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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봄이 되면 새학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하숙집에도 변화가 생긴다. 지방에서 올라온 새내기들이 결합하면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얼굴들도 하나둘 눈에 띈다. 그들을 보면서 '나도 엄마 손 잡고 여기 이 방에 들어온 지가 엊그제 같은데…' 하면서 옛 추억에 잠긴다.

새내기와 함께 하숙집에 또 생기는 것들이 있다. 냉장고며 벽에 붙어있는 갖가지 종이들. 바로 '좀도둑'을 향한 '경고장'들이다. 입학 때부터 이 집의 원혼처럼 '짱' 박혀 있는, 하숙 5년차인 나는 이런 경고장들은 다 부질없는 짓인 걸 안다. 손 붙잡고 "이런다고 해도 절대 못 찾아, 애들아"라고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좀도둑을 향한 '경고장'? 범인은 못 잡는다

나는 이 글을 쓰는 하숙생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도둑을 맞은 하숙생은 심적, 신체적 타격을 받게 마련이다.
▲ 하숙집 입구 벽에 붙어있는 '경고장' 나는 이 글을 쓰는 하숙생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도둑을 맞은 하숙생은 심적, 신체적 타격을 받게 마련이다.
ⓒ 김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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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하숙집엔 층마다 공동 냉장고가 있다. 하숙생들은 거의 다 그곳에 먹을 것을 '저장'해 둔다. 처음엔 나도 먹을 것을 도둑맞았다.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었고, 내 기억에는 우유 1.5리터짜리 한 통이었다. 당시 새벽에 학원을 갔기 때문에 하숙밥을 먹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라 우유를 마시고 가려고 그 전날 사서 고이 모셔 놓았다.

밖이 칠흑 같이 어두운 시간에 눈 비비고 겨우 일어났지만 나름 일찍 일어났다는 마음에 나 자신에 대한 대견함으로 뿌듯했다. 씻고 나갈 준비를 다 마친 다음에 '어제 사두었던 우유를 먹어야지'라고 생각한 순간! 아니, 이게 웬일인가. 우유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것도 통·째·로.

물건을 도둑맞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의 분노는 말로 다 형언할 수가 없었다. 새벽부터 화가 치밀어 본질적인 자아고찰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나는 왜 서울에서 이런 생활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 우유 하나 마시려는 게 뭐 큰 죄라고, 평소에 남한테 피해 주지 않으면서 살았는데… 세상 참 불공평하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또한 이것이 세상의 이치인가 싶기도 했다. 바보 같이 성실하게 사는 사람은 다 도둑맞고 정작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 이 세상 이치인가 싶었다. 고작 '우유' 하나를 도둑 맞았을 뿐이지만, '서로 뺏고 뺏어야 살아 남는 것인가'라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나는 세상에 대한 큰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됐다.

'유통기한 지난 케이크, 먹고 괜찮았니?'

그래도 그때는 '경고장'을 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좀도둑'의 연이은 행각은 나로 하여금 '설교'를 하게 했다. 경고장은 두어 번 붙여보았다. 그중 첫 번째에서는 그 '좀도둑'에 대한 동정심을 나타냈다.

대충 내용은 '얼마나 돈이 없으면 이런 걸 훔쳐 먹고 사냐, 다들 힘든데 뭐하는 짓이냐'라며 도둑질 자체에 대한 일장훈계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 경고장은 냉장고를 열면 바로 보이게 한 3일간 붙여놓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므로 '언젠가는 보겠지'하는 생각에서였다.

두 번째 경고장은 약간의 '비아냥'을 섞어서 작성했다. 당시 나는 유명 커피 체인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마감 근무를 하게 되면 유통기한이 지난 케이크들을 다 회수해 갈 수 있었다. 같이 일하는 직원들도 내가 하숙생이라는 걸 알고 남은 케이크들을 '올인'해 주었기 때문에 내가 다 먹지 못한 것은 냉장고에 보관하게 되었다.

문제는 내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넣어두었던 것을 '깜빡'했다는 것이다. 보통 하루만 지나도 유통기한이 문제가 되는데, 일주일쯤 지났을 때 냉장고에 넣어둔 케이크 생각이 났다. 그제서야 냉장고를 열어보니 역시나, 또 없어졌다. 케이크 상자를 보고 좀 값이 나가는 것이니 '옳구나' 싶어서 가져간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을 먹었으면 아마 2주간을 화장실 변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돈독한 관계를 맺을 것이 틀림없었다. 조금 재밌는 상황이다 싶어서 경고장에 '그 케이크 유통기한 지나간 거니까 조심해서 드세요'라며 여유 있는 웃음을 날려주었다.

