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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에서조차 개인의 '행복(Happiness)'을 강조했던 미국인들은 하루종일 "행복하십니까", "행복합니다" 같은 대화를 주고받고, 프랑스인들은 "행복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상대방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행복하다'는 표현 중에 '시아와세'가 있는데, '시'는 '행복'에 해당하고 '아와세'는 '합친다'는 의미여서 '행복을 합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는 여성들만 쓰는 말이고 일본 남성들은 이 단어를 절대 쓰지 않는다. 또한 일본에서는 '자기만족'이라는 단어가 나쁜 뜻으로 쓰인다.

 

한국에서의 '행복'은 어떨까? 22일 저녁 7시 하자센터 마루에서 열린 슬로우라이프 대담 '다시, 행복을 묻는다'에서 머리를 맞댄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은 함께 행복하고 느린 삶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행복의 경제학>이라는 책을 들고 한국을 찾은 쓰지 신이치 메이지학원대학 국제학부 교수와 조한혜정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88만원 세대> 저자인 우석훈 박사가 자유롭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70여 명의 청중은 대부분 20대 젊은이들이었지만, 노랗고 빨갛게 머리를 물들인 사람들 사이에 희끗희끗한 머리의 50대 청중도 눈에 띄었다.

 

뉴요커는 행복하고, 파리지엔느는 안 행복할까

 

이날 대담은 '행복'이라는 단어에 대한 성찰로 물꼬를 텄다. 쓰지 교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독립선언에 나오는 '행복'이 세계 전반에 일반화됐다"고 말했고, 조한혜정 교수는 "미국은 개인이 노력해서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하다고 믿는다"고 동감을 나타냈다.

 

쓰지 교수는 "'자기만족'이라는 단어가 일본에서는 나쁜 의미"라고 설명하면서 "자본주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만족해서는 안 된다, 또다른 소비를 불러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결국 자본주의 경제는 모든 사람의 불행과 불만족 위에서 움직이는 시스템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특히 광고를 주목했다.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물건에 불만을 갖도록 하는 일이 광고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대담을 보기 위해 모인 젊은 청중에게 "지금 가진 물건에 만족할 수 있도록 광고를 만들자"고 당부했다.

 

우석훈 박사는 경제학적 측면에서 이를 보충 설명했다. 30년 전에는 사람들이 생활을 위해 쓴 돈이 소득의 30~35%였는데, 지금은 중산층의 경우 소득의 80%를 생활비로 쓴다는 것이다. 소득이 높아지고 생활이 풍요로워질수록 가처분소득이 줄어들어 가난해지는, 뭔가 대단히 이상한 상황이다.

 

조한혜정 교수는 "버블경제가 무너져 십 몇년 힘들었던 일본사회는 오랫동안 '없이 살아서' 성숙한 느낌이 든다"면서 "한국도 10년만 좀 가난했으면 좋겠는데, 이 정권에서는 (그런 가치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또한 쓰지 교수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 대항하는 '슬로우 비즈니스 스쿨'을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웃자 "결국 '비즈니스'가 '슬로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원래 '비즈니스'는 경쟁이 아니라 뒤처진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일보>의 슬로우라이프, 광고의 슬로우라이프

 

비즈니스 못지않게 경쟁이 혹독한 분야가 바로 교육이다. 한국과 일본은 모두 입시경쟁이 치열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라.

 

쓰지 교수는 "중고등학생들을 시험을 위해 공부를 하고, 학교를 나오면 자격을 위해 공부를 한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폭동을 일으키지 않는 젊은이들이 불가사의하다, 모두 마음이 착하다"고 말했다.

 

88만원 세대가 토익책을 덮고 짱돌을 들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은 없을까?

 

조한 교수는 청중들에 대해 "요즘 젊은이들에게서 폭동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면서도 "다른 전략이 나올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 모인 젊은이들은 폭동은 아니지만 '탈주'한 친구들"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친구들이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는 광고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고 가능성을 제기했다.

 

또한 조한 교수는 "여기 오기 전에 수업에서 이 책(<행복의 경제학>) 얘기를 했는데, 학생들이 슬로우라이프의 모델에 대해서 질문했다"면서 "아직 군데군데 조그만 모델들이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도 일단 작은 집단들이 가볍게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쓰지 교수는 정신지체인들이 사는 일본 홋카이도 '베텔의 집'을 소개했다. 그 곳의 특징 중 하나는 각자 자신의 약점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고 이를 연결고리로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그는 "경쟁사회에선 모두 강한 척 해야 하지만, 사람은 원래 약하기 때문에 서로 돕는 것이 가능하다"면서 "느리고 약한 점을 드러내고 그것으로 관계를 형성하자"고 강조했다.

 

"행복이 뭔지 나도 모르지만..."

 

그러나 슬로우하게 행복하자는 운동이 쉽지만은 않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모델이 없으면 사람들을 모으는 것부터가 어렵다. 슬로우라이프를 확산하기 위해 속도감 있게 목표를 세우고 성과를 내야 하는 딜레마가 생긴다. 조한혜정 교수는 "아름다운 동네들이 생기고 인프라가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슬로우라이프'라는 화두가 탈정치화되고 상업화될 수 있다는 우려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우석훈 박사는 "5년 전 '슬로우라이프'가 등장했을 때, 이 활동을 전면적으로 해보자는 제안을 환경운동 활동가들이 반대했다"고 전했다. 길거리로 나가서 구조적인 문제를 놓고 싸워야할 상황에, 다들 행복을 느끼자고 슬로우라이프를 외쳐선 안 된다는 것이 당시 활동가들의 주장이었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당시 가장 크게 캠페인을 벌이면서 '슬로우라이프'를 띄운 것은 보수언론인 <조선일보>였다.

 

우 박사는 또한 "이미 상업광고에 '슬로우라이프'가 들어가서, 어떤 신용카드를 쓰고 제품을 사야 슬로우한 것처럼 말한다"면서 "자본이 (상업화해서) 쓰는 속도가 빠르다, 어떻게 안 당할지도 생각해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결국, 이날 2시간 동안 계속된 대담에서 '행복'이 무엇인지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학자들을 향한 청중들의 질문은 "언제 행복을 느꼈냐, 결국 행복이란 무엇이냐"는 것이었지만, 누구도 딱 부러진 정답을 말하지 않았다. 조한 교수는 "깃발 들고 새로운 행복을 달성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의 정의를 해체하자는 것"이라고 이날 대담의 의미를 정리했다.

 

쓰지 신이치 교수는 "아직 행복이 뭔지 정의내릴 수 없다, 그래서 책 쓴 것을 후회한다"는 말로 이날 대담을 시작했고, 청중 질문에도 "지금도 행복이 뭔지 모르고 100년을 살아도 모를 것 같다"면서 "그러나 관계 속에서 내가 살아있다고 느낄 때 행복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버마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나무를 심던 일을 소개했다.

 

그 역시 40여 명의 버마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언제 행복하십니까?" 버마 사람들은 하나같이 "항상 행복하다"고 답했다. 다시 "특히 행복할 때가 언제냐"고 물었더니 "난처한 사람을 도와줄 수 있었을 때, 절에 공양을 할 수 있었을 때"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태그:#슬로우라이프, #쓰지 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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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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