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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싱사 누나가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가족을 위해 청춘을 희생한 누나의 얼굴에도 어느덧 주름살이 스몄지만 그래도 누나는 예쁘다.
 미싱사 누나가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가족을 위해 청춘을 희생한 누나의 얼굴에도 어느덧 주름살이 스몄지만 그래도 누나는 예쁘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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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윤동주의 시 '누나의 얼굴')

동대문 보문시장 미싱 공장에서 일하는 누나를 만나러 가는 길과 오는 길에 '누나의 얼굴'이 저절로 흥얼거려졌다. 해가 뜨자마자 일터에 갔다가 해가 저문 뒤 얼굴이 숙어 들어서야 집으로 온 누나! 해바라기처럼 환했던 얼굴은 장시간 노동에 지쳐 핼쓱해졌고, 고왔던 손은 노동에 숙련되면서 굵어지고 말아 손 좀 보자고 하면 자꾸 뒤로 감추곤 했다.

공장에 간 누나 덕분에 배곯던 부모형제들은 끼니를 때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다. 누나는 신학기가 되면 책가방과 공책 심지어 필통까지 소포로 부쳐주었고, 명절이 되면 양손 가득 선물꾸러미를 들고 동구 밖에 들어서곤 했다. 뿐만 아니다. 누나는 공장에서 번 돈으로 동생 학비도 부쳐주었고 아버지에게 소도 사주었으니 누나는 그냥 여자가 아니라 집안을 일으킨 영웅이었다.

시다 월급 1년치 모아 아버지에게 송아지 사준 우리 누나

강진새마을중학교 졸업사진. 누나(두 번째 줄 우측에서 두 번째)는 가족을 위해 진학을 포기하고 봉제공장 시다가 되었다.
 강진새마을중학교 졸업사진. 누나(두 번째 줄 우측에서 두 번째)는 가족을 위해 진학을 포기하고 봉제공장 시다가 되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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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누나 구영미(47·이하 누나)씨가 고향인 전남 강진을 떠나 서울로 돈 벌러 간 것은 1978년. 새마을 재건중학교를 마친 누나는 동네 사람이 청계천 광장시장에서 운영하는 봉제공장의 시다로 취직했다. 누나도 공부하고 싶었다. 비바람 겨우 가려주는 천막 교실에서 어렵사리 공부하던 누나라고 여고생의 꿈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가난한 살림살이에다 동생 셋의 앞가림까지 생각하면 공부는 넘볼 수 없었다.

열여덟 시다의 꿈은 미싱사였다. 미싱을 타면서 능수능란하게 옷을 짓는 미싱사, 시다를 이리저리 호령하며 혼내기도 하는 미싱사는 하늘의 별처럼 높아보였지만 무엇보다 미싱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시다보다 몇 배는 돈을 잘 벌었기 때문이다. 어서 돈 벌어서 동생들 학비도 보내주고, 아버지에게 소도 사주고 싶었던 누나는 미싱사가 되기 위해 뼈 빠지게 일했다. 

누나는 봉제공장에서 하루 12시간씩 일을 했는데 일감이 밀려드는 명절 무렵이 되면 야간잔업 철야를 일삼아야 했다. 미싱을 타고 싶었던 누나! 누나는 미싱사의 숙련된 기술을 곁눈으로 익히고 또, 미싱 보조에 오르기 위해 미싱사 언니의 심부름도 곧 잘했지만 눈물을 쑥 뺄 정도로 구박 받는 날도 숱했다.

객지 밥은 눈물 밥이었다. 부모님도 동생도 보고 잡았다. 천막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은 어디에서 무엇하고 있을까. 서글픈 마음에 싱숭생숭 하다가도 집안을 도와야 할 처지를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싱사 언니의 비위를 맞추고, 물건을 옮기고, 심부름을 하고, 눈이 오고 비가 오고, 해가 뜨고 지고, 잔업에 졸다가 깨다가 그렇게 시다생활 1년이 되면서 적금통장이 만기가 됐다.

'아버지 20만원 부쳤으니 소 한 마리 사세요!'

누나는 시다로 일하면서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부은 적금 20만 원을 찾아서 아버지께 부쳤다. 서울에 돈 벌러 오면서 다짐한 첫 번째 소원은 아버지에게 소를 사드리는 것, 소 한 마리를 사드리는 것은 가난한 살림밑천 장만해 드리는 것 이상의 사무친 사연이 있었다.

