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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서재 화양구곡 중에서도 손꼽히는 금사담 물가 높은 암반 위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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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들이 '금강산 남쪽에서 으뜸가는 산수'라 불렀던 화양동계곡은 바위와 숲, 계류가 빚어낸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하얗고 깨끗한 바위들이 하늘로 치솟아 선경을 자아내거나 혹은 바닥에 너럭바위로 누워 옥 같은 물을 흘러 보낸다. 골짜기 양쪽의 소나무들은 학을 불러들이고 계곡의 맑은 물은 이름도 예쁜 달천강으로 흘러 남한강을 따라 서해까지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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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서재 송시열이 정계를 은퇴한 후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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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계곡에는 구곡문학이 있다. 자신을 주자에 비유했던 우암 송시열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떠 화양계곡의 볼 만한 곳 아홉 군데를 골라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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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서재 주변 바위벽에는 충효절의 등 각종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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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구곡은 입구에서부터 골짜기를 거슬러 1곡부터 9곡까지 펼쳐진다. 계곡의 맑은 물을 따라 산 속으로 10리쯤 펼쳐진 화양구곡의 백미는 4곡인 금사담과 암서재다.
화양구곡 중에서도 손꼽히는 경승지인 금사담에는 미끈하게 잘 생긴 바위들이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다. 화양천의 맑은 물이 이곳에 이르러 소를 만들어 시퍼런 물빛을 드러내다 한번 바위에 부딪혀 하얀 물방울을 튕기다 다시 계곡을 따라 흘러간다.
원래 물 아래의 모래가 금가루 같다고 해서 금사담이라고 하였다. 금사담 물가 높직한 암반 위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 송시열의 별장이자 서재였던 암서재가 있다. 송시열이 정계를 은퇴한 후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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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서재에 서면 제5곡인 첨성대와 화양계곡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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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서재로 가기 위해서는 계곡을 어렵사리 건너거나 아니면 6곡 능운대 뒤로 나있는 산길을 가야 닿을 수 있다. 예전에는 이곳 계곡에 철제 다리가 있어 건너기 수월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화양구곡이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뜬 것처럼 암서재도 주자의 운곡정사를 본뜬 것이라고 한다. 송시열은 서재를 지은 후 이렇게 읊었다. '시냇가에 바위벽이 열리어 그 사이 집 한 칸을 지었네. 고요히 앉아 성인의 가르침 받들어 한 치라도 더위잡고 올라보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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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사담과 암서재 원래 물 아래의 모래가 금가루 같다고 해서 금사담이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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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서재 앞의 바위벽에는 각종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금사담', '충효절의' 등이 그것이다. 이곳뿐만 아니라 구곡 곳곳에 새겨진 글씨들은 명이 쓰러지고 청이 서던 당시에 대한 송시열의 절박함을 엿볼 수 있다. '충효절의' 네 글자는 명나라 태조의 글씨이고 다른 글자는 송시열의 것이라 전해진다. 구곡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글씨는 송시열의 문인이자 노론의 선봉장로 활약했던 민진원의 글씨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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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사담과 암서재 원래 물 아래의 모래가 금가루 같다고 해서 금사담이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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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서재로 오르기 위해서는 송시열의 표현대로 바위벽 사이의 돌층계를 올라야 한다. 암서재는 목조기와로 2칸은 방이고 1칸은 마루로 되어 있다. 암서재기는 송시열의 문인 권상하가 쓴 것으로 현종 7년인 1666년 8월에 암서재를 짓고 이곳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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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양구곡 우암 송시열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떠 화양계곡의 볼 만한 곳 아홉 군데를 골라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이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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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구곡 곳곳에는 지금도 '비례부동'등 송시열의 필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화양서원의 터도 현재 복원되어 이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