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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은 쇠와 녹, 무게와 가벼움, 영원함과 순간 같은 상반돼 보이는 것들을 사색하게 함으로써 느린 시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 이종섭의 작품2 그의 작품은 쇠와 녹, 무게와 가벼움, 영원함과 순간 같은 상반돼 보이는 것들을 사색하게 함으로써 느린 시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 김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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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관한 통찰 <반야심경>을 2년간 '쇠'낱장 260개에 천천히 새기다
시간의 흐름 속에 철판은 녹슬고, 시간이 녹슬수록 진리는 더 빛나고...
- 인사동 조계사에서 4월12일까지 전시

기다릴수록, 오매불망 염원할수록 돌아오지 않는 그 무엇이 안타깝던 2010년 봄이다. 기다림을 포기한 뒤에야 봄볕은 따사롭고 바람은 살랑거리고 대지는 비로소 크게 숨을 쉰다. 천안함 사건을 바라보며 모두가 숨을 죽인 뒤다. 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는 너와 둘이 아니고 나와 세상 또한 다르지 않다.

춥고 싸늘하고 눅눅하던 겨울 기나긴 옷자락의 끝을 거두고 햇살이 화창하게 찾아든 날, 슬픔처럼 멍든 몸과 마음을 데리고 사람들이 양지바른 조계사 도량을 거닌다. 연합뉴스를 비롯한 현대식 건물과 세계각지 관광객의 발길로 둘러싸인 그곳에서도 탑돌이를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신라시대 사람들처럼 한걸음씩이고 보폭 역시 짧다. 탑 한쪽에서는 선사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불어온 바람을 끌어안은 채 몸굵은 양초들이 꺼질 듯 몸을 태운다. 

조계사 마당에서 작품을 감상하거나 촬영하고있는 방문객과 관광객들
▲ 이종섭의 작품1 조계사 마당에서 작품을 감상하거나 촬영하고있는 방문객과 관광객들
ⓒ 김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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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섭 작가의 개인전 <나 그리고 대한민국 기획전 1 (I & Korea project 1)>이 전시되고 있는 현장, 바로 인사동 조계사 도량이다. 반야심경과 주기도문, 국민교육헌장으로 이어지는 문자적 상징의 체계들을 차례차례 활용해 인간과 세계의 본질과 단면을 동시에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지가 표현된 첫 번째 시리즈물.

작가의 시리즈는 <나><그리고><대한민국>이라는 각각의 주제에 하나씩 접근할 때마다 <존재><신:관계><현실>이라는 문제를 차례로 다루게 된다. 기획전의 마지막은 이처럼 세 개의 주제를 따로따로 다룬 개별 작품을 한데 모은 가운데 새로운 작품 하나를 통합한 통합전이 될 예정. 전시의 진행과정 역시 존재가 관계와 현실 속에서 비로소 살아있는 인간의 구체성을 띄어가는 과정을 닮았다.

2년이라는 작업시간과 전시기간, 그 시간동안 비와 햇빛과 바람 숙에서 피어난 녹도 이 작품의 내용을 이룬다.
▲ 이종섭의 작품3 2년이라는 작업시간과 전시기간, 그 시간동안 비와 햇빛과 바람 숙에서 피어난 녹도 이 작품의 내용을 이룬다.
ⓒ 김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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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이 담긴 시리즈 첫작품은, 그래서 불교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며 신앙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나>라는 존재에 관한 보편적인 이야기다.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환상이요 실체가 없는 것이며... 물질이 곧 허공이요(色卽是空) 허공이 곧 물질이며(空卽是色)..."

그는 이같은 오래된 불교경전 속의 심오한 통찰을 잠시 붙잡아 인간이 만든 것 가운데 가장 강한 쇠 위에다 뜨거운 쇳물로 글을 새겼다.

흐르는 시간 위에 말씀 한 마디 걸터앉고, 철판 위에선 말없이 녹의 꽃이 피고...

14m×7m라는 작품규모가 우선 놀랍지만 이 작품이 선사하는 놀라움은 끝이 없다. 그 주제의 심원함이 그렇고, 보면 볼수록 더 많이 보이는 내용과 형식의 깊은 호흡이 그러하다. 한 덩어리의 쇠 대신 잘라낸 철판 낱장에 한 자씩을 새긴 것은, 본질상 하나지만 하나가 아닌 우리 '존재'의 모습과 같다.

