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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소생하신 노친이 새봄과 함께 외출을 시작하셨습니다. 지난 3일(목) 오후에는 참으로 오랜만에 조석시장에도 가셨습니다. 손녀와 함께 저자에 가셔서 깐 마늘과 대파 따위 양념거리들을 사는 일에 관여하시고, 어물전에서는 생선 고르시는 일을 했습니다.

 

노친이 저자 골목에 들어서니 채소전과 어물전에서 장사를 하시는 아주머니들이 하나같이 일어서서 노친께 인사를 하고, 손을 잡기도 하고, 반가움을 표했습니다. 대개는 오랜만에 보는 데서 갖는 반가움의 표시였지만, 저자 골목 아주머니들 중에는 내 노친이 오래 병고를 치르시며 거의 별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가 소생하신 사실, 그 병고의 내용과 소생의 과정까지 소상히 알고 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나타내는 반가움 속에는 '경탄' 같은 것이 농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승용차로 노친을 조석시장에 모시고 가고 또 뒤를 따라다니면서 카메라를 휴대하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했습니다. 저자 골목 안에서 여러 아주머니들이 노친께 다투어 인사를 하며 반가워하고 경탄도 하는 모습들, 여러 아주머니들 가운데 둘러싸여 뭔가를 열심히 '자랑'하시는 노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이 참 아쉽습니다. 앞으로도 노친이 저자에는 또 가시겠지만, 오랜만에 처음 발걸음 했을 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야 하는데….)

 

노친은 3월 첫 주일(6일)에는 성당에도 가셨습니다. 역시 오랜만에 성당을 가신 것입니다. 지난해 11월 이후 해를 넘기고 겨울을 다 보내는 동안 지난 1월 13일(목) 단 한 번 성당에 가셨을 뿐입니다. 한겨울의 추운 날씨임에도 노친이 그날 성당에 가신 것은, 47년의 역사를 가진 태안성당에서 세 번째로 탄생한 새 사제의 '첫 미사'가 봉헌되는 날이기 때문이었지요.

 

2003년 두 번째 사제 탄생 이후 8년 만에 세 번째 사제가 탄생되어 출신 본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는 날, 노친의 기쁨은 누구보다도 컸습니다. 새 사제 탄생을 위해 오랫동안 매일같이 기도를 하며 물심양면으로 정성을 다했던 노친이었습니다. 그런 처지이기에 천안에서 열리는 사제서품식에는 가지 못했지만 출신 본당에서 봉헌되는 새 사제의 첫 미사에는 꼭 참석하고자 했지요.

 

노친은 살아생전에 세 번째 사제 탄생도 보게 되고, 또 눈 감지 않고 병상에서 일어나 멀쩡한 정신으로 새 신부의 첫 미사에 참례하고 당신의 두 발로 걸어 나가 새 신부의 안수까지 받으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노친은 한동안 성당에 가지 못했습니다. 우선은 올겨울의 유난스러운 추위에 내가 겁을 먹은 탓이었습니다. 2009년 6월 초 말기 폐암 진단을 받았던 노친이었습니다. 기적적으로 폐암을 극복했지만, 바깥출입으로 자칫 감기라도 걸리면 노친의 폐에 또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오면 바깥출입도 하고 성당에도 가기로 노친과 약조를 했지요. 

 

그리고 3월의 첫 주일인 6일, 어느 정도 온화해진 날씨를 느끼고 노친을 다시 성당에 모시고 갈 수 있었습니다. 역시 많은 신자들이 노친을 반가워하며, 건강해진 모습에 감탄을 하기도 하고, 축하인사를 건네기도 했습니다.

  

<2>

 

얼마 전에 노친의 위쪽 부분틀니를 지탱시켜 주던 앞니 두 개가 모두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양쪽에 남아 있던 두 개의 앞니에다가 부분틀니를 걸듯이 착용하고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노친이 요양병원에 계실 때, 내가 하루 세 번씩 요양병원을 갈 적마다 가장 신경을 쓴 일이 틀니를 끼워드리는 일과 식사 후 틀니를 빼어 물에 깨끗이 씻어 소독상자에 넣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위쪽 부분틀니를 끼우거나 뺄 때 더욱 조심을 해야 했습니다. 혹 먼길 출타를 하게 되면 요양보호사에게 특별히 부탁을 했고, 요양보호사가 바뀌게 되면 내가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지요. 하지만 세 끼 식사 때마다 노친의 틀니를 끼우고 또 빼내는 일은 거의 내 전담 사항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동안의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 생활과 7개월 동안의 태안 요양병원 생활을 마치고 지난해 7월 5일 퇴원하신 후 위쪽 부분틀니를 지탱시켜 주던 노친의 앞니 두 개가 차례로 부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부분틀니의 구부러진 쇠붙이가 감기는 치아 밑 부분이 점점 삭는 상태를 보이더니 결국 견디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나는 즉시 노친께 전체틀니를 해드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노친이 처음에는 사양을 했습니다. 병이 나아 일어서기는 했지만 다 산 목숨이니 굳이 돈들일 필요 없다는 것이었지요. 틀니가 없어도 이뿌리들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 살살 잇몸으로 부드러운 음식이나 먹으며 살겠다는 굳은 의지를 내보이기도 했습니다. 노친의 그런 말 속에는 자식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어려 있었습니다.

