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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날 지신밟기 놀이
 정월 대보름날 지신밟기 놀이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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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악대는 붉고 파랗고 노란 원색 화려한 색깔 옷에 저마다 상모며 고깔을 썼다.  느렸다 빨랐다 매도지장단에 맞추어 부드럽고 세련된 손짓 발짓 몸짓으로 우아하고 조화로운 춤을 춘다.  그 중에서도 고깔 사이로 드러난 앳된 소녀의 날아갈듯 사뿐한 소고춤이 한바탕 놀다 지나 가고나면 소년은 그 모습이 어른거려 한동안 열병을 앓는다.

상모 돌이
 상모 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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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농악은 서쪽에 위치한 평야지대의 우도농악과 산악지대의 좌도농악이 있다.  그중 정읍농악이 본산인 우도농악은 호남농악의 으뜸이다. 우도농악은 기층 집단의 뛰어난 예능에 의해 높은 수준의 예술적 향상을 가져왔다. 

정읍 우도농악 보존회
 정읍 우도농악 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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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높은 수준의 농악을 어린 시절 보고 즐기고 자랐건만 한동안 그 존재를 잊고 살아왔다.  그러다가 지난 2월 9일 정월 대보름날 남산한옥마을에서 정월 대보름 행사가 있었는데 그 행사 중에 '정읍우도농악보존회' 농악대가 굿판을 벌인 것을 보게 되었다.

반갑기도 하고 어린 시절 농악대가 지나가고 난 뒤 그들을 따라가고픈 마음으로 열병을 앓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하여 이번에는 기어코 그 농악대를 끝까지 따라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정월 대보름이 지나고 다시 보름이 가까워 올 무렵 정읍을 찾았다.  

'정읍우도농악보존회'는 정읍시청 앞 어느 건물 지하실에 자리하고 있다. 약 80평 남짓 되는 방에서 '정읍우도농악보존회'회장인 유지화선생은 농악을 열심히 전수하고 있었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정읍농악>의 보유자 유지화 선생은 1943년생으로 원래 전주 태생이다.  그녀는 13세 때 소리를 배우고 싶어 소리를 가르치는 선생을 찾아갔다. 그러나 소리를 배우는 것을 부모님들이 반대했다. 기생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정읍 우도농악 보존회에서 농악연습을 하는 전수생들
 정읍 우도농악 보존회에서 농악연습을 하는 전수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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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전수관에서
▲ 유지화(무형문화재 7-2호) 정읍 전수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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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반대로 소리 배우기를 포기한 그녀는 14살 때 '송광사' '일출암'으로 도망을 나와 농악을 배우기로 했다. 15세에 장구잽이 이명식으로부터 농악을 전수받았다. 16세에는 박성근으로부터 꽹과리를 전수받았고 20세에는 김재옥에게 농악가락을 전수받았다.

유지화에게 꽹과리를 전수한 박남식, 박성근, 김재옥은 다 같이 박만풍, 김도삼의 꽹과리 기능을 전수받은 사람으로 '호남우도농악'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유지화는 장구잽이 이명식과 전사섭으로부터 장구를 전수 받았다고 한다.

특히 전사섭은 유지화가 20세 되던 해부터 함께 농악활동을 하며 수련한 동료이기도 하다. 이처럼 유지화는 전통 농악가락을 온전하게 전승하고 있어 1996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었다.

정월 대보름날 한옥마을에서 상쇠잡이
▲ 유지화(무형문화재 7-2호) 정월 대보름날 한옥마을에서 상쇠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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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도농악을 보존하게 된 것은 유지화선생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농악을 전수한 명인들도 세월이 지나자 잇따라 타계하고, 함께 농악을 했던 동료들도 생활이 어려워 농악을 그만 두는 일이 많았다.

특히 남성들은 농악을 해서 생활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한때는 농악하는 남성이 없을 정도였다. 이때 우도농악의 명맥을 유지한 것이 바로 유지화를 중심으로 한 여성농악대였다.
그녀는 전북여성농악단, 호남여성농악단, 아리랑여성농악단, 유지화농악단 등을 조직해 우도농악의 명맥을 이어왔다.  유지화의 농악은 상쇠로서 또는 마당이나 무대에서 보여지는 가락과 춤에서 더욱 품격 높은 진가를 발휘한다.

유지화 선생은 지금까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녀가 길러낸 제자들은 중앙대, 한예종, 대불대 등 대학교와 대학원에 진학하고 교수 조교수 등으로 활동하는 제자들도 많다. 그녀 역시 이들 대학교에서 정기적으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제자들은 각종 대회에서도 많은 상들을 탔다. 2007년 김제 지평선축제에서 대상, 같은 해 전국 학생 마당놀이 경연대회 대상, 광주 임방울 축제 3등, 2008년 광주 임방울축제 대상 등을 탔다.

현재 정읍에서 가르치는 제자 초, 중, 고생  6명이 유지화선생의 기능을 온전하게 전승받고 있다.  이들은 매우 어린(초등학교) 때부터 농악을 배우고 있다.  그 중 문인재양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유지화선생의 집에서 함께 살면서 정읍 우도농악을 전수받고 있다. 문양은 현재 정읍 서영여고 2학년이다.  전남 구례가 집인 문인재양은 엄마의 권유로 이곳 정읍으로 농악을 배우기 위해 유학 왔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농악을 배웠다.
▲ 문인재양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농악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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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화 선생의 앞으로 계획은 지금 이들 제자들을 대학에 보내고 난 뒤 정읍에 전수관을 짓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읍 우도농악을 세계적인 놀이예술로 발전시키고 전수관을 국가에 헌납하는 것이라고 한다. 

몸동작은 바로 춤이되고, 소리는 가락이 된다.
▲ 유지화(무형문화재 7-2호) 몸동작은 바로 춤이되고, 소리는 가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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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화 선생이 강의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로 따라갔다.  젊은 후진들을 한 동작 한 동작 예술적으로 그리고 힘차게 가르치는 그녀의 열의에서 정읍우도농악이 세계적인 예술로 인정받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 유지화(무형문화재 7-2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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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읍 우도농악, #유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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