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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많은 눈이 내리는 나라, 일본. 그중에서도 홋카이도(北海道)는 겨울이 되면 마치 눈을 위해 존재하는 땅과 같이 보인다. 설산이 펼쳐지는 홋카이도의 겨울은 아주 매력적이다. 그러나 내가 홋카이도에 발을 디딘 것은 한여름의 홋카이도. 나는 홋카이도 한 중앙의 아사히카와(旭川)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곳 아사히카와에 겨울의 눈과 설산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특색 있는 박물관의 천국, 일본. 일본은 박물관 총수뿐만 아니라 박물관의 개성과 풍부한 내용에 있어서도 선진국의 자리에 있다. 일본 곳곳에는 볼 만한 박물관들이 산재해 있고  홋카이도의 두 번째 도시, 아사히카와에도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인구 36만 명의 소도시에 나의 지식의 경계를 넓혀주는 박물관이 있었다. 눈(雪) 박물관. 나는 아사히카와의 눈 박물관을 찾아가기로 했다. 나는 기대 속에 길을 걸었다.

 

나는 아내, 딸과 함께 아사히카와 역 앞에서 눈 박물관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그러나 나의 급한 성격을 시험하는지 버스는 금방 오지 않았다. 뭔가를 잘 기다리지 못하는 나의 성격이 결국 발동했다. 일본에서의 이 아까운 시간을 버스를 기다리며 보낼 수는 없었다. 나는 박물관을 더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을 사기 위해 택시를 세웠다. 예상치 못한 홋카이도의 더위 속에서 택시의 에어콘은 시원하기만 했다. 아사히카와 역에서 눈 박물관은 택시로 불과 10분 거리에 있었다.

 

박물관은 낮은 언덕 위에서 아사히카와 시내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박물관 입구의 언덕길을 걸어서 올라갔다. 나무 그늘이 없는 박물관 입구의 아스팔트 길은 한참 더웠다. 하지만  눈 박물관 내부는 아주 시원하리라는 예상 때문에 잠깐 동안의 더위가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하늘은 정말 푸르고 푸르렀다.

 

언덕 위에는 하얀 눈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흰 몸매의 자작나무 숲이 있었다. 그 자작나무 사이로 순백색의 깔끔한 건물이 드러났다. 건물의 지붕은 원형의 돔을 이루고 있는 비잔틴 양식이었다. 러시아 여행 당시에 많이 보았던 러시아 성당의 건축 양식이었다. 러시아와 가까운 일본 홋카이도에 어울리는 건축물이었다.

 

나는 이 건물의 겉모습을 보고 이곳이 바로 눈 박물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건물의 돋보이는 외관 자체만 해도 완벽한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한적한 아사히카와에 어울리는 조용한 품위를 가진 박물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물관 입구에서 입장권을 사려는 순간 잠시 갈등이 생겼다. 눈 박물관이 자리한 이곳 북해도 전통미술공예촌(北海道 傳統美術工芸村)에는 눈 박물관 외에도 국제염직미술관(國際染 織美術館), 유카라오리 공예관(優佳良織工芸館)이 있는데, 세 곳을 모두 둘러보는 공통입장권 가격이 무려 일인당 1400엔이었다. 가족 3명을 계산하면 한국 원화로 상당한 금액이었다.

 

잠시 아내의 의견을 물었던 나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일단 나선 외국 여행길에서 입장료 비싸다고 여행지에 안 들어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을 따르기로 했다. 여행 당시에는 돈 몇 천원, 몇 만원 사용하는 일이 크게 다가오지만 귀국 후에 생각하면 보고 싶은 곳을 못 보고 온 후회가 항상 더 크기 때문이다.

 

드디어 백색의 나라로 들어섰다. 박물관 내부는 백색과 은색이 혼합된 듯한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섬세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샹들리에와 눈의 결정체를 닮은 스테인드글라스가 고풍스러웠다. 나는 내가 유럽 알프스 자락의 어느 성에 들어온 듯한 느낌 속에 있었다.

 

지하 세계로 끝없이 연결되는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은 무언가를 형상화한 듯했다. 6각형 모양의 나선형 계단을 빙빙 돌면서 내려가다 보니 나는 눈의 결정체 속을 걷고 있었다. 계단은 눈 결정체를 테마로 설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하에 눈박물관을 만든 것은 분명히 눈과 얼음을 여름에도 무리없이 보존하기 위한 에너지 효율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계단을 통해 내려가는 곳곳의 벽면 액자 속에는 홋카이도의 설산이 장쾌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설국에 들어가는 분위기를 고조 시키기 위한 이러한 장치들에 나는 현혹되고 있었다.

 

지하로 무려 18m를 내려갔다. 고개를 들어 올려보니 나선형 계단이 끝나는 곳에 천장이 멀리 자리하고 있었다. 더 이상 계단이 아래를 향하지 않는 맨 아래층에는 청동 빛깔의 분수대에서 시원스런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로마의 트레비 분수 같이 분수의 바닥에는 행운을 기원하는 동전들이 던져져 있었다.

 

 

드디어 눈앞에 설국(雪國)이 펼쳐졌다. 한여름인데도 어디선가 서늘한 공기가 확 다가왔다. 긴팔 옷을 입지 않으면 추위에 떨 만한 공간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눈 앞에는 사람들이 물을 얼려 만든 유빙(流氷)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회랑 같은 복도를 가득 메운 유리벽 너머로 폭포수가 흘러내리다가 얼어붙은 듯한 얼음들이 멈춰서 있었다. 유리관 너머로 펼쳐지는 몇 톤에 달하는 인공 얼음이 일대 장관이었다.