아버지(78)가 초등학교 5학년인 누나에게 소를 매고 학교에 가라고 하자, 지각생 소리를 듣기 싫었던 누나는 바삐 소를 몰다가 그만 구덩이에 빠뜨리면서 소의 다리가 부러지고 만 것이다. 소의 다리를 부러뜨린 것은 살림 한 밑천을 무너뜨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5만 원에 산 송아지를 중간 소로 키웠지만 노동력을 상실하면서 쓸모없어진 소는 우시장에서 3만 원에 팔렸다. 누나는 하늘이 노래졌다. 근심에 젖은 아버지에게 불호령을 맞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더 죄스럽고 사무쳤던 것이다.

동생의 명문대 진학은 누나의 꿈... 못 배운 한 풀다!

시다를 거쳐 미싱사가 된 젊은 시절의 예쁜 누나가 봉제더미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시다를 거쳐 미싱사가 된 젊은 시절의 예쁜 누나가 봉제더미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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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다 해서 번 돈은 송아지가 됐고, 송아지는 어미 소로 컸고, 어미 소는 튼실한 송아지들을 쑥쑥 잘도 빼면서 동생들 학비가 돼주었다. 게다가 시다에서 미싱 보조가 된 누나는 어느덧 미싱을 멋지게 타는 미싱사가 됐다.

궁핍하던 살림이 조금 펴지긴 했지만 자식을 도회지로 내보내 가르칠 만큼의 살림은 아니었다. 그런데 막내는 강진 고등학교로 진학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데도 큰 도회지인 광주의 고등학교에 가겠다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는 것이었다.

학비만 대면 되는 게 아니라 방까지 얻어주는 등 이중살림을 할라치면 그 돈은 어디서 날까. 아버지는 한숨을 쉬면서 막내를 달랬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어 누나까지 가세했는데 '아버지, 자식을 가르치지 않으려면 뭐 하러 낳았냐!'고 항의하면서 '내가 가르쳐도 가르칠 테니 막내를 광주에 보내'라고 지원사격을 하면서 결판이 났다. 누나는 당시를 회상하면 아버지에게 죄를 지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못 배운 한을 동생에게만은 물려주지 않으려고 한 것이지만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아버지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시골 살림에 자식들을 대처로 내보내 공부를 가르친다는 것은 참말로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한 막내 동생의 꿈은 기실 누나의 꿈이었다. 광주의 고등학교로 진학한 막내는 자취생활을 하면서 밤샘공부를 했는데, 누나는 잔업이 끝나면 공중전화로 달려가 도서실로 전화를 걸어 격려를 했다. '학비는 누나가 알아서 할 테니 학비 걱정 말고 어쨌든 공부에 전념해라!', '밥은 꼬박 챙겨 먹고 다니 거라 잉!', 그런데 막내는 명문대 입학에 실패했다.

막내의 꿈이 실패한 게 아니라 누나의 희망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막내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서울에 올라와 누나의 밥을 먹으면서 모질게 공부한 덕분에 이듬해에 원하던 명문대에 합격했다. 창신동 옥탑방에서 동생의 합격소식을 접한 누나는 동생을 부둥켜안았다. 못 배운 한과 객지 밥 설움이 씻기는 순간이었다.

미싱사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30년 경력 프로 미싱사인 누나가 해바라기처럼 웃는다.
 30년 경력 프로 미싱사인 누나가 해바라기처럼 웃는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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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마흔 일곱 살 누나는 아직도 현역 미싱사다. 30년 경력의 베테랑 미싱사인 누나는 동대문 보문시장 입구의 봉제공장에서 하루 10시간씩 일해서 하루 10만 원을 번다. 누나는 일할 줄만 알지 돈을 쓸 줄은 모른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노원구 월계동에 아파트(24평)도 장만했다. 가난한 농사꾼의 둘째 딸 누나는 객지 밥 눈물 밥을 잘도 참고 먹으면서 서울의 꿈을 이룬 것이다.

