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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옹호하다>의 저자 '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의 저자 '테리 이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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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젠가 많은 이들이 반짝이는 인간의 '이성'으로써 과학에 반대되는 종교의 비논리 성을 입증하면, 신을 믿는 사람들이 사라져 자연스레 종교에서 비롯되는 여러 해악들도 사라질 것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에 많은 사상가들이 왜 신은 환상이며 그 존재와 증명이 불가능한지 밝히려 무던히도 애썼고, 사실 적잖은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그 시대를 우리는 '계몽주의 시대'라 분류한다.

그 이후로 수백 년이 흘렀다. 신은 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신은 건재하고, 도리어 훨씬 강성한 힘을 얻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신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때의 사상가들이 말했던 것처럼 여전히 인간의 계몽과 지식일까? 아니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그 자체에 결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느 '맑시스트'의 무신론 비판서

테리 이글턴의 <신을 옹호하다>
 테리 이글턴의 <신을 옹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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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문제의 본질을 그때의 계몽주의자들처럼 인간의 계몽과 지식의 부족이라 말하는 이들은 지금도 있다. 그 선두에는 역시 유명한 진화론자이자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다. 한국에서도 그가 쓴 책인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은 적잖은 판매고를 올리며, 일부 기독교도들의 행태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에게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그 책에서 신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논리들은, 기실 수백 년 전에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주장했던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또한 그가 가지는 신에 대한 시각 자체에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은, 종교의 원리에 우리가 이어나가야 할 중요한 '원칙'과 '믿음'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현재 영국 랑카스터 대학의 교수이자, 작년 9월 한국을 방문해 여러 대학 강연을 통해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역시 그런 이들 중에 한 명이다. 그의 책 <신을 옹호하다(Reason, Faith and Revolution)>는 그런 입장에서 쓰인 일종의 '맑시스트의 무신론 비판서'다.

물론 저명한 맑시스트인 테리 이글턴이 '신'이라는 관념에 대한 옹호에 적극적이라는 것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다. 처음엔 나도 그랬다. 알다시피 맑시즘 만큼 종교와 대립각을 세운 사상이 달리 어디 있었던가. 하지만 테리 이글턴은 반대로 '맑시스트이기 때문에' 가능한 신에 대한 옹호를 이 책을 통해 들려준다.

맑시즘의 근본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알다시피 바로 '휴머니즘'이다. 그것은 약자에 대한 연민에 기원하고, 연대를 통해 사회를 더 낫게 바꿀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기독교는 어떨까. 민족종교로 출발한 기독교는 사실 신약에 와서야 분명한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예수'가 있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것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약자에 대한 애정, 이방인에 대한 환영, 권력에 대한 저항 같은 것이었다. 여기서 테리 이글턴은 맑시스트로서의 자기 입장과 기독교의 기원을 연결한다.

물론 그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기독교라는 거대한 집단과 일종의 이념이 보여준 실망스런 모습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실망스런 모습들이 기독교의 전부가 아닐뿐더러, 도킨스와 같은 무신론자들이 비판하는 방식으로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님을 지적한다. 실제로 종교, 그 자체가 사람들을 그런 악덕으로 몰아가는 내적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앞서 지적했듯 약자를 위해 권력에 대항할 것을 주문한 기독교는 본질에 있어 '혁명적'이다.

그럼에도 무수한 악덕이 종교의 이름으로 재생산 된 것은, 종교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종교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힘의 탓이라고 그는 <신을 옹호하다>에서 주장한다.

