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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가르침

우리가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사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것이 소풍, 나들이, 여행, 답사 등 무엇으로 불리는지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막상 집 밖으로 나섰을 때에 전혀 행복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어떤 이유 때문일까? 밀리는 차로 인해 도로에서 지쳐버리기, 좁은 장소 많은 사람으로 짜증나기, 내가 원한 곳과 다른 장소를 상의 한 마디 없이 선택해버린 여행 동료, 맛도 없고 가격만 무지 비싼 음식 등으로 인해 말이다. 그렇다고 꼭 실망만 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부정적인 모습을 극복해 나가는 것 또한 여행에서 배워야 하는 공부이니 말이다.

오래 전부터 여행이니 답사니 하면서 밖으로 많이 돌아다녔지만 막상 그것은 남에게 보여주는 행동의 일부였으며 그것이 진정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언제부터인지 여행에서 행복을 느끼고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가졌었다.

그 결과 자기 스스로 여행에서 행복을 찾는 법은 가장 먼저 내 마음이 편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내 마음이 편한 여행을 하기 위해선 첫째 진짜로 자유로운 여행을 떠나야 하며, 둘째 내가 가진 지식으로 여행지를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여행지가 보여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좀 더 천천히 자유롭게 여행을 떠나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여행이 주는 세상의 진리인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고, 남을 도우며 살아라"를 체험하게 되었다. 왜 우리나라를 여행하면 "자기 공부와 남을 돕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일까? 우리나라 여행지는 대부분 경치가 좋은 곳이거나 과거의 문화와 전통이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특히 과거의 문화의 경우 대다수가 유교 아니면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자기에게 이롭게 남을 돕는다는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할 수 있다. 유교의 가르침 역시 이와 내용이 별로 다르지 않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신을 닦고 남을 잘 다스리라는 뜻이다. 이를 정리해보면 자기 스스로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것을 남에게 베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여행지를 찬찬히 돌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내용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공부와 남에게 베풀어주는 대표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은 누구일까? 아주 많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을 선택하라면 나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을 꼽겠다. 그러니 류성룡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그를 배향하고 있는 병산서원을 찾아 가보는 것을 좋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위한 공부

서애 류성룡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그는 학자로서의 자기 공부와 관리로서 백성을 위하는 '수기치인'이라는 덕목에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특히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국가위기 사태를 맞이하여 이를 극복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경세가였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관점에서 그를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는데 여기서는 먼저 유학자로서의 삶을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그는 1542년 경상도 의성에서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郢)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6살에는 <대학(大學)>을, 8살에는 <맹자(孟子)>를 배웠고, 21살 때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퇴계 이황을 찾아가 학문을 닦았다. 퇴계는 그를 처음 보고 "이 사람은 하늘이 낳은 사람이니 뒷날 반드시 국가에 큰 공을 세울 것이다"라는 극찬을 했다고 한다.

서애는 지식과 실천 중 지식을 보다 중시하였다. 그는 지식을 성현의 시작과 끝, 본체와 작용을 꿰뚫어본 것이라 할 정도였다. 이런 그의 지식은 당시 학자들이 성(性)과 리(理)에 대한 언어를 통한 논변이 주류를 이루던 부분에서 벗어나 실천을 함께하는 지식이었다.

그는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선 공부에 대한 생각의 우위를 강조하는 사색(思索)과 새롭고 창조적인 견해인 신의(新意)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참된 지식에 이르려면 단순히 배우기만 하는 공부만으로는 불가능하므로 깊은 사색이 중요하며, 사색의 결과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새롭고 독창적인 견해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성리학자들과는 약간 다른 독특한 공부는 이후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아주 실용적인 정책의 도출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백성을 위한 정책

앞서 유학자인 류성룡의 자기 수양을 위한 공부를 이야기했다면 이제는 나라와 백성을 다스렸던 관리로서의 탁월한 업적에 대해 이야기할까 한다.

1564년 사마시라는 과거시험을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라는 직책을 시작으로 해서, 1590년 우의정이 되어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2월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고 있었으며, 4월에는 개성에서 영의정에 이르나 국정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하지만 계속 선조와 함께 있으면서 국정의 자문에 응하였으며, 6월에는 다시 풍원부원군으로 봉해지고, 명나라의 장수를 접대하는 일을 맡는다. 12월에 평안도 도체찰사, 이듬해 1월에는 충청·전라·경상 3도체찰사가 되었으며 10월에는 다시 영의정이 된 후 1598년 10월 물러날 때까지 왜란의 전 기간에 걸쳐 국정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

관리로서 류성룡의 탁월한 업적으로 꼽으라면 혈연, 학연, 지연에 얽매이지 않고 실력에 따라 인재를 기용한 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왜(倭)의 침입에 대비해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로,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추천 임명하는 선견지명을 보여주었다.

