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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는 피의자 신원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게 맞다. 나도 경찰에 붙잡히자마자 언론사 카메라 앞에 서야 했지만, 억울한 사람이 진실을 다투는 과정에서 치러야 할 고통이 너무 크다."

 

정원섭 목사(충절교회)가 3일 경기서남부 연쇄살인 피의자 강씨의 이름·사진 공개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정 목사는 1972년 9월 춘천경찰서 역전파출소장 딸을 강간 살해한 범인으로 몰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5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정 목사가 지난해 11월 28일 춘천지방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아내기까지 그는 36년간 살인 누명을 쓰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아야 했다. '살인자 가족'의 멍에를 써야 했던 그의 아내와 자식들의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실 최근 붙잡힌 연쇄살인 피의자 강모씨와 정 목사의 경우는 다를 수 있다. 강씨가 사체를 유기한 현장이 확인되면서 그의 혐의내용은 최종 법원에서 뒤바뀔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지만 이는 무죄추정의 원칙과 초상권을 어기는 것이고, 수사기관이 잘못 잡아들인 피의자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줄 수 있다는 점에서 정 목사의 말을 귀담아들을 대목이 많다. 

 

"국민 알권리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상처주지 말라"

 

정 목사는 이날 오후 <오마이뉴스> 전화 인터뷰에서 "그 당시 경찰과 언론이 나를 완전히 변태성욕자로 몰아세웠는데, 내 아이들이 엄청나게 고생했다"며 "'국민의 알권리'라는 이름으로 언론이 아이들까지 상처를 주는 일은 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내 사건은 말 그대로 여론이 좌우했다"며 "구속된 후부터 기소, 재판까지 여론몰이가 내 운명을 결정짓는 데 크게 작용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정 목사는 "36년 전에도 경찰은 '하나를 죽이나 둘을 죽이나 감옥 가기는 마찬가지'라는 식으로 나를 꼬드겼는데, 이번 사건도 경찰이 강씨에게 그 동안의 모든 흉악범죄를 뒤집어씌운다는 느낌이 든다"며 "언론이 경찰 발표를 너무 믿지 말고 사건을 차분히 검증해 달라"고 말했다.

 

정 목사와의 일문일답은 다음과 같다.

 

"사진공개 후 가족들은 야반도주... 집안 풍비박산"

 

- 1972년 사건으로 어떤 고통을 겪었나?

"내가 붙잡히자마자 언론은 경찰의 허위 발표를 그대로 베껴썼다. 피살당한 여자아이는 물론이고 '내가 만화가게 여종업원을 건드렸다', '마을의 또 다른 여자아이도 건드렸다'는 식으로 경찰과 언론이 나를 완전히 변태성욕자로 몰아세웠다. 그때 인권은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 본인의 사진이 공개된 후 가족들은 어떻게 대처했나?

"내가 잡혀가고 사진이 공개된 후 아내는 숟가락 하나도 못 챙기고 아이들을 데리고 한밤중에 고향(춘천)을 떠나야 했다. 나는 교도소 가고 아내는 교통사고 당하고 집안이 완전히 풍비박산이 났지만… 내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

 

- 강씨 사건을 계기로 유무죄가 확정되기 전에 피의자의 사진과 이름을 공개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나도 알 권리와 피의자 인권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적어도 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는 피의자 신원을 공개하지 않는 게 맞다고 본다. 나도 경찰에 붙잡히자마자 언론사 카메라 앞에 서야 했는데, 억울한 사람이 진실을 다투는 과정에서 치러야 할 고통이 너무 크다."

 

- 강씨의 사진이 공개된 후 그의 가족들이 당할 고초를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내 아이들도 엄청나게 고생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모른다. 피의자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유무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언론이 보도를 자제해주는 배려가 필요하다. '국민의 알권리'라는 이름으로 언론이 아이들까지 상처를 주는 일을 하면 안 된다."

 

"조금 더 차분해져야... 정확한 검증 필요"

 

- "사진이 공개 안 되더라도 어차피 주변사람들은 다 안다. 요즘 세상에 누가 아이들을 찾아가서 해코지를 하겠냐"는 반론도 있다.

"자식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면 교사들이 학부모에 대해 알 것이고, 아이들 얘기가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퍼져나가지 않겠나? 그런 가능성까지도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다."

 

- 공권력의 인권 의식이 과거보다 많이 개선됐다고 보나?

"나는 경찰을 믿지 않는다. 기왕에 저지른 잘못 말고도 하지도 않은 죄까지 멀쩡한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더라. 그때도 경찰은 '하나를 죽이나 둘을 죽이나 감옥 가기는 마찬가지'라는 식으로 나를 꼬드겼다."

 

- 어쨌든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 사건이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다.

"내 사건은 말 그대로 여론이 좌우했다. 구속된 후부터 기소, 재판까지 여론몰이가 내 운명을 결정짓는 데 크게 작용했다. 이번 사건도 강씨에게 그 동안의 모든 흉악범죄를 뒤집어씌운다는 느낌이 든다. 조금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 언론도 경찰 발표만 너무 믿지 말고 이번 사건을 정확히 검증해보길 바란다."


태그:#연쇄살인, #정원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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