허공과 만난 무쇠는 8톤에 이르던 본래의 무거움을 잃고 가벼움이 되어 바람에 흔들린다. 2년의 작업시간과 반년의 전시를 거치며 시커멓던 철판에는 붉은 녹이 피었고 지금도 시시각각 변하며 존재의 실체없음을 보여준다. 철판이 녹슬수록 글자, 말씀은 빛난다. 작품도 작가도 어디론가 흘러간다. 속도와 효율에 역행해 긴 시간을 하나의 작품에 고집스럽게 바친 작가의 정신 역시 주제의 심원함에 그대로 녹아 있다.

육중한 대웅전의 날렵한 처마와 수수한 돌탑의 고운 자태를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시선이 닿는 곳. 철판 조각들이 반야심경의 말씀 한 음절씩을 담고 허공 중에 서있는 바로 그 조형물이다. 260개의 철판에 반야심경 전문(全文)이 한 자 한 자 아로새겨진 그것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거기 있었던 듯 자연스럽다. 저마다 붉게 혹은 노랗게 아름다운 색으로 녹이 슨 철판들을 바라보거나 만져보며 조계사를 방문한 사람들은 잠시나마 존재가 던지는 낯선 신비로움에 젖는다.

쇠가 부식되며 피어올린 시간의 곰팡이. 녹이 아름답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주는 또하나의 선물이다.
▲ 이종섭의 작품4 쇠가 부식되며 피어올린 시간의 곰팡이. 녹이 아름답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주는 또하나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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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식된 쇠, 부식된 시간의 찌꺼기인 '녹'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 경험이다. '쇠'라는 인공적이고 단단한 재료가 전통사찰에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것만큼 뜻밖이어서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짐작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녹은 단순한 녹이 아니라 녹의 꽃, 시간의 꽃이라 할 만하다. 나와 너, 모두가 영원이라는 시간, 존재라는 뿌리에서 피어난 꽃 하나, 꽃잎 하나인 것처럼.

봄의 한가운데,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서 독창적인 이 조형물을 마주보고 생각에 잠겼노라면 내가 무쇠같고 무쇠가 바람같고 바람이 시간같고 시간이 녹같다. 녹이 나같고 내가 영원같다. 영원이 또 순간같고 이 잠시의 순간이 유일한 진리같다.

무진장한 느림과 인내와 깊이로써 세태의 빠름과 가벼운 효율에 단단히 맞서서 저항하고 있는 작가의 수고 앞에 서면 마침내 우리의 조급한 일상과 그 피상성과 가벼움은 허물어져 내린다. 전시는 4월12일까지. 아쉽게도 그날 철거될 예정이다. 

"조계사에 감사, 나는 묵묵히 내 길을 갈 뿐"
[미니 인터뷰] 작가 이종섭


2년이라는 긴 시간을 이 작품에 쏟은 작가는 바로 그 무진장한 느림과 인내로써 빠른 세태와 가벼운 효율에 저항한다.
▲ 작가 이종섭씨 2년이라는 긴 시간을 이 작품에 쏟은 작가는 바로 그 무진장한 느림과 인내로써 빠른 세태와 가벼운 효율에 저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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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이라는 곳을 인연삼아 만났던 이종섭 작가는 지난 2년간 이 작품과 함께 무막한 시간을 견디고 있었던 모양이다. 존재의 끝에 다가가 보기 위하여 세상의 모든 요구와 소리, 계산을 떠나있었을 작가는 결국 이 작품으로써 가벼운 세상을 말없이 웃어넘기고 있다.

보는 마음이 장쾌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작품을 세상에 내보일 수 있었다는 소박한 사실 하나에 진정으로 고마워한다.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이 작품에 묻어있는 진짜 이유일지 모른다.

"전시를 허락해준 조계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제가 계획한 대로 묵묵히 저의 길을 가겠습니다."

어깨에 무겁게 드리운 소명만큼 고달플 수밖에 없을 작가의 현실이 안타까우면서도 그 앞에 먼저 머리를 조아리게 되는 것은 세상이 소중한 것을 너무 많이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 이종섭
1955년 충남 당진 출생 / 세종대 회화과및 동대학원 졸업 / 개인전 2회 / 2008ljs@naver.com


태그:#전시회, #조계사, #반야심경, #이종섭, #인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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