좀도둑을 향한 심경변화, 자포자기→ 분노→ 저주

지금까지는 그냥 먹을 것이니까,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그럭저럭 잊고 살 수 있었다. 먹고자 하는 사람의 본능을 억제한다고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러던 어느 날, 내 분노 게이지를 끝까지 차오르게 한 좀도둑이 있었으니… 바로 내 '구두'를 훔쳐간 '놈'이었다.

나는 키가 큰 편이라 높은 구두를 잘 신지 않는다. 도둑맞은 그 구두도 무슨 정신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점원의 세치 혀에 놀아나서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려 8센티미터나 되는 굽이었는데, 신발장에 넣어 놓고 잘 신지 않아 내 기억 속에서 잊혔다.

그러다가 한참 졸업앨범을 찍을 시즌. 옷값이며 메이크업 비용이며 여러 가지 부담되던 차에 그 구두가 다시 떠올랐다. 부랴부랴 신발장을 열었는데,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다른 신발은 다 멀쩡히 있는데 유독 그 구두만 안 보이는 것이다.

방도 뒤져보고 신발장에서 신발을 다 꺼내보고 별 짓을 다 해 봤다. 처음에는 '설마', '아니겠지' 뭐 이런 마음으로, 심장이 두근두근, 손이 다 떨렸다. 하지만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이 떨림은 분노로 바뀌었다. 이 분노를 어디다 풀 것인가. 나는 하숙생들 방을 다 뒤져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숙집 아줌마께 일러도 볼까도 싶었다. 경찰에 신고해 볼까도 생각해봤다.

또 다른 생각도 들었다. 내부인이 아니라 외부인의 짓은 아닐까? 하숙집 전체 현관문은 잘 잠겨 있지 않아서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드나들 수 있다. 어찌됐든 내 구두는 도둑맞았고, 그 구두는 어떤 누군가의 발에 고이 신겨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나의 분노는 다시 '저주'로 바뀌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주를 마음 속으로 퍼부었다. 그중 가장 약한 것을 말해 보자면 '그 구두 신고 가다가 발목이나 부러져라', '구두 훔쳐간 그 좀도둑은 3대가 멸하리라' 같은 것들이었다.

'3대가 멸할' 좀도둑 미연에 방지하려면...

하숙생활을 통해 나름 이런 '좀도둑' 시건들을 경험하면서 터득한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우유를 도둑맞은 뒤로는 절대 우유를 사서 바로 냉장고에 넣지 않는다. 꼭 입구를 뜯어서 누군가 마셨던 것처럼 위장해 놓고, 좀 치사하다 싶지만 내 방 호수까지 적어놓는다. 둘째, 과일은 비타민이 부족한 하숙생들이 가장 '혹' 하기 쉬운 품목이다. 그래서 난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꼭 하루 먹을 치만 사와서 그날 다 먹어 버린다.

셋째, 물조차도 웬만한 것은 냉장고에 넣지 않는다. 먹을 것을 집에 쟁여두는 스타일이 아니라 완전히 더운 여름이 아니고서야 냉장고 사용을 피한다. 차라리 냉동실이 더 안전하기 때문에 뭘 얼려놓을 때 넣어두곤 한다. 넷째, 높은 구두는 그 뒤로 산 적이 없지만, 혹여나 맘에 드는 구두가 생기면 방에 넣어둔다.

이런 몇 가지 방법들은 나의 단순한 범죄 방지용이고, 해결책은 딱히 없다. 하숙생들끼리 밤마다 돌아가면서 야간보초를 세울 수도 없고, 또 우유 하나 도둑맞았다고 안 그래도 바쁜 '민중의 지팡이'를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그냥 그 좀도둑이 '회개'하길 바라는 것이다. 나는 어떠한 종교에도 몸담고 있지 않지만, 지금은 '회개'라는 그 단어가 제일 절묘하게 어울린다고 본다. 이 글을 보는 하숙집 좀도둑이여, 회개하라!

덧붙이는 글 | '세입자 이야기' 응모글입니다.



태그:#좀도둑, #하숙, #세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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