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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을 필두로 시작된 학교서열화 작업

모 언론이 보도하기 시작한, 전국고교를 수학능력시험 성적으로 평가한 순위가 논란이 되고 있다. 그 보도에 따르면 수능 성적 우수 배출 고교는 거의 외고나 특목고들이 자리하고 있다. 지역별로 고등학교들도 평가되었다. 그 결과를 가지고 고교평준화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평준화라는 가면 속에는 고등학교 간 엄청난 학력 격차가 숨겨져 있었노라고 보도했다. 그 여파인지 올해 국감장에서 일부 도교육청이 학력부진을 이유로 연일 뭇매를 맞기도 했다. 일부 도교육청에서는 학력부진을 탈피하고자 일선학교 경영능력 평가를 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사회가 경쟁의 소용돌이에 점점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다.

학교를 평가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 언론 보도의 취지 또한 무사안일하게 대처해온 학교들의 교육 시스템을 바로잡고, 각 학교가 지닌 문제점들을 파악하여 보다 나은 교육시스템으로 바꾸어 보자는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를 계기로 학교 간 경쟁체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학교 간 경쟁 시스템을 도입한 지 오래이고 이 시스템은 실패했다는 결론을 얻었다. 미국은 학교 평가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재정지원 등을 차등화 해왔다. 그 결과 우수한 학교는 더욱 발전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학교는 점차 도태되어 갔다. 그 편차가 심해져 학교 간 학력 격차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즉, 부유층이 거주하는 지역은 학교에 기부금도 많이 들어온다. 기본적인 재정뿐 아니라 기부금과 같은 부외 재원으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도입하거나 기자재를 도입하여 경쟁력을 키운 학교는 평가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평판이 좋은 학교는 좋은 학생들이 모이게 되고 부유한 계층의 자녀들도 더 많이 들어오게 되어 더 좋은 학교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그 반면에 흑인빈민 지역이나 저소득층이 밀집해 있는 지역의 학교는 기부금이 적다. 적은 재정으로 학교를 운영하다보면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게 된다. 평가가 나빠지면 좋은 학생은 떠나게 된다. 기부금도 줄고 국가에서 지원하는 지원금도 줄게 된다. 두 사례의 학교들은 점점 더 격차가 벌어지게 되고 두 학교간의 학력차이는 더 벌어지게 된다. 실제로 미국의 가난한 지역 학교는 학교 재정이 어려워 교사 채용뿐 아니라 학교 치안을 담당할 경찰 고용도 어려운 학교들이 많다.

경쟁의 논리는 열심히 노력하게 하여 더욱 발전시킨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 제도를 잘못 적용했을 경우, 미국의 경우처럼 학교 간 학력 격차만 늘어날 수 있다. 그 결과 가난의 대물림이 고착화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과연 성적이 전부일까?

또한, 학교를 평가하는 기준이 단지 성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현 사회의 도덕성에 대한 우려스러운 목소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를 배려해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심지어 사회지도층에까지도 그 문제는 예외가 아니다.

물론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사회적 분위기가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사회를 둘러보라!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야 내가 살 수 있다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질 않은가!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생부터 과외에 떠밀려 성적 이외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개인의 적성이 무엇인지, 개인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 환경에서 인격도야는 시간적 여유가 많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 일 뿐이다.

최근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부유층이 모여 있는 지역의 고등학교 출신이 수능 성적도 높다고 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이야기는 그 학생들이 소위 명문대학을 갈 것이고 이 사회의 지도층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과연 돈 들여 인격을 수양하고 소양을 기르는 교육을 따로 받고 있을까? 또한 우리나라 법관을 배출하는 시스템을 보자. 사법시험이라는 제도를 통해 배출되는 법관들은 법관이 되기까지 무엇을 했을까? 그들은 법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수년간 했을 뿐이다. 법관은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지만 그 능력이 법을 아는 데 그쳐서야 지도층이라고 명명하지 못할 것이다. 인문적 소양과 인격, 그리고 덕망이 갖춰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 한국사회에서는 덕망을 갖추고 인격과 소양을 기를 시간적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문제이다. 물론 본래 성정이 남을 배려하고 너그러운 배포를 지닌 분이 법관으로 많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사회 시스템에서는 그런 시간을 허락해 주지 않기 때문에 그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떠넘겨지고 있다.

