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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8월 초하룻날은 제주에서는 '소분하는 날(벌초일)'이라 한다. 예전에는 이날만은 육지에 나가 있든 외국에 나가 있든 고향에 돌아와 벌초를 하곤 하였다. 시대가 변해 요즘은 많이 변했다.

 

나는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대부분 그랬듯 국민학교(초등학교) 1학년이 되자마자 벌초를 하러 다녔다. 어머니가 밥을 지을 때 보리밥이지만 조알을 약간 넣고 짓는다. 거기다 큰 맘 쓴다면 쌀을 한 줌 집어넣어 밥을 짓는다. 밥을 지을 때 고스란히 익혀야 쌀이 한 구석에 모여 그나마 쌀밥 흉내를 낸다. 그건 아버지 몫이다. 다음 쌀이 조금 들어 있는 밥은 맏형 밥이다. 나는 막내아들이어서 세 번째로 쌀 몇 알 들어 있는 밥 차지가 된다. 고구마가 한두 개 들어가면 그야 말로 꿀떡 같은 고구마 맛이 난다.

 

밥 짓는 냄새에 졸린 눈 비비고 일어나면 새벽 4시쯤이리라. 꼭두새벽부터 호미(낫) 갈고 점심 챙기고 소먹이 주고 부산한 움직임이 끝나면 새벽 5시쯤, 우리는(인동 장씨 남산파 제주도 재성공손종친) 동네 팽나무 아래 모여 뭔가를 기다린다. 한 10분쯤 지나 덜커덩 거리며 트럭 한 대가 팽나무 아래에 멈춰 선다. 사람들은 트럭에 오른다. 트럭은 먼지를 내며 새벽바람을 가르며 달린다. 트럭은 가다 길에 멈춰 선다. 타이어에 돌이 끼어 움직이지 못한다. 트럭에 탔던 청년들은 차에서 내려 힘을 합쳐 돌멩이를 꺼낸다. 다시 트럭은 달려가다 또 멈춘다. 이번엔 장마 비로 움퍽 패인 웅덩이에 타이어가 빠지고 말았다. 또 청년들은 내린다. 나뭇가지를 꺾어 타이어 밑바닥에 받치고 뒤에서는 밀고 차는 힘겹게 고무 타는 냄새를 풍기며 겨우 웅덩이를 빠져 나온다.

 

(이제는 모두 쌀밥이다. 예전에는 얼마나 쌀밥이 귀했으면 곤밥(고운 밥)이란 말을 썼을까? 지금은 각자 승용차를 타고 온다. 그러니 만남의 장소가 필요 없고 현장(묘소)으로 시간 맞춰 오면 된다. 길도 거의 포장 되어 웅덩이니 돌멩이가 타이어에 끼는 일이 없다.)

 

아직은 어둡다. 어렴풋 6시쯤 됐을 것이다. 종친들은 모둠소분(공동으로 조상 묘소에서 벌초 하는 것)을 부지런히 마친다. 대부분 나이 많은 어른들은 산담(묘를 둘러싼 돌 무리) 풀을 제거하고 젊은 청년들은 풀을 베고 어린 아이들은 베어낸 풀을 날라 먼 곳에 버리는 역할을 분담한다. 풀은 낫으로 베는데 산담에 다래가 까맣게 익어 있으면 그것은 아이들의 차지다. 그 맛은 달다. 입가가 까맣게 물들고 웃으면 검정 이빨이 보인다. 산담 둘레의 풀을 베다가 억새의 새순(새로 나온 싹)을 뽑아 그 속에 알알이 맺은 하얀 속살을 먹곤 한다. 모둠벌초 한 기가 끝날 쯤에 육지에 살고 있는 사람이 벌초에 오지 못함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내의, 양말, 장갑을 보내온다. 그게 그렇게 유용하게 쓰인다.

 

(요즘은 풍족한 탓에 그런 일이 없고 벌금 내는 선에서 끝낸다.)

 

지금은 모두 예초기를 사용한다. 산담은 그나마 제초제를 하여 풀이 돋아나는 걸 미리 방지하고 어떤 산담은 콘크리트로 만들어 풀이 나지 못하게 한다. 모둠벌초 중에 종친회 정기 총회를 한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소담을 나누는 자리이다.

 

모둠벌초가 끝나면 아이들이 공부 시간이다. 한자가 쓰여 있는 오래 된 비석 앞에 꿇어 앉아 이 묘의 주인은 누구이고 어떤 일을 했고 입도 몇 대 조상이다를 듣다 보면 저절로 조상의 얼을 되새기는 좋은 기회가 되곤 한다.

 

은호골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오랜 옛날이었다. 정시(지관)가 은호골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쯔쯔, 자리가 틀어 졌어. 약간 기울게 산 터가 잡혔단 말이야." 이 소리에 종친들은 의논을 했다. "묘 자리를 새로 잘 정리 합시다." 종친들은 택일(좋은 날짜)을 하여 이장(묘를 옮김) 하려고 묘를 팠다. 한참을 파다가 깜짝 놀랐다. 호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종친들은 얼른 묘를 메웠다. 호랑이는 그나마 달아나지 않았고 그 후 100년이 지나면 돈 많이 버는 자손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생겼다. 그 후 은호골은 부묘(부자가 태어날 묘) 자리라 했다.

 

(최근에는 부묘자리라는 전설보다는 귀묘(훌륭한 직업을 가진 자가 태어 날 묘소)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으며 요즘이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은호골은 제주도에서 몇 안 되는 최고의 묏자리로 부근에 경주 김씨의 묘와 더불어 좋은 묏자리로 소문이 나 있다.)

