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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며칠 전에 책 두 권을 '택배'로 받았습니다. '대전문인협회 총연합회'에서 발간한 책이었습니다. '대전시승격 6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책으로 '대전사랑 시선집'과 '대전사랑 에세이선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습니다. 

전국문인 85명이 참여한 '대전사랑 에세이선집'에는 제 글도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청탁을 받고 미적거리다가 원고 마감 당일에 써서 보낸 글인데, 활자화된 글을 읽어보니 제법 재미도 있고 괜찮은 글로 느껴졌습니다.

하여 인터넷 지면에서 제 글을 즐겨 읽어주시는 분들과도 나누고자 합니다. 너그러이 혜량(惠諒)해 주시옵기 빌며….     

                              대전, 젊은 날의 소중한 추억들

<1>

충청남도의 서북쪽 끄트머리 태안 구석에서 사는 내가 대전 땅을 처음 밟은 때는 1963년, 중학교 3년 시절이다. 태안중학교 축구팀의 골키퍼로 '충남학생선수권대회'인가 뭔가 하는 축구대회에 나가게 되어 난생 처음 대전 땅을 밟았다.

1965년(고2 시절) 아직 졸업생도 내지 못한 신설 학교인 태안고등학교 축구팀이 서산농림고와 서령고를 이기고 서산군 고교축구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 서산군 대회 우승 1965년(고2 시절) 아직 졸업생도 내지 못한 신설 학교인 태안고등학교 축구팀이 서산농림고와 서령고를 이기고 서산군 고교축구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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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머릿속에 남아 있는 대전 역 풍경이라든가 기억거리는 하나도 없다. 수중전이었던 예선 경기에서 1대 0으로 져서 일찍 돌아온 기억 밖에는 없다.

그리고 3년 후인 1966년, 고3 시절에도 축구 때문에 대전을 갔다. 태안고등학교 축구팀의 골키퍼로 역시 충남학생선수권대회인가 뭔가 하는 축구대회에 출전을 하게 되었다. 공주농고와 천안농고를 격파하고 대전상고와 결승에서 맞붙게 되었다. 당시 대전상고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축구 명문고였다.

공교롭게도 또 수중전이었다. 골키퍼인 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을 막아내었다. 다이빙도, 상대팀 공격수와 몸싸움이며 충돌도 무수히 했다. 우리 팀은 공을 가지고 하프 라인을 몇 번 넘어가지도 못했다. 상대편 골키퍼는 팔짱끼고 서서 한가롭게 구경이나 하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게임이 끝났을 때 보니 대전상고 골키퍼는 옷에 흙 한 점 묻지 않은 새신랑 꼴인데 반해 나는 완전히 똥독에 빠진 쥐새끼 꼴이었다. 팔이며 어깨며 옆구리와 다리 등 안 아픈 데가 없었다.

결과는 1대 0 패배였다. 한 골 먹은 것은 페널티 킥으로 내준 것이어서 억울함이 컸다. 그것도 심판 판정에 문제가 있었다. 우리 팀 수비수 한 명이 넘어지면서, 벌렁 누운 상태에서 팔이 공에 닿았는데, 그걸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고 페널티 킥을 선언했다. 어찌 보면 우리는 완전히 타동 탄 것이었고 대전상고는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본 셈이었다.

많은 이들이 우리 팀의 분패를 아쉬워했다. 골키퍼의 수많은 선방에도 불구하고 페널티 킥으로 한 점을 내주어 지고 말았으니, 그건 우리 팀 전체의 분패이기보다는 골키퍼 개인의 분패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경기에서 지기는 했지만 많은 이들이 내게 와서 어깨를 두드려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는 대전상고 선수들도 여러 명 내게로 와서 악수를 청하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기도 했다.