또한 류성룡은 정치 기강의 문란으로 야기된 민심의 수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파죽지세로 북상하는 왜군을 피해 한양을 떠난 임금에게 일부 신하들이 "사태가 위급할 경우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아주 강력하게 이에 반대하며 "임금께서 우리 땅을 단 한 걸음이라도 떠나신다면 조선 땅은 우리 소유가 안 될 것입니다"라고 왕에게 아뢰었으며 그 덕분에 민심이 수습되고 왜를 물리칠 기틀을 잡았던 것이다.

전시에 가장 막중한 책임을 진 류성룡은 자주국방에 대한 생각을 강하게 가진다. 비록 명의 원병으로 왜군에게 심리적인 위축과 함께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지만 장기전의 형태로 접어든 마당에 그들에게만 의지할 수 없고 결국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래서 전장에 화포를 제작 설치하였고 새로운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도록 노력하였다. 또한 전시에는 양향의 확보 즉, 물자의 보급이 중요하므로 이의 개선책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양향의 확보는 민심의 수습과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방편으로 운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7년의 왜란 동안 국정을 운영한 내용을 보면 철저하게 백성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1598년 관직에서 물러나 안동의 하회마을로 돌아온 그는 전쟁 중에 겪은 성패의 자취를 곰곰이 살피고 반성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뒷날을 대비하기 위해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하였다. 국보 제132호인 이 책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데 아주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병산서원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위치한 사적 제260호인 병산서원은 1863년(철종 14)에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47개 중 하나이다. 이곳은 서애와 그의 셋째 아들 류진을 배향하고 있는 병산서원의 건축은 복례문, 만대루, 입교당, 동재와 서재, 장판각, 전사청, 존덕사, 주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꼭 필요한 것만 갖춘 그러면서도 부족함이 없이 넉넉함을 보여준다.

병산서원 입구에서 바라본 복례문과 만대루의 지붕. 그 옆으로 목백일홍이 활짝 피어있다.
▲ 복례문과 만대루 병산서원 입구에서 바라본 복례문과 만대루의 지붕. 그 옆으로 목백일홍이 활짝 피어있다.
ⓒ 김성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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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을 바라보면서 걸어가면 복례문(復禮門)을 만난다. 이 이름은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간다는 <논어>의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따온 말이 아닐까 싶다. 복례문으로 들어서면 만대루 아래로 강단인 입교당(入敎堂)이 보인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처럼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가운데는 마루이며, 양쪽으로 온돌을 놓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강당을 중심으로 동서로 공부하던 원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학문을 세운다는 뜻의 입교당은 병산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자 공부의 중심인 강당이다.
▲ 병산서원의 강당인 입교당 학문을 세운다는 뜻의 입교당은 병산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자 공부의 중심인 강당이다.
ⓒ 김성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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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교당과 동재 사이로 나가면 서애를 배향한 사당인 존덕사(尊德祀)로 향하게 된다. 이곳은 단청이 칠해진 문과 담으로 엄격히 분리된 공간이며 일년에 두 차례 향사(享祀)가 있을 때만 열린다. 존덕사 동쪽에는 제수를 마련할 때 사용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으며, 서쪽에는 각종 서책과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있다. 또한 서원의 오른쪽에 위치한 병산서원의 지킴이의 집인 주사가 있고 '머슴뒷간'이라고 불리는 달팽이 모양을 닮은 뒷간인 통시가 있다.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와 병산의 모습
▲ 만대루와 병산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와 병산의 모습
ⓒ 김성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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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병산서원 건축의 백미는 만대루(晩對樓)라 할 것이다.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라는 두보의 시구에서 따온 만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모양이다. 두 개의 통나무를 거칠게 깎아 만든 계단을 타고 오르면 머리 위로 휘어진 거대한 통나무 대들보를 만난다. 곧게 뻗은 기둥과 함께 굽은 통나무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만대루 내부의 들보는 자연스럽게 굽은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 만대루의 굽은 들보 만대루 내부의 들보는 자연스럽게 굽은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 김성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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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대루라는 건물은 질서와 혼돈이 뒤섞인 카오스의 가장자리(The Edge of Chaos)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만대루 안쪽은 유교적 이상사회와 질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반면 그 바깥은 제멋대로 생긴 자연의 혼돈이 그대로 표출되어 있다. 만대루는 이런 혼돈의 자연을 서원 안으로 끌어당기는 역할을 한다. 특히 서원의 중심인 입교당에서 바라볼 때 만대루는 마치 사진에서 하나의 프레임과 같이 낙동강 너머 넓게 펼쳐진 병산(甁山)의 절벽을 담고 있다.

만대루에서 서원 안으로 보면 질서가, 밖으로 보면 자연이 드러나는데 사람들은 대체로 꽉 막힌 질서보다는 자연스러움을 선호한다. 그래서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대체로 바깥으로 펼쳐진 자연이 주는 감흥을 즐기는 편이다. 하지만 병산서원의 참모습을 보려면 안팎을 두루 살펴야 함이 기본일 것이다.


태그:#병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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