정치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이 사회 지도자를 기르는 시스템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학교서열화는 그런 환경을 더욱 가속화 내지 고착화 시킬 것이 자명하기에 가슴 아픈 일이다. 임의로 세워진 줄에서 뒤처지지 않고 어깨 힘을 주기 위해서는 가난한 국민들의 아이들은 성적만능주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 성적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낙인찍기 좋아 하는 한국사회

한국사회는 낙인찍기를 좋아하며, 서열화 시키기 또한 좋아한다. 한국사회 만큼 교육열이 심한 나라도 드물다. 교육열 자체는 매우 좋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교육열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그것은 내 아이가 뒤처지면 안 된다는 사고가 꽉 찬 교육열이다. 아이의 재능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로지 남에게 앞서게 하기 위한 열정이 아닌가!

왜 그럴까? 그것은 낙인찍기 좋아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가 좋은 대학에 다니면 부모도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그렇지만 반대의 경우 부모는 어깨가 처지게 되고 부끄러워하게 된다. 좋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이유만으로 그 아이나 그 부모가 '실패자 또는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다. 어깨를 펴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대학 이름 있는 대학에 들어가고 봐야 하는 것이다. 학벌만능주의가 팽배해 있는 것이다. 학벌만능주의라는 것은 능력과 상관 없이 간판이 어떤가를 따지는 것이다.

신정아 교수 사건도 이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능력과 상관 없이 학벌 위주로 사람을 발탁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손쉽게 자신을 인정받으려는 개인이 가짜학위증을 내밀었고,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회가 발칵 뒤집히지 않았던가. 어쩌면, 능력보다는 학벌로 인해 발목 잡힌 개인이 자구책으로 가짜학위증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 사건 이후로 다양한 계층에서 가짜 학력이 문제가 불거져 나왔고 사회가 술렁거렸다.

어쩌면 이번 언론의 학교서열화 작업은 한국사회가 은근히 바라고 있던 일일지도 모른다. 모든 국민이 마음 속으로는 대학이든 고등학교든 이미 서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재되었던 욕구가 언론을 통해 표출된 것뿐이었다. 그 효과는 대단했다. 마른 장작에 불을 지피듯 사회이슈로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사회가 술렁인다. 서열이 낮게 평가된 학교는 자구책을 만들기 바쁠 것이다. 관료들은 그 모습에 흐뭇해 할 수도 있다. 경쟁은 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세계대학 평가가 매년 발표되고 그 결과로 상위에 랭크된 대학들은 홍보자료로 활용한다. 대학을 평가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다양하리라. 한국사회는 어떠한가? 우리 식으로 서열화를 바라본다. 서열이 높으면 좋은 대학인 것이다. A대학은 법학이 권위가 있는 대학이다. B대학은 사회복지 분야가 권위가 있는 대학이다. C대학은 산학협력이 우수하다 등등 각 대학마다 장점이 있고 나름대로 특색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색은 무시되는 것이 한국사회이다. 그런 사실로 어떤 결과를 초래해 왔는가! 백화점식 구조에 특색 없는 대학 형태로 발전해 오지 않았는가!

기본적으로 수능으로 고등학교를 서열화하는 것은 고등학교를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고등학교의 기능은 얼마나 좋은 대학교에 학생을 보내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는 과연 불가능한가?

김연아 선수가 피겨 퀸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누가 그를 두고 열등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그를 만든 것은 우리 사회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 시스템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선견지명이 뛰어난 어머니의 통찰력과 아이의 재능이 결부된 결과이다. 우리사회 시스템으로 들어온다면 지금의 김연아는 없다. 이 사실 또한 우리나라의 부모들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현실 앞에 놓인 경쟁에서 밀리기 싫기 때문에 자신의 수입의 전부를 아이의 교육에 투자한다. 그 투자라는 것은 김연아 어머니가 투자한 것과는 개념이 다르다.

김연아, 박태환, 최경주 등등 우리사회에 다양한 1등을 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인가? 비록 A대학에 가지 않더라도 사회에 훌륭히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사회는 다양한 모습이 존재하여야 한다. 획일적인 잣대는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그런 잣대를 만들려고 하기도 하고 그런 잣대인 양 들이대기도 한다.

한국을 탈출하여 성공한 사례들이 많이 있다. 한국사회 시스템이 싫어 탈출하는 사람들도 많다. 단지 교육 때문에 탈출한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우리는 과연 다양성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인가? 이미 우리나라는 다양한 민족들이 한 하늘 아래 살고 있다. 언제까지 나만의 색안경을 끼고 내가 만든 잣대로 세상을 볼 것인가! 시야를 돌려 세상을 보라. 얼마다 다양한가! 그것들을 안을 수 있을 때, 진정한 행복국가는 펼쳐질 것이다.


태그:#고교 서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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