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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대통령 묘역으로 가는 길목의 단풍 숲. 잠시 쉬어가고 싶도록 단풍이 곱고 아름답더군요.

지난 2일 화요일 오전 6시 36분에 군산역을 출발한 기차가 영등포에 도착한 시각은 예정보다 10분 늦은 오전 9시 45분. 김대중 대통령 묘소까지 가는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지하철을 잘못 갈아타는 바람에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모른다.

 

동작역 8번 출구로 나와 묘소를 향해 걷는데 카페 회원들과 함께 참배하러 왔던 1년 전 일들이 파노라마 영상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현충원 주변 산들을 아직도 희뿌연 새벽안개가 감싸고 있었고, 곱디고운 단풍 옷으로 갈아입은 나무들은 색색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희호 여사 일행이 김대중 대통령 묘역을 오전 10시 30분에 참배한다고 해서 도깨비걸음으로 걸었는데도 1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묘역 입구에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기에 물었더니 순천에서 30여 명이 단체로 참배하러 왔다가 이희호 여사와 기념촬영을 하고 내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생전 모습을 한 컷이라도 더 남기고 싶은 마음에 새벽에 일어나 아침도 거르고 출발했는데 이 여사가 묘역에 도착하는 모습을 찍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참배를 마치고 헌시 낭독을 감상하는 모습조차 카메라에 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분향을 마치고 의자에 앉아 봉분을 바라보는 이희호 여사. 말로만 국장(國葬)을 치렀던 작년 8월. 국민의 열광적인 ‘김대중!’ 외침에 운구차에서 내려 “제 남편을 이렇게...”라며 감사하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봉분이 보이는 묘역에 도착하니까 숨이 찼다. 심호흡을 하고 둘러보니까 참배객들 사이로 의자에 앉아 묘역을 바라보는 이희호 여사가 눈에 들어왔다. 애처롭게 보였지만,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두 분의 부부애를 확인시켜주는 모습이기도 했다.

 

묘소를 바라보는 이 여사 표정이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 둘이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매일매일 하느님께 같이 기도한다"는 김대중 대통령 마지막 일기의 한 대목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김대중 옥중서신'에 담긴 스물아홉 통의 편지 제목들이 생각났다. 옥중의 남편(김대중)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는 항상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내에게'로 시작했다. 그런데 아내(이희호)가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도 같아서 누가 누구를 더 존경하고 사랑하는지 헷갈렸기 때문이었다. 2005년 어버이날 동교동 자택을 방문했을 때도 얘기했더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향로에 향나무 가루를 넣는 김홍업 전 의원. 고문 후유증을 앓고 있는 형님(김홍일 전 의원) 대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사가 분향을 마치고 의자에서 쉬는 동안 둘째 아들 김홍업 전 의원은 꽃을 새것으로 갈아놓고 향로에 향나무가루를 넣는 등 묘역 이곳저곳을 둘러봤고, 김대중 평화센터 윤철구 사무총장과 여비서는 묘석과 비석을 닦았다.  

 

윤 사무총장은 "이희호 여사께서 매주 묘소를 방문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도 함께하게 되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면서 "이 여사를 비롯한 가족들은 매주 토요일 오전에도 묘소를 찾는다"고 전했다. 

 

 이희호 여사와 참배객 앞에서 추모시를 낭독하는 강신복씨. 시를 낭독하는 동안 묘역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습니다.

국어교사였다는 강신복(51세)씨가 이희호 여사 앞으로 나오더니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헌시를 낭독했다. 낭독이 끝나고 박수가 터지자 누군가가 "대통령님 묘소에서 박수가 나오기는 처음이다"며 농을 건네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이날 참배행사는 오전 11시가 조금 넘어 이희호 여사가 보좌진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를 뜨는 것으로 끝났다. 권노갑, 김옥두, 설훈, 남궁 진, 이협, 설훈, 장성민 등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전·현직 국회의원이 여럿 보였지만, 추모시를 낭독한 강신복씨 얘기를 들어보았다.

 

-헌시 낭독 감동적이었습니다. 언제 쓴 시(詩)인가요?

"50년 만에 여·야 간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한 김대중 당선자를 위한 축시로 1997년 12월 25일에 썼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어둠 헤친 위대한 승리>라고 붙였습니다. 소제목은 '새날이 동트는 길목에서' 이지요."

 

-이곳(김대중 대통령 묘역)에 가끔 들르시나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화요일마다 찾습니다. 여러분이 같이 오시는데, 올 때마다 다짐합니다. '행동하는 양심',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통일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김대중 대통령 정신을 이어가겠다고요."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인연은 언제 시작되었는지요?

