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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은 피살자 염규호의 부인이 제왕절개 수술 비율이 유달리 높아 징계를 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런 일로 병원에서 경고를 하기는 해도 징계를 내리는 일은 관례에 없는 일이라서 더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제왕절개수술 비율이 낮은 젊은 의사 하나를 괴롭혔답니다. 온갖 루머를 퍼뜨리면서 그를 왕따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의사가 반발하여 상부 기관에 투고를 한 결과 그녀가 징계를 먹은 거라고 하더군요."
"자기 수술 비율이 높은 건 생각하지 않고 비율이 낮은 사람을 음해했다고?"
"그렇답니다."

조수경은 뭐라고 말을 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남편 말입니다."
"희생자 말이지?"
"염규호씨는 경제 정의 시민단체 간부였어요."
"그건 파악된 사항이고."

"그는 또 거주지 아파트의 주민대표를 맡고 있었더군요."
"참 많은 일을 하며 살았네."
"그는 자주 주민회의를 소집하여 주민들의 권익을 요구하는 일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아파트 화단에 값비싼 나무로 조경을 새로 했고 엘리베이터도 화려하게 다시 꾸미게 했습니다."

"주민 대표의 역할을 나름대로 했다고 봐야 하나?"
"그런데 말입니다. 최근 들어 그가 가장 힘을 쏟은 것은 아파트 가격 담합이었습니다. 일정액 이하로는 아파트를 절대 내놓지도 말고 팔지도 말라고 주민들에게 공공연히 강요하는 행위 있잖습니까?"

조수경으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그런다고 주민들이 호응을 할까?"
"다수의 힘으로 그런 분위기를 몰아가고 호응하지 않는 가구에게는 왕따시키겠다는 식으로 은근히 협박까지 한 모양입니다. 마침 염 교수 아들의 친구가 같은 아파트에 살았는데, 부모가 염 교수를 흉보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들은 염 교수 아들에게 그 말을 전했고요. 친구에게서 그런 말을 전해들은 아들이 아버지 염 교수에게 정식으로 따졌다는 겁니다. '아버지는 대학 선생님에다 경제 정의 실천단체의 간부로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고 했겠지요. 아마 아들 녀석은 정신이 제대로 박힌 모양입니다."

조수경은 방 안이 어두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범인은 나라의 구석구석에 있는 치부를 찾아 가공할 폭력을 행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녀는 마음이 암담해졌다. 그때 부장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용 부장은 범인의 프로파일링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내일 경찰청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한다는 것이었다.

인사도 없이 대뜸 용건을 말하는 것은 평소 용 부장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용 부장도 상부로부터 다급한 압력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조수경은 프로파일링에 착수할 수 없었다. 그녀는 김인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는 버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순간 그녀의 뇌리에 아브라함이 번뜩 떠올랐다. 그를 찾아가 자문을 구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향수(香水)

수경, 텔레비전 저녁 뉴스들은 최소 20분 정도를 할애하여 염규호 살인사건을 보도하더군. 범행의 의도나 목적은 물론 범행 대상의 성격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리고 범인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정황에서, 사건에 대해 20분씩이나 보도를 하자니 온갖 추정이 난무할 수밖에 없었지. 아마 수경도 기자들로부터 많은 성가심을 받았을 거야. 미국에서도 언론과 자주 접촉하는 경찰치고 신통한 수사관 없다는 말이 있는데 한국도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

다음 날 아침 신문들은 정말 우리를 웃음 나오게 만들었어. 범인은 이 사회의 기득권자들을 범행 대상으로 노리는 인물일 거라든지, 아니면 이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만 노리는 실패한 인물일 거라든지 등의 추정은 그래도 순진한 편에 속했지. 우려했던 대로 신문들은 이 가공할 연쇄살인극을 불순 세력의 소행이라고 단정하기 시작했어. 한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불순 세력이라고 하면 곧 친북 좌파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온 땅이었지.

신문과 텔레비전들은 희생자를 추모하면서 그들 부부를 미화하기 시작했어. 그들의 성실성과 가족애와 봉사 실적이 근거 없이 만들어지고 부풀려졌지. 악마에게 희생된 사람과 그 가족을 예찬하는 데 감히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인터넷에서는 염규호 교수를 추모하고 사랑하는 '염카페'와 '염사모'가 결성되었지.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에도 성실히 공부하여 일류대학과 미국 유학을 마쳤으며, 교수로서 실력이 출중했고 시민운동에도 정열을 바쳤으며 자애로운 아버지, 자상한 남편이었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졌지.

희생자뿐 아니라 그의 아내가 의사로서 무의탁 노인 요양원인 <자애원>에서 헌신적인 봉사 활동을 해 왔다는 사실도 보도되었어. 그들 부부가 소탈한 옷을 입고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는 사진이 신문에 크게 실렸더군. 사진은 의도적으로 배경을 어둡게 함으로써 두 사람의 얼굴을 더 환하게 보이도록 만든 것 같더군.

마침내 광화문에서 촛불집회가 열렸어. 화목한 가정을 파괴하고 국가적 인재를 살해한 악마를 기필코 포획하여 징벌한다는 결의문이 채택되었지. 대한민국을 지키자는 플래카드가 뉴스 화면에 보이고 콧물을 홀짝이는 생머리 소녀들의 붉어진 코와 눈자위도 화면을 탔어.

수경이 나에게 전화를 해온 것은 그 즈음이었을 거야.

"박사님, 한 번 뵙고 상의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수경의 목소리가 얼마나 반가웠던지? 하지만 나는 수경의 제의를 거절했어. 아니 정확히 말해서 유예한 것이었지. 나는 수경이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내색을 하는 것이 결례라고 생각되어 수경에게 물었지.

"무슨 일인지요?"
"최근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 때문입니다."
"미스 조, 그 일이라면 지금은 시기가 아닙니다. 며칠 있다 다시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나는 수경에게 왜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닌지는 설명하지 않았어. 그러나 수경은 내 말을 다소곳이 받아들이더군. 수경 나름대로 생각을 했겠지. 아직은 사건의 어떤 실마리도 나타나지 않은 단계이니 나로서도 들려 줄 말이 없어 그러는 것이라고 짐작했을 거야.

"며칠 더 기다리다 보면 뭔가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그때만 해도 누가 염규호의 부인이 실종되리라는 생각을 했겠어? 염규호의 부인 이숙희는 남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무의탁 노인 봉사 일을 계속했지. 그녀가 무의탁 노인 지원 의사회 회장이고, 모 정당의 차기 총선 비례대표 내정자라는 사실은 전혀 보도되지 않았었지.

그녀는 <자애원>에 갔다 오는 길에 납치되었지. 수경도 알고 있듯이 그녀는 노인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나오던 길이었어. 큰 길까지는 아주 한적한 산길이었으니까 범인은 그 틈을 노렸던 것 같아. 그녀의 승용차는 산길에서 엔진이 가동 중인 채로 발견되었지.

이틀 후 경찰청으로 비디오테이프가 우송되었지. 사실 지금 얘기는 내가 수경에게 들은 것인데 우리의 대화를 온전히 하기 위해 재연하지 않을 수 없군. 경찰청에서는 바로 비디오테이프를 틀어 보았지. 비디오에는 납치된 여인 이숙희의 양심고백이 들어 있었어.


태그:#비디오, #시민단체, #제왕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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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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