1966년(고3 시절) 충남학생축구선수권대회 출전을 앞두고 장성진 교장 선생님, 이범조 체육 선생님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장성진 교장 선생님은 예전에 고인이 되셨고, 이범조 체육 선생님은 소식을 모르고 있다.
▲ 충남학생선수권대회 출전을 앞두고 1966년(고3 시절) 충남학생축구선수권대회 출전을 앞두고 장성진 교장 선생님, 이범조 체육 선생님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장성진 교장 선생님은 예전에 고인이 되셨고, 이범조 체육 선생님은 소식을 모르고 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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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3 시절에는 예선 경기에서 지고 말았지만, 고3 시절에는 두 경기를 이기고 결승에서 축구명문 대전상고에게 1대 0으로 졌으니 과히 섭섭지 않은 결과였다.

나는 이처럼 경기에서는 졌지만 칭찬을 많이 받았던 고3 시절의 상당히 특별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나는 대전하면 으레 고3 시절 대전상고와의 축구 경기가 떠오른다. 그 경기를 어느 경기장에서 했는지, 그 기억은 분명치 않다. 그 시절에 대전공설운동장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대전 시내 어느 축구경기장에서 대전상고와 충남학생선수권대회 결승전 경기를 벌이고, 페널티 킥으로 한 점을 주어 애석하게 패배한 사실은 내 청소년 시절의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대전을 갈 때마다, 그리고 축구 경기를 볼 때마다 그 소중한 추억이 지금도 나를 40여 년 전 고교생 시절로 데려다주곤 하는 것이다.

<2>

1969년 육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이듬해 백마사단 도깨비연대 전투병으로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었다(세 번이나 지원을 거듭하여 갔으니 '뛰어들었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다).

도깨비연대 대표 배구선수, 1중대 소총병, 1대대 특별기동대 경기관총 사수, 대대장 경호병, 1대대 중대본부 경비소대 초병, 대대정문 위병 근무 등을 전전하다가 1년 2개월 만인 1971년 10월 귀국했다.

고엽제로 초토화시킨 야산에다가 진지를 만들고, 주간에는 맨몸에 방탄조끼만을 걸친 채 사역 등을 했다. 이때 고엽제 접촉이 이루어진 듯싶다.
▲ 베트남 전장에서의 한 모습 고엽제로 초토화시킨 야산에다가 진지를 만들고, 주간에는 맨몸에 방탄조끼만을 걸친 채 사역 등을 했다. 이때 고엽제 접촉이 이루어진 듯싶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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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에 내린 다음 부산에서부터 처음으로 고속버스를 타보았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우리 파월 장병들의 전투 수당으로 경부고속도로가 만들어졌다는 말을 들은 탓에 괜한 자부심 같은 것도 있었다.

대전에서 내렸다. 태안을 가려면 어디에서 내리는 게 좋을까 생각을 하다가 천안까지 올라가지 않고 대전에서 내렸는데, 그때까지는 내게 천안보다 대전이 좀더 친숙한(?) 곳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대전역 근처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호주머니에 돈도 있겠다, 한창 혈기 왕성한 젊은이였다. 여관방에서 혼자 잔다는 게 좀 뭣하고 해서 여관 주인에게 부탁하여 여자를 불렀다. 여자와 맥주를 마시며 쓸데없는 얘기만 했다. 애초 관계를 할 생각은 없었다. 몸의 순결에 대한 남다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종교(천주교)로부터 오는 계율도 있었다.

그 날 밤 여자는 편한 잠을 잤다. 그렇게 곤히 잘 잘 수가 없었다. 월남에서 귀국한 장병에게서 맥주 대접을 받고, 관계도 하지 않으면서 하룻밤을 잘 잔 여자는 이른 아침에 돌아갔다. 나는 그녀에게 화대를 후하게 주었다. 남자와 관계를 하면 얼마를 받느냐고 물은 다음 한푼도 깎지 않고, 덤까지 얹어 주었다.

내가 최초로 경험(?)한 여자였다. 관계는 하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한 방에서 하룻밤을 같이 한 여자였다. 여자는 내게 "참 이상한 아저씨"라고 했다. "아저씨 같은 남자는 처음 본다"고도 했다. "아무 걱정말고,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한번 해 보라"는 이상한 말도 했다.