 

나는 노친을 설득해야 했습니다. 이왕 병을 이기고 일어났으니 더욱 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병을 이긴 보람이 있지 않겠느냐는 말도 했습니다. 내가 자랑스럽게 '기적을 만들었다'는 말도 하고 다니는데, 어머니가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 내 말이 진실이 되지 않겠느냐는 말도 했지요. 노친이 건강하게 오래 사시려면 음식을 골고루 잘 드셔야 하고 또 저작을 잘 하셔야 하니 전체틀니는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노친의 의치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부분틀니가 아닌 전체틀니였습니다. 그런데 치과의원에서는 아래쪽 부분틀니는 그대로 두고 위쪽만 전체틀니를 만들면 된다고 했습니다. 이틀 간격으로 위쪽 이뿌리를 한 번에 하나씩, 모두 제거하는 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름여 동안 잇몸이 아물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매번 노친을 모시고 치과의원을 다닌 내 수고보다도, 매일같이 정성스럽게 호박죽이며 야채 죽을 끓여 공급을 한 아내의 수고가 더 크지 싶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환자 본인의 노고가 가장 클 터였습니다.

 

지난달 22일 노친의 의치 공사는 종료되었습니다. 다행히 의치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치과의원 원장은 의치가 잘 맞지 않는 것 같으면 언제든 다시 오라고 했지만, 노친은 불편한 데가 없다고 합니다. 자신의 원래 이가 아니니 우둔한 느낌이 늘 있지만 차차 적응이 될 거라는 말로 자신을 위안하기도 합니다.

 

비용은 120만 원이 들었습니다. 삼형제가 40만 원씩 분담을 했지요. 기꺼이 분담을 해준 동생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습니다. 아들을 셋이나 두신 노친께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3>

 

노친의 의치 공사가 끝난 이후로 세 번 외식을 했습니다. 노친의 의치공사 기간에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외식입니다. 한 번은 안양에서 사시는 누님이 오셔서 비용을 대주었습니다. 노친의 한결 건강해진 모습을 보며, 또 잘 맞는 의치로 고기 음식도 잘 드시는 노친의 식사 모습을 보며 누님은 더없이 기쁜 표정이었고, 친정동생 내외에게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이나 했습니다.

 

재작년 6월 노친이 말기 폐암과 임파선 암 선고를 받았을 때는 오늘의 어머니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 때 그분에 관한 과거 글들을 <오마이뉴스>에 올린 일이 계기가 되어 내 건강을 묻는 어떤 분(중국 복건성 거주)의 메일을 접하게 되었고, 그분의 조언과 도움으로 노친께 대체의학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말이 쉬워 식이요법이고 대체의학이지, 그것은 가족들의 '노고와 정성의 집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노친의 폐암은 극복되었지만, 암세포가 엉덩이뼈로 전이되고 확장되면서 골반의 암세포 부위가 골절되어 노친은 일어서지도 못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2009년 11월 한 달 꼬박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에서 지내야 했고, 거의 임종 직전 상태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부터 지난해 7월 5일까지 일곱 달을 태안의 한 요양병원에서 병상생활을 했습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일어서지도 못했지요. 휠체어를 타고 화장실을 다녀야 했는데, 4월 초 어느 날 화장실을 가기 위해 노친을 휠체어에 태울 때 내 두 팔의 힘이 덜 드는 것을 느낀 순간부터 나는 노친의 회복을 감지하게 되었습니다.

 

2년 전에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던 노친, 암세포가 골반으로 전이되고 확장되면서 바로 그 부위가 골절되어 걷지 못하게 되었던 노친입니다. 올해 연세 88세입니다. 그런 노친이 아픈 데 없이, 자신의 두 발로 걷고 움직이며, 새로 착용한 의치로 음식도 잘 드시며 건강하게 사십니다.

 

의학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일 것 같습니다.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노친에게서 생겨난 것입니다. 나는 내게 여러 가지 정보를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시간 쓰고 수고하며 내게 정보를 주신 분들께 보람을 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한 가지도 거부하거나 기피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해 처음부터 전적으로 믿지는 못했지만, 일단은 최선을 다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내가 직장에 매인 몸이거나 생업에 쫓기는 처지라면 그것도 어려울 것입니다. 내가 '자유직업인'이기에 모든 일이 가능했습니다. 자유직업인 처지임에도 기피하거나 태만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새 의치 착용 후 처음 성당에 가신 노친은 좀 더 활달하고 자신 있는 모습인 것 같았습니다. 전에는 웃을 때나 말을 할 때 손으로 입을 가리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노친은 자유롭게 웃고, 또렷한 발음으로 말도 잘합니다.

 

임종 문턱에까지 갔다가 회생을 하고 건강해지게 되셨으니, 오래오래 사셔야 노친에게도, 애쓴 나나 가족 모두에게도 보람이 될 것 같습니다. 이왕 '허락'을 받았으니 거뜬히 구순도 넘기고, 100세까지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선은 올 가을의 88세 생신, 미수(米壽)를 잘 지내셨으면 싶습니다. 2년 동안의 투병 끝에 소생을 하고 건강해지신 상태로 미수 해를 맞으셨으니, 노친의 미수는 더욱 각별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올가을의 노친 미수 잔치를 지금부터 생각하고 있습니다.

 

 


태그:#노친건강, #대체의학, #식이요법, #요양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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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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