 

유리벽 내부의 얼음세계는 영하 20도가 유지되지만 이중으로 만들어진 유리벽 때문에 유리에는 서리가 끼지 않는다고 한다. 관람자가 불편을 느끼지 않고 거대 고드름을 명확하게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세심한 배려였다. 게다가 이 거대한 얼음기둥은 조명에 의해 총천연색으로 색상이 변하고 있었다. 조명에 따라 얼음은 다양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 얼음은 매년 새롭게 만들어져서 관람객에게 선보인다고 한다. 어떤 이가 여름철에 얼음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박물관을 생각해 냈을까? 사시사철 볼 수 있는 얼음의 나라를 만든 아이디어는 단순한 듯 하지만 대단히 창의적인 아이디어이다. 여름철에 온몸이 서늘해지는 한기를 느끼면서 얼음과 눈의 세계를 즐기는 것은 분명 유쾌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다음 방에는 겨울 다이세쓰산(大雪山)의 연봉(連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인적 없는 조용한 박물관에서 푸른 빛이 도는 설산(雪山)의 사진이 우리만을 포근하게 반기고 있었다. 구름 위로 솟은 다이세쓰산 위에는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하얀 눈들이 온 산을 덮고 있었다. 마치 겨울의 산 속에 서 있는 듯한 환상이 다가왔다.

 

가장 인상적인 곳은 푸른 유리 벽면에 화려하고 다양한 200여 개의 눈 결정체들이 전시되고 있는 '눈 결정체의 방'이다. 머리를 들어보면 천장에도 눈의 결정체가 빛나고 있었다. 놀랍게도 눈의 결정체 모양은 모두 달랐고 어느 화가가 형상화한 눈의 그림보다도 아름다웠다. 마치 벽면에 박혀 있는 눈들이 금방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눈의 고향, 홋카이도는 눈이 예쁘게 날리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홋카이도의 눈 결정체가 눈 중에서 아주 예쁜 편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도 겨울에 내리는 홋카이도의 눈은 함박눈으로 커다란 눈송이가 휘날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이라는 자그마한 자연을 온통 파헤친 듯한 전시실들이 아기자기하게 이어졌다. 일본인들은 잘 알려진 민족성대로 작고 세밀한 아름다움을 찾는 박물관을 만들었다. 어느 누구나 겨울에 눈을 보지만 그들은 겨울의 눈에 대한 상상의 세계를 여름의 현실 세계에 섬세하게 재현해 놓았다.

 

이런 문구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었다. '눈은 하늘에서 온 편지'. 눈을 보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문학적 표현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나는 한여름에 눈이 펑펑 쏟아지는 듯한 몽상의 세계에서 하늘에서 온 편지를 받아든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나는 온통 눈 내리는 광야에 들어서 있었다. 눈의 결정체에 대한 현미경 사진, 눈과 관련된 고서적, 홋카이도의 자연을 그린 유화, 눈 덮인 홋카이도 설산의 동영상, 눈과 관련된 비디오 자료실. 눈을 실제로 전시하거나 박물관 내에 눈을 내리게 할 수는 없기에 다양한 시청각 자료들이 총동원되어 있었다. 원형 홀의 수많은 비디오에서는 각각 다른 풍경의 눈들이 쏟아져 내리고 사람을 감상에 젖게 하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시실이 이어지던 박물관 내부 지하공간에 갑자기 커다란 홀이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격식 있는 결혼식장과 아주 닮아있는 공간이다. 이 공간은 설국 속에서의 추억을 남기는 결혼식장으로 유명하고 콘서트홀로도 이용된다. 이 200석 규모의 콘서트홀만을 구경하기 위해서 눈 박물관을 찾는 일본인들도 있다고 한다.

 

나는 온통 백색의 눈 세상 같은 무대를 보고 있었다. 홀의 무대에는 눈을 닮은 백색의 피아노와 금빛 하프가 예쁘게 어울리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콘서트홀에서는 연주회, 강연 등 다양한 활동이 전개될 것이다. 나는 흰색 의자에 앉아 콘서트를 즐기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순결하고 편안한 느낌 속에 잠시 앉아 있었다.

 

처음 이 콘서트홀에 들어섰을 때부터 몽환적인 느낌이 강하게 느껴진 이유는 천장에 있었다. 돔 모양의 천정에 뭉게구름 떠 있는 파란 하늘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머리 위에는 '북(北)의 하늘'이라는 대단한 풍경화가 있었다. 일본의 유명화가 7명이 함께 작업을 하고 자신들이 그린 캔버스를 하나하나 천장에 붙인 작품이다.

 

이 콘서트홀은 예상치 못했던 아름다움이자 감동이 밀려오는 하이라이트였다. 나는 아내와 딸이 한참을 앞서 걸어간 후에도 이 콘서트홀 천장을 보며 서 있었다.

 

 

기념품 가게는 온통 눈사람 천지다. 목도리와 모자를 눌러쓴 눈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신영이는 자꾸 흰색 눈사람 인형을 사달라고 졸랐다. 화려한 가게들은 예뻤지만 작은 기념품들의 가격이 너무 비쌌다. 

 

눈 세상에서 밖으로 나오니 햇살 쏟아지는 여름이었다. 지상의 세계는 방금 전 지하세계와 이리도 다를 수 있을까?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마냥 땅 속의 이상한 세계를 경험하고 나온 것 같았다. 잠시 현실 세계와 몽환의 세계의 경계가 헷갈렸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일본, #홋카이도, #아사히카와, #눈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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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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