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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용차는 응모번호 0000번에게 돌아갔습니다. 축하합니다."

프로야구 가을잔치(포스트시즌)가 한창이다. 서울 잠실을 비롯한 전국의 야구장은 한동안 올해 마지막 잔치를 구경하려는 관람객들로 발디딜 틈 없으리라. 야구 구경에 덤으로 따라오는 또다른 재미는 경품 추첨이다. 노트북이나 자동차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인볼 하나 건지면 좋을 듯싶다.

야구장에서 혹시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은 없는가. 내 응모권이 추첨을 통해 자동차에 당첨되었다. 기쁜 마음에 경품을 받으러 가는 사이 새로 추첨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 자동차가 돌아가는 상황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진짜로 벌어졌다. 법대로 따지면 경품 자동차는 누구에게 돌아갔을까. 실제 사건과 재판을 통해 알아보자.

시상대로 가는 사이 경품 자동차는 다른 사람에게?

2009년 9월 국제육상경기대회가 열린 대구스타디움. 밤 9시, 이미 경기가 끝난 시각인데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경품 추첨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날의 1등 상품은 하이브리드 승용차 1대. 본부석에 시상대가 만들어졌고 사회자가 등장했다. 사회자 옆에 놓인 응모함에는 관객들이 입장하면서 넣은 응모권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이제 승용차의 주인을 뽑는 1등 추첨을 시작합니다. 당첨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하겠습니다."

첫 번째 응모권을 조심스레 펼친 사회자는 당첨번호인 '13579번'을 3차례 외친 후 "당첨되신 분은 본부석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몇 초 후 사회자는 "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부릅니다. 13579번! 하나, 둘, 셋! 무효입니다. 다시 추첨합니다"라고 선언했다.

사회자는 두번째 응모권을 건네받고 "24680번, 24680번!"을 소리쳤다. 이때 본부석 바로 뒤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회자는 "드디어 당첨자가 나왔군요. 본부석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말을 했다.

그런데 멀리서 본부석을 향해 한 사람이 오고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13579번'의 응모권을 쥔 고등학생 왕재수(가명)였다.

"제가 원래 당첨자예요. 여기 보세요. 13579번!"

사회자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에 24680번의 응모권 소지자까지 나타나자 장내는 술렁거렸다. 사회자는 관중들에게 본부석 관계자와 상의한 뒤 '당첨번호는 24680번'이라고 발표하고선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 뒤로 활짝 웃는 두 번째 당첨자와 울상을 짓는 왕재수의 얼굴이 대조를 이뤘다.

"당첨자 발표 후 충분한 시간 안 줬다" 소송 제기

당신이 왕재수라면 어땠을까. 야구로 치자면 9회 말 역전 만루홈런을 때리고도 파울로 판정받은 기분 아니었을까.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왕재수는 자신을 당첨자로 인정해달라며 대회조직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왕군의 주장은 이랬다.

"처음 당첨번호를 듣고 기뻐서 소리를 질렀어요. 저는 곧바로 제가 있던 좌석에서 본부석까지 180미터 거리를 2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서둘러 갔어요. 주최측이 본부석까지 이동할 충분한 시간을 주지도 않고 당첨을 무효처리하다니, 억울해요. 당연히 제가 당첨자죠."

대회조직위원회는 이미 2차 당첨자에게 자동차를 넘겨주었다며 난색을 표했다.

"우리는 당첨자가 나올 때까지 추첨하겠다고 분명히 알렸고, 번호를 4번이나 부르면서 기다렸어요. 그리고 당첨됐다면 우리가 알 수 있게 아주 크게 환호성을 질렀어야죠. 그땐 마냥 자동차 추첨만 할 상황이 아니었고 다른 행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2차 추첨을 한 겁니다."

경품이벤트의 법적 성격은 무엇일까

당사자들의 의견이 팽팽히 맞선 이상, 법원은 어쩔 수 없이 법률적인 판단에 들어갔다. 경품이벤트의 법적 성격을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 법원은 계약, 그 중에서도 증여로 보았다.
(계약과 증여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 상자 기사 참조)

경품제공자가 당첨자에게 자동차를 제공하겠다는 의사표시로 당첨번호를 게시한 행위는 청약이 되고 당첨자가 당첨번호를 제시하고 경품 수령의사를 밝히는 것이 승낙이 되는 경품제공계약이라는 것이다.

법원은 경품 이벤트가 승낙의 기간을 정한 계약이라고 판단했고 그 승낙기간을 '경품행사의 계속 진행을 위한 상당한 시간내'로 정한 것으로 보았다. 법률적 쟁점은 왕재수가 '상당한 시간내'에 청약을 승낙하였는지로 모아졌다.

그렇다면 상당한 시간은 얼마나 될까. 법원은 본부석에서 제일 멀리 있는 좌석을 기준으로 당첨 사실을 확인하고, 본부석으로 나와서 당첨번호를 제시하는 데까지 걸릴 것으로 사회통념상 예상되는 시간이라고 했다.

