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박노자. 나는 예전에 우연히 그와 마주쳐서 잠시 얘기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한국어 억양이 어색하고 비음의 악센트가 좀 특이했다고 느꼈는데, 어느 날인가 신문을 보니 얼굴이 올라오는 유명인사로 승격되었더라.

 

첫인상과 그가 낸 책들을 보면 심각한 괴리가 있다. 완벽한(?) 한국인 아닌데 어떻게 저런 문장력과 필체가 나오는 거지. 저자가 누군지 얼굴을 보지 않는다면 한국에서 최상급 논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박노자의 얼굴을 본다면 '이거 대필 작가가 쓴 거 아니야?' 라는 의심이 생겨도 의아하지 않을 만큼 말이다.

 

 박노자를 타고난 언어 능력의 소유자라고 인정한들, 나는 그가 한국 사회와 저변의 동아시아 역사의 가려진 틈에 미세한 시안(視眼)을 안착시킨 지각력은 어디서 왔을지 궁금하다. 이방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못 보는 영역을 더 잘 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아무나 그런 능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박노자의 책을 읽으면 그가 소외받은 사람과 계층을 보는 따뜻한 시선과 애정을 이성적으로 조절하며 글을 써나감을 알아챌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냉철하게 호소하는 절제된 격렬함이 담겨 있기에, 이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차분한(?) 분노를 경험하게 된다.

 

흔히 박노자 같은 사람들을 주변인, 경계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 송두율, 윤이상처럼 이념적으로 자신들의 신념과 배치되는 시대상황에 맞서거나 태생적으로 어디에도 속하기 힘들어서 항상 중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던 사람들. 하지만 이 단어는 너무 광범위하게 쓰이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박노자 같은 사람들은 차라리 '가장자리인' 이라 부르는 게 낫다고 본다.

 

이런 발상을 이 책 5부에 나오는 <'착한 사람' 예로센코>의 이야기에서 얻었다. 러시아 태생의 장님 사상가인 예로센코가 이에 해당한다. 예로센코는 인종주의에 찬 교사들에게 "흑인종이 백인종보다 덜 문명적이라 하신다면 여름에 불볕에 피부가 타서 까맣게 되면 문명인의 자격을 잃게 됩니까?" 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1세기 전에 인종주의의 허상을 단 한 문장으로 격파해버린 재치와 순발력에 감탄했다. 나는 이런 인물이 동아시아의 격랑기 역사에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는 평등한 세상과 약자와 노동자의 삶을 위해 살았던 진정한 지식인, 그래서 항상 중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에 머물면서 시대와 주류 세력에 맞섰던 사람이다. 이들에게 경계라는 개념은 의미가 없겠지.

박노자가 쓴 <당신들의 대한민국>,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를 워낙 주의(?) 깊게 읽은 탓인지 이 책을 읽은 느낌은 좀 밋밋했다. 이 책이 동아시아 근대화 시기에 한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에서 활약했던 사람들에 대한 개요와 에피소드, 평가 순으로 된 구성 탓인지 예전 책에서 느낀 긴 호흡의 맛은 떨어졌다(상대적이라는 의미이지 책의 퀄러티 자체는 높다).

 

그런데 박노자가 구한말과 일제 시대의 한국인 사상가와 지식인들의 반민족적이며 친일 행적을 비판한 것은 옳지만, 과연 그들을 동시대의 중국, 일본, 러시아의 인물들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 것은 불편했다. 이미 나라 자체를 잃고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헤매는 조선의 상황과 미약하지만 존립의 기반은 있었던 중국, 패권국으로서의 지위에 있었던 일본과 러시아의 지식인들이 품었을 문제인식이 동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런 시대적 상황이 친일파나 변절한 조선 지식인들을 위한 애처로운 변명거리로 전락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채호처럼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라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극단적인 민족주의 역사 컨셉(?)도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수긍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단지 민족주의에 갇힌 좁은 역사관으로 봐야 될지는 의문이다.

 

박노자는 우리가 열혈 애국지사나 신성화된 영웅으로 인식했던 많은 인물들의 친일이나 반동적인 수구적 행적을 까발렸다. 이런 인물들의 특정한 면, 특히 '애국과 민족' 이라는 명분으로 비판의 여지를 원천블로킹하는 수구세력들의 전략과 의도에 대해서 미세하게 파헤쳤다. 그래서 애국이나 전통, 민족이라는 컨셉을 내세우는 비이성적인 선동과 구호를 경계해야 된다고 주장에는 동감한다. 이런 문제의식은 최근에 있었던 미디어아트 포럼에서도 다른 형태로 제기됐는데 근본은 같다고 본다.

 

얼마 전 아트센터 나비에서 '뉴미디어와 예술의 확장' 이라는 포럼이 있었는데, 여기서 신보슬씨가 제기됐던 문제인식과 이어진다. 신보슬씨는 한국에서 미디어 아트를 하는 사람들은 작품을 만들 때 'Interactive' 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다고 했다. 미디어아트에서 관객과 상호작용이라는 주제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며, 관객과 소통한다고 작품에 센서를 설치하는 게 불문율(?)처럼 된 추세가 안타깝다고 했다. 이유는 이것 말고도 더 많은 것을 얘기할 수 있고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정작 놓치고 있는 진지한 사유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인물이나 시대에 대해 애국이나 민족 같은 지배적인 담론이나 잣대로만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할까? 유관순을 애국과 민족의 스펙트럼을 통해서만 본다면 그녀의 개인 삶은 전체의 틀 안에 갇히고 파묻힌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다양한 일이 있듯이 한 인물과 시대도 여러 모습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관심이 미치지 못했던 주변부의 삶에도 다양한 시선을 던져야 한다.

 

이 책은 뭉뚱그린 역사를 섬세하게 펼쳐놓은 책이다. 우리는 시험 공부의 필요성 때문에 거시적인 역사만 달달 외운 경우가 많은데 미시적인 역사도 알아야 균형 잡힌 역사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역사와 사회 그리고 우리의 삶을 올곧게 재정립하고 바로잡는 출발이기도 하다.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근대 망령으로부터의 탈주,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위해

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2007)


태그:#박노자,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경계인, #가장자리인, #주변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