하지만 나는 도리질을 했다. 여자가 보지 않을 때도 혼자 도리질을 하면서 여자 옆에 누워 잠을 자면서 정말 이상한 생각을 많이 했다. 쿨쿨 곤한 잠을 잘도 자는 여자 옆에서 길래 잠을 못 이루며 이상한 생각을 많이 하다가 소설 소재를 하나 얻었다. 소설의 씨앗인 셈이었다.

나는 그 소설의 씨앗을 오래 가슴에 간직하고 살았다. 그 소설의 씨앗은 내 가슴에서 싹이 트고 세월과 함께 점점 나무로 자라났다.

1983년 9월부터 <가톨릭신문>에 장편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왜 그렇게 활자가 작았는지, 또 어떻게 그 작은 활자를 읽을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기도 하다.
▲ <가톨릭신문> 사고(社告) 기사 1983년 9월부터 <가톨릭신문>에 장편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왜 그렇게 활자가 작았는지, 또 어떻게 그 작은 활자를 읽을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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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소설문학'지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의 꿈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3년 '가톨릭신문'에 장편소설을 연재했다. 소설의 제목은 <들려오는 빛>이었다. 주간신문에 장편소설을 연재한다는 게 여러 가지로 쉽지 않은 일이어서 1년 동안 절반 정도만 연재를 하고 나머지는 전작으로 썼다. 그리하여 1200매 분량의 장편소설을 완성했다.

그 소설을 1986년 내 두 번째 저서로 출간했는데, 나는 <들려오는 빛>이라는 제목을 고수하고 싶었지만 출판사(지금은 없는 안암문화사) 사장의 고집으로 <인간의 늪>이라고 했다. 출판사에서 신문 광고도 하고, 꽤 호평을 받은 소설이었다.

그 소설에는 대전이라는 지명도 많이 등장하는데, 파월 귀국장병과 어떤 여자의 최초 만남과 재회의 장소가 바로 대전이기 때문이다.

슬프고 마음 아프고 기가 막힌 이야기들로 전개되는 그 소설은 결국 아름다운 결말을 보여주는데, 많은 독자들이 크게 감동을 받았던 듯싶다.

그 소설은 내가 아끼는 작품이다. 기회가 온다면 재출간을 하고 싶은 소설이다. 특이한 소재, 구성력과 상상력, 그리고 작가정신의 충일성을 오늘에 다시 되살려보고 싶다.

그 소설을 생각하면 베트남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젊은 시절 어느 날, 대전역 부근에서  내가 최초로 하룻밤을 함께 했던 여자, 관계는 하지 않고 얘기만 하다가 떨어져 잠을 잤던 여자 생각이 난다.

주간신문에 장편소설을 연재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어 1년 동안 절반 정도만 연재를 하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전작으로 써서 1986년 두 번째 저서를 출간했다.
▲ 장편소설 <인간의 늪> 주간신문에 장편소설을 연재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어 1년 동안 절반 정도만 연재를 하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전작으로 써서 1986년 두 번째 저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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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로부터 어언 40년 가까이 흘렀다. 중간에 대전은 광역시가 되었고, 인구 150만 대도시가 되었다. 서해안고속도로와 연결된 고속도로도 건설되어서 태안에서 대전을 가는데 1시간 4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게 되었다.

모든 풍경은 엄청나게 달라졌지만, 옛날의 추억은 그 시절의 대전을 그립게도 한다. 세월이 흘러 세상 풍경이 달라지고 또 달라졌지만, 내가 처음으로 관계도 하지 않으며 하룻밤을 함께 했던 그 여자는 그냥 젊은 이십대 여자로만 기억된다. 당연히 그 후로는 다시 만난 적 없으니….

살아 있다면 그 여자도 이제는 환갑을 넘겼거나 그 근방일 텐데…. 세상의 온갖 풍상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을지, 조금은 아릿해지는 마음이기도 하다.


태그:#대전 추억, #고교시절 축구선수, #장편소설 '인간의 늪', #파월장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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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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