"국어교사로 재직하던 1987년 10월 25일 전대협 주최 '양 김 대통령 후보 단일화 국민대회(고려대)'에 참석했을 때입니다. 수많은 군중과 함께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종각까지 걸었지요. 그날 김대중 대통령 관련 책자에 이희호 여사가 사인도 해주셨는데, 감동적이어서 지금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살벌하던 시절에 인연이 시작됐군요. 지금도 기억하는 사건이나 에피소드가 있는지요? 

"13대(1987년) 대선 개표 때 선거참관인으로 영등포여고 정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새벽 2~3시경 트럭을 타고 온 수십 명의 괴청년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고, 다음날 부정투표함 사수대를 결성하고 구로구청 정문을 밤새도록 지키다 새벽 6시경 최루가스와 함께 백골단에 의해 무차별 진압을 당했던 일 등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연설이나 인터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다면?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말은 지금도 가슴을 뛰게 합니다. '나쁜 정당에 투표하지 말고, 나쁜 신문 보지 말고, 하다못해 담벼락에 대고 소리를 질러보라'고 하셨는데 민주화 세력의 그림자도 보기 어렵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요즘 세태를 보면 울화가 치밉니다." 

 

-돌아가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과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지요?

"이명박 대통령은 사돈의 팔촌까지 조사를 벌이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도덕적 양심까지 짓밟아 죽음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노무현 대통령 서거에 충격을 받아 울화병으로 돌아가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슬픕니다. 충격도 말할 수 없이 크고요."

 

강신복씨는 20년 넘게 간직해오던 1980년~90년대 민주화운동 관련 유인물들을 민주화운동기념 사업회에 기증하고, 그 자료들을 토대로 책<6·10 민주항쟁 통일의 그날까지>(비매품)을 냈는데, 이희호 여사에게도 한 권 드리려고 가져왔다고 했다.

 

A4 크기 1200쪽짜리 책에는 광주항쟁 화보에서 노동자·철거민·노점상들의 절규, 박종철·이한열·이철규·조성만·김귀정·이석규씨 등 '열사'들의 육필 유인물, 등사기로 한장 한장 긁어 찍은 소식지, 학생들의 날선 외침 등 400종이 넘는 문건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책도 격변기의 아픈 역사와 절망만큼이나 크고 무거웠다.

 

헤어지기 전 강씨는 "걸핏하면 순수한 시민은 물론 가정주부까지 경찰과 검찰에 출두하게 해서 귀찮게 만들고 겁을 주어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이루어놓은 민주화를 망치는 이명박 정부를 고발하기 위해 지금도 신문 스크랩을 계속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 묘소에 참배하러 왔다가 진정한 '행동하는 양심'을 한 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는 15대 대통령 선거가 있던 1997년 12월 김대중(金大中) 당선자를 위한 강신복 씨의 축시(祝詩)이다.

 

어둠 헤친 위대한 승리

-새날이 동트는 길목에서-

 

얼마나 가슴 죄였던가.

얼마나 고대하던 함성이었던가.

고것은 역사를 부르고,

고것은 새날을 부르는

민중들의 피맺힌 절규다.

민초들의 희망찬 새날이었다.

 

어둠을 헤친 위대한 승리

새천년 새날을 여는 민중들의 반백년 바램

경천동지할 길동(吉童)의 별천지 율도국

신세계 개벽을 알리는 유토피아적 환희여!

 

단군유사이래

억눌린 겨레, 민중의 만만세.

벼랑끝 들풀, 인동초(忍冬草)의 만만개,

가슴이 복받쳐 오르는 심장의 박동

억눌린 민중의 초란 어깨

벅찬 춤놀림으로 용솟아

동학, 전봉준(全琫準) 죽창들고 새날을 갈망하듯

고것은 필시, 준엄한 민중의 대반란

민중의 고귀한 주권재민 승전보!

 

새날이 동트는 길목에서

차돌 큰바위, 당신은 진정한 불사조

인간 김대중, 길벗 김대중

역사의 큰일꾼, 통일한국 상쇠잡이

(중략)

 

위대한 역사의 새날속, 세계로, 미래로

동서로, 남으로 북으로 피멍들도록 찢힌

겨레민족, 대동단결, 통일대업 이루는 대통령(大統領) 되소서.

 

천년만년

풍화되지 않는 비문, 동화속의 얘기처럼

억눌린 민초들, 내이웃 혈육(血肉) 되어주소서.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결코 미워하지 않는다'는

당신의 언약대로, 민중의 희망대로

치욕으로 뒤틀린 역사, 올곧게 바로잡고

오욕된 민초의 가슴앓이, 걸쇠멍에 바로 거둬주소서.

설움받고, 소외받은 민초들을 안아주소서.

 

외진 담장너머로 역사의 새날이

살포시 다가와 민중의 무딘 손끝을 잡듯이

당신의 뜨겁고도 자애로운 동포애(同胞愛)로

민족민중을 얼싸감싸 주소서.

그저 옷한벌의 대통령 되소서.

그저 추앙받는 대통령 되소서.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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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