 만원으로 버텨내기 어렵다. 취사와 거리가 먼 게으른 자취생이자 노처녀는 오늘 밤새 고민할 것 같다. 쥐꼬리 월급에도 돈 '만원쯤이야!' 하며 배부른 정신으로 배고픈 인생을 사느냐, 아니면 아침 일찍 일어나 소질도 없는 도시락을 싸는 스트레스를 참아가며 만원을 아껴보느냐, 정녕 그것이 문제로다.


태그:#물가, #만원, #직장인, #배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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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도 순식간에 뒤집어 즐겁게 살 줄 아는 인생의 위트는 혹시 있으면 괜찮은 장식이 아니라 패배하지 않는 힘의 본질이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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