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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수퍼마켓 풍경
 일본 수퍼마켓 풍경
ⓒ 함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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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요즘은 슈퍼마켓 가기가 무서워요."

이지선(23·가명)씨는 일본 교토(京都) 소재의 R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다. 그는 학비는 물론 생활비의 대부분을 한국에 있는 부모님에게 받고 있다. 그러나 엔화가 오르면서 부모님에게만 의지하기가 어렵게 됐다.

4년 전 처음 일본에 왔을 때는 원화 10만 원이면 1만2천~1만3천 엔에 가까운 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7천엔도 되지 않는다. 원화가 반값이 된 것이다. 이씨는 학업에 지장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새로운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장면2 "벌써 서류심사에서만 다섯 번 떨어졌습니다."

박정민(28·가명)씨는 3개월 전, 3년간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 통지를 받았다. 경기 불황으로 박씨가 속해 있던 부서가 통폐합됐기 때문이다. 취업 비자가 있는 박씨는 6개월간 구직 활동을 할 수 있다.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어 퇴직 후 3개월이 지나면 월급의 50% 이상에 해당하는 보험금도 받게 된다.

그러나 박씨는 일본에서 구직 활동을 계속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 지난 3개월 동안 경력직으로 일할 곳을 찾아왔지만, 서류조차 통과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박 씨는 2월말까지 취업이 결정되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유학생은 늘고 일자리는 줄고... 몸살 앓는 일본 유학생들

경제 불황의 한파가 일본 열도를 강타하고 있다. 엔고 현상으로 유학생들은 '엔고몸살'에 시달리고 있다. 학생들의 경우 무엇보다 부담스러운 것은 비싼 학비다. 사립대학은 문과 기준으로 연간 100만 엔 가까운 돈을 부담해야 한다. 이공계열은 150만 엔, 예체능 계열은 학과에 따라서 200만 엔에 가까운 학비를 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경제 상황이 넉넉하지 않은 학생들은 평균 1~3개의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들이 주로 일하는 곳은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점 등이다. 백화점 내 한국 음식 판매점이나 불고기집 등 한국 식당도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아르바이트 자리다. 이들의 평균 시급은 대략 700엔~900엔. 그나마 최근에는 구직을 희망하는 유학생들이 늘어나면서 괜찮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아르바이트만으로 학비의 반이라도 낼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3개월 전 대학원 진학을 위해 일본에 온 최성원(25·가명)씨는 백화점 식품 매장에서 김치를 판매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최씨는 지난 3개월간 10여 곳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일본어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매번 쓴잔을 마셔야 했다. 김치 판매 아르바이트는 점장이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까지는 주 5일 이상을 아르바이트에 투자할 계획이다.

경제 한파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학생들뿐만이 아니다. 고용 시장도 얼어붙었다. 도요타, 소니 등 세계적 기업들마저도 대규모 감원 정책을 내놓고 있다. 일부 회사들은 뒤늦게 채용을 취소하기도 한다. 구직자들의 심경이 편할 리 없다. 이를 반영한 듯 최근 일본에는 '나이테이(內定) 블루(blue)'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이 단어는 기업으로부터 최종합격 통보, 즉 '내정(內定)'을 받았지만 장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청년들을 표현할 때 사용되고 있다.

극심한 슬럼프에 '히키코모리' 되기도

일본 지하철역 풍경.
 일본 지하철역 풍경.
ⓒ 함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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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불황기가 오기 전까지 일본은 '종신 고용'을 기본으로 하는 사원 평생 책임 제도를 자랑했다. 이런 구조는 직장을 개인의 삶의 최우선 가치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른바 '회사 인간'들이 탄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근래 일본에서는 종신 고용이라는 말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됐다. 오히려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을 비롯한 노동 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일본 자국인들의 취업도 쉽지 않은 상항에서 외국인들의 구직 활동이 간단할 리 없다. 3년 전 일본에 유학 온 최진우(31·가명)씨는 6개월 전 소규모 영상 제작 프로덕션에 입사했다. 그는 웹사이트를 뒤져 100여 개가 넘는 회사에 이력서를 보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방송 기술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한국방송(KBS) 등의 스태프로 참여하며 경력을 쌓아왔다. 그러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이력서를 열어보지도 않는 회사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직장이 100% 만족스럽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일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겠죠. 일본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리한 대우를 받더라도 참을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최씨는 현재의 직장에서 2~3년간 경력을 쌓은 후에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경제적 상황이 어렵다 보니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는 사람도 있다.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는 이들도 있다. 애니메이션 관련 4년제 대학에 진학한 김상희(25·가명)씨는 3학년이던 지난해 겨울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처럼 몇 주간을 방안에서만 지내기도 했다. 김씨는 학과 과정이 끝나는 대로 한국에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일본 유학생들 사이에는 '계급'이 있다

물론 모든 유학생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부성 장학금'과 같이 정부 기관에서 지급되는 장학금을 받는 일부 학생들은 장학금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한 정도라고 한다.

"장학금으로 생활하는 친구들은 저희 처지에서는 '귀족'이죠."

도서관, 편의점, 불고기집, 신문배달 등 돈이 되는 아르바이트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는 어느 학생은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유학생들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하여 일부 학교는 독자적인 지원책을 내놓기도 한다. 엔고 현상이 시작된 지난해 겨울부터 자비로 유학하는 학생들에게 등록금의 일부를 지원하거나, 납부일을 늦춰주는 학교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일회적이고 한정된 조치에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의 경제 상황이 안정되기 전까지는 일본 체류 중인 한국인들은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게 됐다.


태그:#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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