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광부화가 황재형의 <쥘 흙과 뉠 땅>전이 28일까지 가나아트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황재형은 1980년대 민중미술 작가로 활동하다 1983년 강원도 태백으로 갔고, 그곳에서 탄광촌의 삶과 풍경을 화폭에 담아왔다. 그래서 그에겐 ' 광부화가'라는 별명이 따라붙는다. 실제로 그는 3년간 광부로 일하기도 했다. 척박한 탄광촌에 정착하여 그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황재형의 그림에는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가득하다.

 

선탄부 권씨. 그녀가 하는 일은 광산에서 석탄을 선별하는 것이다. 머리수건을 쓰고 마스크로 입을 막아도 얼굴은 온통 검다. 그녀는 하루 하루 검은 먼지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문득 고개 들어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슬프기는 하지만 맑디 맑다. 그녀는 아마도 남편을 잃고 선탄부로 나섰을 것이다. 선탄부는 세 개의 하늘을 본다고 한다. 남편이 광부가 되려고 태백에 와서 처음 본 시퍼런 하늘, 막장에서 만난 시커먼 하늘, 남편이 사고로 죽은 뒤 자기가 보는 막막한 하늘...

 

그러나 그녀의 맑은 눈동자는 끝없는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려는 의지를 보여 준다.  화가는 캔버스 가득 그녀의 얼굴을 채움으로써 여신에 버금가는 경의를 표하고 있다.

 

 

  기형의 몸, 흐려진 눈빛

  폐에 가득한 석탄가루가 찔러대는 쓰라림

  눈앞에 어리는 건

  오직 생활, 가족들의 가난한 눈빛 일 뿐

  수없는 전투를 치르고 시간이 지나면

  허름한 트럭에 실려 막사로 돌아오는 병사의 삶

  끝나는 날을 모르는 전투

  훈장 같은 노다지를 꿈꾸며, 오늘도 전장에 선다.

                              

                                   - < 채굴막장 광부 >(오세주) 중에서

 

하루 하루 고달픈 노동으로 이어가는 삶은 고달프다. 그 삶이 별다른 희망을 던져주지 못할 때 그 고통은 더욱 크다. 광부의 삶은 회색빛 거친 삶이다. 이제 막 갱에서 나와 담배 한개비 피워물어도 달콤한 휴식이 아니다. 그의 등뒤에 짊어진 짐은 줄어들 줄 모른다. 시의 말처럼 폐에는 '석탄가루가 찔러'대고, 집에는 가난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다. '끝나는 날을 모르는 전투'를 치러야 하는 병사에게 생은 '고무씹기'와 똑같은 팍팍함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담배 한대 피고 나서 툭툭 털고 일어설 것이다. 그에겐 부양할 가족과 살아야 할 날들이 있기에 다시 깊고 검은 갱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피냇골이야기>는 흩날리는 눈을 어찌 이리도 실감나게 표현했을까 싶은 작품이다. 눈은 바람에 휩쓸리며 휘몰아치고 길은 질퍽거린다. 그림 속 사람은 부부처럼 보인다. 남편은 수레를 끌고 아내는 힘겹게 밀고 있다. 저 수레에는 어쩌면 그들의 초라한 이삿짐이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한짐 수레도 되지 않는 그들의 세간살이는 이제 막 이곳에 와닿은 듯하다. 그들은 거듭된 실패와 실패 속에 겨우 입에 풀칠할 곳을 찾아 이곳으로 온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칙칙하게 내리는 눈은 앞으로의 삶도 그리 만만치는 않을 것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탄광촌은 모든 것이 검기만 하다. 눈도 검다. 아무리 내려도 그곳의 검은 빛을 감추지 못한다. 축축한 눈이 내리는 날, 탄광촌의 가난과 누추함은 더욱 두드러진다. 하얀눈에 환호하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도시사람의 재잘거림이 그곳엔 없다. 탄광촌에도 함박눈이 내린다. 진눈깨비처럼 슬프게 내린다.

 

<검은산 검은 울음>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저 속에는 광부 김씨, 광부 이씨, 선탄부 권씨가 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작은 집들은 방한칸 또는 많아야 두칸짜리 방. 그들은 고통스러워 울기도 하였을 것이다. 저 작고 초라한 삶을 품어주는 것은 검은 산이다. 

 

대형 캔버스의 이 작품은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먹으로 그린 묵화같다가, 가까이서 보니 거칠게 휙휙 스쳐간 나이프자욱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검은 빛은 강인하다. 몸을 부딪혀 밥을 먹는 사람들이 갖는 힘이 느껴진다. 조용한 산과 마을에서 뭐라고 할 수 없는 힘이 뿜어져 나온다.

 

화가는 이 그림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 붓을 버리고 나이프로만 질료를 찍어내어 바른 것 같다. 그림을 측면에서 한번 바라보자. 거칠게 스쳐간 질료의 자욱이 생생하게 전해온다.  캔버스의 모든 것들이 소리를 내며 튀어나올 것 같다. 이 작품의 강인함은 독특한 질료에서 온다. 바로 석탄가루다. 가난했던 한 때 쌀을 사먹을 돈도 없었던 화가는 물감을 아끼려 석탄가루를 써보았다. 그리고 그 석탄가루는 광부의 양식이 되었듯, 화가의 양식이 되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회색빛, 검은 빛이다. 이번 전시의 60여 점 작품 가운데 색의 향연은 없다. 탄광촌. 그곳은 모든 것이 검기에 그렇다. 산들은 거칠고 검고, 나무도, 물도 검다. 집도 검다. 눈이 와도 그곳은 검은 풍경이다. 하지만 이 검은 색은 어쩐지 칙칙하기보다는  엄숙하다. 무거운 삶을 걸어가는 자들이지만 그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림 속 그들을 보면 종교화를 보는 듯한 외경심이 일어나기도 한다. 

 

황재형이 그려낸 검은 빛의 그림은  장중하게 울려퍼지는 오라토리오다. 그는 덧없는 희망과 긍정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얘기하면서, 어떠한 순간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존귀한 모습을 놓치지 않고 있다.  그의 그림은 '검은 삶'을 묵묵히 걸어가는 자들에게 바치는 서사시다. 


태그:#황재형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