 

모둠벌초가 끝나면 오후 1시쯤 된다. 종친들은 이제부터 개인 묘 벌초 시간이다. 뿔뿔이 헤어진다. 나는 모처럼의 중압감에서 해방된다. 그나마 가족끼리만 남은 벌초 시간이기에 약간은 여유가 있다. 나는 점심을 들고 도치돌을 찾는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큼 길이 나 있다. 사실을 그 길을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라 소가 다는 길이다. 소가 먼저 다녀 길을 만들면 내가 다니기 편했다. 도치돌 옆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칡 줄기를 잡고)를 하여 동굴 가는 길에 웅덩이에 고인 물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물맛이 시원하고 맛있다. 점심시간이다. 어머니가 싸 준신 점심에는 갈치 구은 것, 멸치 볶은 것, 마늘지, 거기다가 달걀을 풀어 파를 썰어 넣은 것이 한 냄비 들어 있다.(달걀 한 개면 보통 냄비 하나 가득 반찬을 만들었다.) 멸치 젓갈에 물외(오이 종류)를 꾹 찍어 한 입에 먹으면 그 맛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느라 아침밥도 못 먹었는데…. 한나절 열심히 일을 해서 배가 고플 때로 고파서인지 밥맛을 최고로 좋았다.

 

(도치돌은 높이가 한 6미터쯤 되는 도끼 모양의 돌로 납읍리 하천에 있으며 내가 찾은 시간에는 벌초객 한 가족이 탁자에 둘러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김밥에 버너에 고기까지 굽고 시원한 아이스박스에 얼음 물까지…. 승용차를 세우기 편하게 한 편에 주차장을 만들었다. 도치돌 옆에는 식당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점심 시감쯤에는 온통 길가는 주차장이고 음식점은 그야 말로 인산인해, 예약도 받지 않는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고난의 행군이 이어진다. 가시덤불을 헤치며 길도 아닌 숲길을 만들어  묘소에 도착하면 온 몸의 힘은 빠질 대로 빠진 넉 다운, 그래도 힘을 내야 했다. 시간 내에 벌초를 마쳐야 차를 탈 수 있다는 생각에 죽을힘을 다한다.

 

보통 5~6기 정도 벌초는 두 사람이 하면 5~6시간 걸린다. 모든 벌초를 마치고 바쁜 걸음으로 내 달려 만남의 장소에 도착하면 해는 뉘엿뉘엿 오후 7시를 가리킨다.

 

만남의 증표가 있는 곳에 소나무 가지가 걸려 있으면 온 몸에 힘이 빠진다. 그냥 주저앉아 버린다. 그러기를 한 시간 정도 지친 몸을 쉬고 나면 이미 날은 어두워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라곤 하나도 없다. 걸어서 한두 시간 정도 지나면 집에 돌아온다. 아마 9시는 훌쩍 넘긴 밤이 된다.

 

(요즘은 바쁠 일도 없다. 예전에는 꼭 팔월 초하룻날에 벌초를 했다. 비가 오나 태풍이 불어도 변한 없는 것은 팔월 초하룻날은 벌초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팔월 초하룻날을 기준으로 전 일요일과 토요일, 후 일요일과 토요일을 벌초 기간으로 잡고 있다. 편한 날짜에 날씨를 보아가며 모둠벌초를 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통신망이 발달되었고 기동성이 발달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예전에는 모든 초등학교에서 벌초방학을 실시했다. 그게 당연한 도리로 생각하는 불문율이었으나 2009학년도 통계를 보니 초등학교 조사학교 76개교 중 벌초 방학을 한 초등학교 34개교로, 45% 밖에 벌초 방학을 하지 않았다.)

 

제주는 예로부터 추석 전에 조상 묘를 벌초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육지부에서는 명절은 묘소를 찾아 성묘하며 차례를 지내는 것과는 달리 조상 섬기는 일에 지극정성이 있었다.

 

팔월 보름 명절이 다가오면 조상의 묘에 간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베어내고 산뜻하게 단장하여 조상님들이 편히 차례 지내러 오게 함이다.

 

옛날에는 풍수지리설을 중시 여겼다. 명당을 찾기 위해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곡식을 심어 놓은 남의 밭에도 필요하다면 묘를 썼다. 주인에게 허락도 받지 않았다. 그냥 묘를 쓰고 한말지기(100평) 값을 지불하면 되었다. 그러면 밭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수용했다. 요즘 같으면 야 죽기 살기로 쌈박질 날 일이고 법으로 해결할 일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자손이 없어 벌초를 못하면 묘소에 잡초가 우거져 지저분하게 된다. 이를 골총이라 하여 집안이 몰락했다는 걸 미리 짐작하는 증표로 삼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벌초 모습과 장묘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

 

오름묘지를 만들고, 공동묘지를 만들고, 봉분형(초가형) 묘지를 만들고, 사각형(기와형) 묘지를 만들고, 절에 납골추모원도 만들고, 양지공원에 대여 묘지 만들고, 수목장도 만들고….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제주인터넷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벌초, #미풍양속,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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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통일교육위원, 한국녹색교육협회이사,교육부교육월보편집위원역임,제주교육편집위원역임,제주작가부회장역임,제주대학교강사,지역사회단체강사,저서 해뜨는초록별지구 등 100권으로 신지인인증,순수문학문학평론상,한국아동문학창작상 등을 수상한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고 싶음(특히 제주지역 환경,통일소식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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