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금도 남아있는 'BOBO(보보) 의상실'

부평 문화의거리 분수대에서 건너편 로데오거리로 갈 때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골목. 예전에 그 골목에 있었던 부평극장 앞은 인천에서 제법 알아주는 수제 양장점거리였다.

결혼 예단을 맞추기 위해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강화와 김포에서 이곳 양장점 거리를 찾곤 했다. 현재 이 골목에는 양장점이 하나도 없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인천 중구 신포동 양장점 시장과 더불어 인천의 2대 양장점 시장을 형성했다.

하지만 1990년대 초~중반 무렵 기성복 시장이 큰 흐름으로 나타나면서 부평의 수제 양장점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그 양장점 골목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이들이 있으니, 현재 부평 문화의거리에서 5년째 여성의류 브랜드 '샤트렌' 부평점을 운영하고 있는 최기남(59)ㆍ원순남(58) 부부다.

부부가 1973년에 창업한 숙녀복 전문 수제 양장점 '보보의상실'은 2002년 그만둘 때까지 부평극장 앞을 홀로 지키며 수제 양장의 혼을 태웠다. 부부가 그만두면서 그 골목의 양장점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궤를 같이했던 부평극장도 사라지고 없다.

다만 '보보의상실'은 지금도 그 맥을 잇고 있다. 부부와 같이 10년 넘게 일했던 1급 미싱사가 양장점 대신 문화의 거리 안쪽에 들어선 수선골목에서 '보보의상실'을 운영하며 기성복 판매장에서 나오는 의류들을 전문적으로 수선해주고 있다.

멋진 재단사 최기남씨와 아름다운 미싱사 원순남씨는 옷을 만드는 인연으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수제 양장점을 열었다. 이제 수제 양장점도 사라지고, 돌아가던 미싱은 멈췄지만 부부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 재단사와 미싱사 멋진 재단사 최기남씨와 아름다운 미싱사 원순남씨는 옷을 만드는 인연으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수제 양장점을 열었다. 이제 수제 양장점도 사라지고, 돌아가던 미싱은 멈췄지만 부부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 김갑봉

관련사진보기


기성복 유행에 '수제'는 뒤편으로

남편 최기남씨와 아내 원순남씨는 재단사와 미싱사로 만났다. 옷을 만드는 과정은 우선 옷감(=원단)이 들어오면 재단사가 옷 규격에 맞춰 재단한다. 재단하고 나면 '시다'들이 옷 제작에 필요한 안감 등을 준비해주고 미싱사가 최종적으로 바느질을 통해 옷을 만든다.

당시 최씨는 중구 신포동 양장점에서 재단사로 일했고, 원씨는 부평에서 미싱사로 일했다. 원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부평 양장점 골목에서 바느질을 익히기 시작했고, 그러던 중 최씨를 만나 둘만의 양장점인 '보보의상실'을 냈다.

최씨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가 양장점의 전성기였다. 원단에 따라 고급 양장은 60만~100만 원대였고 보통 20만~30만 원대였다. 사실 귀한 날이거나 형편이 되는 사람들이 양장을 해 입었는데 가게가 바쁠 때는 3개 팀(미싱사ㆍ상시다ㆍ중시다 3명이 1팀)을 운영해 하루 10벌을 생산했다. 보보의상실이 인기가 좋아 부평이나 계양구 사람들뿐만 아니라 강화와 김포에서 옷을 맞추러 왔기 때문에 가게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고 전했다.

남편이 재단하고 아내가 바느질해가며 아름답고 멋진 옷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보보의상실'의 옷 생산량도 의류시장에 기성복이 늘어나면서 줄어들기 시작했다. 버티고 버틴 게 2002년 겨울까지였던 것.

부부는 옷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니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수제 양장보다 저렴한 기성복을 택하면서 주위에 있던 양장점들이 하나둘 그만두기 시작했다. 오랜 손때가 묻은 재봉틀을 비롯한 기구들도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결국 부부는 보보의상실을 정리하고 속초행을 택했다. 아내 원씨는 "엄마아빠가 늘 옷 만드는 걸 보고 자란 아들이 어느 날 찾아와선 우리더러 답답하다고 했다. 고등학교에 막 들어간 녀석이 '사람들은 다 변하는데 엄마아빤 안 변한다'고 하기에 충격을 받았다"라고 한 뒤 "그래서 우리도 기술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기성복으로 전환키로 하고 시장조사에 나섰다"고 말했다.

다시 흐름을 앞서 숙녀복 개척

부부가 속초를 택한 것은 당시 속초가 백화점이나 대형마트가 없어 거리에 있는 의류매장의 매출이 국내에서 알아줬기 때문이다.

속초에서도 미싱사의 기술은 더욱 빛을 발했다. 기성복이라 해도 옷은 수선할 때가 많다. 이 때문에 옷가게 주변에는 늘 수선집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원씨는 "옷은 패션도 중요하지만 우선 자기 몸에 잘 맞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직접 수치를 재가며 만든 옷이 기성복보다 월등히 좋다"라며 "기성복이라고 해도 자기 몸보다 어떤 곳은 사이즈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그러면 그 옷들을 직접 수선했다. 새벽 4~5시까지 일하는 게 다반사였다"고 말했다.

그렇게 속초에서 2년을 보낸 후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기성복 매장 운영에 자신감이 생기자 2005년 다시 부평으로 돌아와 의류매장 골목으로 특화된 시장인 부평 문화의거리에 최초로 숙녀복 전문점을 냈다.

이를 두고 최씨는 "일하는 여성들이 많아지면서 옷에 대한 수요가 늘 것이라고 생각했고, 다행히 문화의거리에는 여성복만 전문 취급하는 매장이 아직 없었다. 생각은 적중했고 많은 직업여성들이 가게를 찾고 있다. 브랜드를 선택할 때 고려했던 요인 중 하나가 소비자들의 선택폭이 넓다는 점도 한몫했는데, 이 역시 손님들이 우리 가게를 찾는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직접 생산해 판매하는 일과 옷을 가져와 판매만 하는 일은 분명 달랐다. 원씨는 "내가 직접 만들어 생산하는 것은 몸은 좀 피곤해도 정신적으로는 편한 반면, 판매만 하는 일은 반대였다. 직접 만들어 팔 때는 내가 일한 만큼 내 노동의 대가를 가져오는 맛이 좋았는데, 기성복 매장은 고객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부부가 매장을 운영하면서 제일 우선시하는 것은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와 '친절'이다. 하루에도 보통 5~10명의 신규고객이 오는데, 이들을 단골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친절해야 하고, 단골이 되면 그 손님들을 소중히 여기고 특별히 대해주고 있다.

원씨는 "가게에 단골이 많이 생기면 좋은 것 아니냐? 명절이나 기념일 같은 때에 단골들에게 작지만 기억되는 선물을 잊지 않고 전해주고 있다"며 "사람한테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장사하는 사람한테는 더욱 그렇다. 아들이 대를 잇겠다고 하면서 일을 배우고 있는데, 이는 아들한테도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자영업자, #재단사, #미싱사, #양장점, #부평 문화의거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