"어머니는 밥을 할 때마다 쌀을 한 줌씩 모아두었어요. 쌀 모을 형편이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모은 쌀을 장에 내다 팔아서 자식들 학비를 마련하곤 했어요. 어머니의 저축법을 자연스레 물려받은 탓인지 돈을 꼬박꼬박 모았고, 허튼 데 쓰지 않으려고 가계부를 쓰면서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었어요."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처럼 밝다. 명문대를 졸업한 뒤 결혼해 딸까지 둔 막내(40) 동생은 제 앞가림 하면서 잘 살고 있으니 큰 걱정 없고, 아들 둘을 대학까지 가르친 아버지와 어머니(74)는 고향 사람들에게 큰소리치며 잘 지내고 계시고, 치기공사인 남편과 아들(대학 1학년) 딸(고 1학년) 모두 두루 편하니 미싱사 누나는 하루 노동을 마치고 귀가하면서도 얼굴 수그러들 일이 없다.

[뒷이야기] 누나에게 바친 눈물... 누난 나의 히어로!

설움밥 눈물밥의 타관객지 생활을 정직한 노동으로 이겨낸 누나는 작으나마 서울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설움밥 눈물밥의 타관객지 생활을 정직한 노동으로 이겨낸 누나는 작으나마 서울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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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시대를 일으킨 우리들의 누나, 그 누나의 동생 영식이를 지난 6월 초 서대문 전주집에서 만났다. 누나 이야기가 실린 <전라도닷컴> 6월호를 받아든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서너 순배의 소주에 눈망울 붉어진 마흔 살의 전라도 사내는 이내 깡촌 소년시절로 돌아가더니 누이에게 눈물을 바쳤다. 

"창신동 언덕길 누나가 일하던 마찌꼬바에는 미싱 5~6대 있었어요. 누난 부엌도 없는 단칸방에 살았는데 동생들을 서울구경 시켜주려고 부른 누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석유곤로에 밥을 해서 먹인 뒤 일하러 갔다가 밤늦게 고로케 빵을 사들고 왔어요. 새벽 평화시장에서 부모님 옷을 사가지고 와서 챙겨주던 누나의 피곤한 모습….

난, 누나의 고된 노동을 몰랐어요. 그저 동네 친구들에게 서울구경 자랑하기에 바쁜 철없는 동생이었지요. 동생 학비를 대기 위해 누나가 뼈 빠지게 일하는 동안 난 호의호식하면서 계급 상승의 사다리를 타려고 했어요. 내 학력은 누나의 눈물, 슬픔, 인내의 소산이었던 거지요. 누나의 희생이 없었다면 시골에서 공고를 졸업한 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됐을지도 몰라요."

누나는 고향에 올 때면 모아 놓은 라면 스프를 싸들고 왔단다. 그 스프로 국 끓여 먹고, 밥 비벼 먹고, 동네 사람들에게 국물 맛 보여주면서 자랑했단다. 시골마을 통틀어 부잣집 한집밖에 없던 칼라TV, TV를 눈요기 하려고 그 부잣집을 기웃거리던 어느 날 누나가 칼라TV를 사왔단다. 그래서 가난했던 그의 집은 칼라TV를 두 번째로 소유한 부잣집이 됐단다.

"누난 우리 집의 젖줄이었고 요술방망이었어요. 동생이 해달라고 하면 뭐든지 해주었고, 가난한 집안 살림을 일으키기 위해 꽃다웠던 청춘을 산업전선에 바쳤어요. 대학에서 운동하면서 알았어요. 서울의 불빛이 낭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 화려한 불빛이 밤늦도록 미싱을 밟는 누나의 노동을 갈아먹는 불빛이라는 것을…. 누나를 생각하면 눈물의 나요. 누나의 슬픈 시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소주를 마신 게 아니었다. 그가 마신 것은 누나의 눈물이었다. 누나의 희생과 눈물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무심한 시대를 위해 흘린 참회의 눈물이었다. 그가 눈물을 멈췄다. 누나의 노동은 여전히 정직하고, 그 정직한 노동으로 마련한 24평 서민아파트에서 쫓겨날 걱정 없이 매형과 조카들이 오순도순 다 잘 지내고 있으니 기쁜 일 아니냐는 말로 건배를 제의하면서 이렇게 갈무리했다.

"우리 누난 그냥 누나가 나의 영원한 히어로(Hero)예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전라도닷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누나, #미싱사, #전남 강진, #고향, #서울, #억척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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