법원은 ▲본부석과 제일 먼 좌석(약 215m 거리)을 기준으로 ▲성인 평균 보행속도(시속 4~5㎞)로 본부석까지 걸어오는 시간이 2분 35초~3분 13초가량 걸리는데 ▲당첨 사실 확인, 주변의 축하로 걸리는 시간과 ▲관객으로 붐비는 계단과 통로를 빠져나오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적어도 4분은 기다려야 한다고 판시했다. 쉽게 말해 당첨번호를 부른 후 당첨자가 도착하는 데까지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법원 "당첨자 도착하는데 충분한 시간 주어야"

당시 왕재수가 본부석에 도착한 시간은 사회자가 1차 당첨번호를 처음 알린 때를 기준으로 1분 37초만이었고, "본부석으로 나와달라"는 말을 기준으로 보면 1분 20초 후였다.

그런데 1차 당첨자 발표 후 당첨무효 선언까지 걸린 시간은 45초에 불과했다. 45초는 평균 시속 17㎞(1초에 4.7-4.8m 속도)로 달려 가야 본부석에 도달할 수 있는 시간으로서 '상당한 시간'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다. 왕재수는 상당한 시간 내인 1분 37초만에 본부석에 도착하여 승낙의 의사표시를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정당한 계약이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충분한 당첨반응을 보이지 않은 왕재수에게도 과실이 있다"는 주최 측의 주장에 대해 법원은 "당첨된 후 소리 지른 사실이 인정되고 그 이상으로 당첨반응을 본부석을 향해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볼 수 없다"며 일축했다. 

결국, 왕군은 자동차를 놓친 지 250일 만에 당첨자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품제공의 법적 성격에 대해 짚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또한 경품 제공자에게 추첨 절차를 신중하고 공정하게 하도록 경각심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했다.

공짜라고 당첨자 조작했다간 형사처벌도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경품제공이 무료행사라는 이유로 사람들을 속였다가는 아래의 사례처럼 형사처벌을 받기도 한다.

A시장 상가번영회는 시장 건물 리모델링 사업 착공기념으로 주민들을 대상으로 경품이벤트를 진행했다. 시장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번호표를 넣게 하고 추첨을 통해 여러 사람에게 가전제품 등을 나눠주기로 했다.

상가번영회장인 B씨는 자기가 아는 C씨가 1등에 당첨되도록 힘을 썼다. 사회자에게 C씨의 번호표를 몰래 건네준 것이다. C씨는 드럼세탁기를 차지했지만 이를 수상하게 여긴 주민들에 의해 부정은 곧 드러났다. B씨는 법정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업무방해죄. 경품추첨행사를 방해하였다는 것이다.

꼭 계약서라는 제목으로 문서를 작성하고 도장을 찍어야 계약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경품이벤트처럼 약속을 했다면 지켜야 하고, 그 약속은 성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혹시 당신이 야구장에서 자동차 경품에 당첨되었다면, 법이고 뭐고 따지지 말고 일단 서둘러라. 그리고 최대한 크게 소리를 질러라. 자동차에 당첨되었는데 체면 차릴 게 뭐가 있나. 분쟁에 휘말리는 것보다 낫지 않나.

'청약'과 '승낙'이 합쳐지면 '계약' 성사
우리는 생활 속에서 무수한 계약 관계을 맺는다. 집주인과 세입자의 임대차계약, 사장과 직원의 고용계약, 물건을 사고 파는 매매계약 등등 수도 없다.

손바닥이 맞부딪혀야 박수소리가 나듯이 계약은 청약과 승낙이 합쳐쳐야 성사된다. 민법에 따르면 증여계약은 증여자가 무상으로 재산을 주겠다는 의사를 표시(청약)하고 상대방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승낙) 효력이 생긴다. 

사례로 든 경품이벤트에 적용해보면, 경품제공자가 당첨자에게 자동차를 제공하겠다는 의사표시로 당첨번호를 게시한 행위는 청약이 되고 당첨자가 당첨번호를 제시하고 경품 수령의사를 밝히는 것이 승낙이 되는 경품제공계약이 증여계약이라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민법 527조에 따르면 "계약의 청약은 철회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다. 사회 생활에서 거래의 안전을 위한 조항이다. 예를 들어 부동산을 5억원에 팔겠다고 약정한 사람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10억원을 달라고 하면 어떨지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민법에는 "승낙의 기간을 정한 계약의 청약은 청약자가 그 기간 내에 승낙의 통지를 받지 못한 때에는 그 효력을 잃는다"(528조 1항)는 조항도 있다. 법원은 경품 이벤트가 승낙의 기간을 정한 계약이라고 판단했고 그 승낙기간을 '경품행사의 계속 진행을 위한 상당한 시간내'로 정한 것으로 보았다.


태그:#이벤트 , #자동차, #계약, #청약, #승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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