중동 진보의 결림돌은 '신'이 아닌 '인간'

테리 이글턴은 세계 곳곳에서 신을 빙자해 발생하는 여러 갈등과 문제는, 결국 신이나 종교가 아닌 인간과 사회구조적인 문제라 지적한다.
 테리 이글턴은 세계 곳곳에서 신을 빙자해 발생하는 여러 갈등과 문제는, 결국 신이나 종교가 아닌 인간과 사회구조적인 문제라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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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이 말하는 것은 예컨데 이런 것이다. 중동 지역의 오랜 정치경제적 좌절은 그곳 사람들을 신에게 매달리도록 강요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신의 이름으로 연대했고, 신에게 충실한 자를 민주적 절차 없이 권력을 이양했으며, 자신들이 겪는 고난의 원인이라 생각되는 것에 대해 신의 이름으로 총과 칼을 들어 대항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결국 중동의 원리주의자들은 고통에 대한 종교의 위로가 낳은 최악의 기형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서 사실 '종교'는, 한낱 겉껍질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글턴은 지적한다. 이를 다른 말로 바꿔하면 그러한 중동지역의 정치경제적 실패를 해결하지 않는 한,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이러한 참극은 결국 다른 모습으로 무수히 반복될 것이란 뜻이다. 즉, 중동에서 일어난 일련의 비극과 더딘 민주화, 그리고 테러는 결국 인간의 문제이지 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도킨스와 무신론자들이 지적한 종교와 신에 대한 비판방식은 결국 중동을 비롯해 현재 곳곳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진짜 원인을 '신'과 '종교'라는 문제로 눈 돌리게 만들었고, 신이라는 허상이 마치 모든 문제의 중심인 것처럼 착각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신론자들의 주장은 더 나아가 사실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며,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문명의 충돌>과 같이 '계몽'과 '이성', '문명'과 '야만'과 같은 편의적이고 오만한 이분법에 인식을 가둔 채 진짜 해결책에서 멀어지게 했다는 것이 이글턴의 주장이다.

더구나 논리적인 비판이란 방식으로 종교를 제거할 수 있다는 자체가, 테리 이글턴이 보기엔 허구다. 그는 논리와 같은 '이성'적인 것의 존립근거, 그 자체가 이미 '믿음'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보수주의자들이 보는 진보주의자, 진보주의자가 보는 보수주의자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과 시각 차이는, 추론과 같은 이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나 혹은 자본주의에 대한 이끌림처럼 '믿음'에 대한 차이에 기인한다. 즉, 인간의 '이성'은 결코 '믿음'과 같은 종교나 신에 대해 가지는 추상적인 개념과 분리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이 신을 비판함으로써 얻어내고자 했던 가치들, 그리고 도킨스가 신을 비판해서 얻어내고자 했던 성과들의 가치 역시 이성적인 수단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즉, 무신론자 그들이 믿는 신은 '무신'이라는 신이며, 그들이 가지는 종교는 '무신론'이라는 종교다. 이런 맥락에서 사실 진정한 신화는 도킨스가 말한 '신화와 미신의 해로운 유산을 떨쳐내기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연설 그 자체다. 그는 결국 허구를 지적하는 허구를 말했던 것이다.  

'신', 그리고 '인간'을 위하여

그는 '이성'과 '믿음'이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님을 지적하며, 논리와 이성으로 인간의 자유를 말하는 무신론의 허구를 비판한다.
 그는 '이성'과 '믿음'이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님을 지적하며, 논리와 이성으로 인간의 자유를 말하는 무신론의 허구를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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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테리 이글턴은 목욕 후에 더러워진 목욕물은 버리되, 깨끗이 씻긴 아이는 건지는 것처럼 종교에서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그가 주목하는 종교의 힘은 바로 '보편적 상징형식'이다.

예컨대 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다문화주의가 함께 퍼졌고, 이 과정에서 모두가 가졌던 보편적 가치가 파괴되어 연대가 훼손되었다 하자. 모두가 함께 공유했던 오래된 상식이 사라지고 새로운 가치가 등장할 때, 흩어진 연대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열쇠를 종교의 지혜에서 구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종교의 '보편적인 상징형식'. 이것이 현재의 이 위기에서 우리를 구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종교가 어떻게 그런 상황에 대한 힌트가 될 수 있느냐. 그는 이 질문에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일상적 관습을, 그처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상징형식이 종교 이외에 또 무엇이 있었는가?'라고 다시 반문한다. 그렇게 종교, 그리고 신은 여러 의미로 불변의 존재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인간'을 위해서 말이다.  


태그:#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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